▣소 선지서

[스크랩] 말라기 강해

공 상희 2009. 5. 6. 12:33

 

 

 

 

 

 

 

말라기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말라기 1:1-5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2007. 10. 31.

 

 
1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5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1절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 말라기입니다. 말라기의 뜻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인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왜 경고를 하신 것입니까? 첫째는 오늘 살펴볼 내용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였다고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는가 하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타락한 제사장들입니다. 셋째는 타락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2절을 봅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면서 대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신 것이라는 말입니까? 우리의 형편을 보세요!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는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사랑하신 내용이라는 말입니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로 가고 지금 이렇게 초라한 나라로 고생하게 만드셨는가 하는 항의인 것입니다.

 

 

 

학개 2:6-9절을 봅니다. “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 재건이 지연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해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보다 자기들의 집짓기에 바빠서 미루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독려하여 성전이 재건되고 나서 선지자들이 이런 예언을 하였고 백성들은 이런 영광을 기대하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한해가 지나고 두해가 지나도 그런 조짐이 없는 것입니다. 십년을 기다리고 이십년을 기다려도 세계 만국의 보배가 하나님의 전으로 몰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살아가기가 더 힘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도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성전재건 후에 감사와 감격으로 제사를 드리던 마음들이 시들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면서 제사장들도 타락하고 백성들도 타락하여 간 것입니다. 그러니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셔야지, 지금 고생중인데 사랑은 무슨 사랑을 하셨다는 말입니까? 이런 항의를 들으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항의가 생각납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셨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면 어떻게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불만입니다.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면 고생을 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항의입니다.

 

 

 

신명기 7:6-8절을 봅니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여기의 말씀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언약한 자기 맹세를 이루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선택인 것입니다.

 

 

 

2절 중반에서 3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항의성 질문에 하나님께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지만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한 것입니다. 배가 아파서 하나님께 물어보니 두 민족이 네 태중에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뱃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이며 이 선택을 사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야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야곱의 생애와 에서의 생애를 비교해보면 야곱이 형보다 훨씬 못난 자로 나옵니다. 교활하게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고생도 에서보다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아내 얻기 위하여 14년 동안 외삼촌을 섬깁니다. 두 아내와 두 아내의 몸종을 또 아내로 맞아 네 명의 아내와 살았습니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보게 됩니다.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이 되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딸이 강간을 당하고 장남이 계모를 범하는 비참한 일도 경험했습니다. 노년에는 흉년이 들어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가야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바로 왕 앞에서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야곱의 생애를 드라마로 만들면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그램의 그 어떤 내용보다 더 처절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 이름이 이스라엘의 민족의 이름이 되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조금 부강한 것을 빼면 얼마나 고생한 나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제 울산에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울산의 강 목사님이 뇌동맥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라고 해서 집사람과 함께 문병을 갔습니다. 울산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세 분의 목사님도 함께 병실에서 만났습니다. 입원한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하시면서 교인이 없으니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조그마한 야식업을 하셨습니다. 사모님은 만들고 목사님은 배달하고 그렇게 어렵게 사시다가 뇌동맥이 터지기 직전에 수술하였습니다. 병원장이 물었답니다. 보험은 들어둔 것이 있느냐고. 보험들 형편이 되지 못하여 들지 못하였다고 하니, 무엇 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보더랍니다. 족발 판다고 하였답니다.

 

 

 

다른 세 분도 잠시 보자면 한 분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는데 사고 나기 한 달 전에 몇 개 보험을 다 해약하였답니다. 만약 그 보험을 해약하지 않았다면 목돈이 마련되었을 것이고 주변의 이런 목사님들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주님 믿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목사님은 학원에 봉고를 지입하여 운전을 합니다. 또 한 목사님은 사모님이 교사라서 형편이 좀 나은 분인데 이번에 아들이 중3이고 공부도 꽤나 합니다. 그 아이가 자립형사립고 원서를 넣고 싶다고 해서 무리가 되지만 그러라고 하였는데 시험 2주를 앞두고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팔꿈치에 눈을 맞아 안구 뼈의 함몰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목사님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면 세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고개를 도리질 하고 돌아설 것입니다. 재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저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살아왔는데 이런 형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서 이게 무슨 꼴입니까?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그런 사랑 싫습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선택이 사랑입니다. 이 선택을 받은 야곱은 형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에서는 오히려 야곱보다 부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을 맞이하려고 에서가 데리고 온 사병이 400명입니다. 자기 집안에서 기른 사람인지 돈을 주고 사온 용병인지 몰라도 아브라함의 318명보다 더 많은 사람을 거느린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선물을 거절할 정도로 자기도 넉넉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야곱 사랑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죽을 때에 자신의 해골을 아들이 출세한 애굽에 묻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손을 어긋나게 하여 축복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를 보여주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임을 온 몸으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미워한 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3-5절입니다.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하는데 이 미워하심은 감정적인 미움이 아니라 선택하지 아니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지 아니한 자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받은 자도 이런 노력을 다 합니다만 결국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게 되지만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은 계속하여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서의 기업을 황무케 하면 그들은 다시 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헐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헐어버림을 통하여 사람들의 입에서 그 지경이 악한 지경이며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바댜 2-4절을 봅니다. “봉독” 이 심판의 말씀이 바로 에돔에 대한 것입니다. 에돔 즉 에서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힘과 능력을 믿는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힘 있고 강하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서가 망한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당시에 에돔은 바벨론의 갈대아 군대에 의하여 거의 멸망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을 입은 너희는 에돔처럼 망해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경고를 보내시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선다는 말씀이 5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시면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선택적인 사랑에 대하여 에서와 야곱을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이 로마서 9:24-25절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고,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고 부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원한다고 해서 부모가 다 해주는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아닙니다. 잠깐 괴로운 것이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이라면 강제로라도 주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 자기 택하신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자기 언약을 따라 택하신 백성에서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진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입니다(롬5:8).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내어놓으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마다하고 다른 사랑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디 이 사랑에 눈뜨게 하여 주옵소서!

 

 

 

 

말라기 1:6-14  어떻게 멸시하였나이까?  2007. 11. 7.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하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면서 대들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어렵게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자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열방의 보배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오기를 기대하였는데 전혀 그럴 조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하는 항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는가 하며 또 대드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여야 할 제사장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신데 공경함이 어디 있으며 주인이신데 두려워함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자간으로, 주인과 종으로, 남편과 아내로, 목자와 양으로, 왕과 백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을 자식으로 양육하였는데 소나 나귀보다 못하다고 하십니다. 짐승들을 주인을 알아보는데 어떻게 너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6절 끝에 보시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주의 이름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7절을 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주의 이름을 멸시하지도 않았고 주님을 더럽게 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주님을 더럽게 여긴 것인지,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주의 상을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를 따라 제사를 드리기에 결코 멸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의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멸히 여기는 죄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8절에서 눈먼 희생을 드리는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으로 드리기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제물을 드려야할지를 율법에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2:17-25절에 보시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릴 때에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합니다. 또한 흠이 없이 온전하여야 되는데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열납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에서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총독이 너를 기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12-14절입니다. 6-10절을 다시 강조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성의 없는 제사마저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는 것입니다. 번폐스럽다는 것은 귀찮고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코웃음 치면서 훔친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짐승 떼 가운데 수컷이 있지만 사기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10절에서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성전 문이 닫히면 제사가 없어지고 제사가 없어지면 속죄제를 드릴 수가 없으니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사를 드리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재물을 처음에는 정성껏 드렸을 것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자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여 초라하지만 그러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클 것이며 열방에서 보배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기다리면서 바르게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리라는 영광은 나타나지 않고 어려움만 가중되니 이렇게 제사를 드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그런 마음이 든 것입니다. 여전히 이방 나라는 강대국이고 자기 나라는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사를 드려도 별 소용이 없다는 마음이 들면서 자연히 형식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껏 절기를 지키며 제사를 드려도 복을 주지 않는데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형식적이 되고 마음이 빠져버리니 총독도 받지 않을 예물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멸시하였는가 합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께 은혜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한들 하나인들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여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이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면서도 언약궤를 메고 가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언약궤 앞에서 죽임 당하고 언약궤는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홉니와 비느하스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제사를 멸시하고서도 은혜를 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물론 구약처럼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여러 모양의 봉사를 할 때에 우리의 태도가 어떠합니까? 교회에 잘하고 목사에게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와 그런 것이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복이 주어진다는 말을 들을 때의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종교적인 열심이라도 내면서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였는데 그런 것은 다 예수님이 완성하셨기에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다 예수님의 공로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 동안의 열심들이 시들해 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만큼 복이 주어진다는 것과 그렇게 열심히 하여도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의 고발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영광과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영광이 다른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들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난당하는 것은 외면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하는데 그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한 대로 복을 받지 못할 바에야 무엇을 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드리고 절기를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모습이 여호와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며 삶의 일순위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디도서 1:16절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것이 가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지만 그들의 행위로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우리도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11절입니다.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에서도 하나님은 큰 임금이기에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 민족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온 열방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일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예배의 시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장소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믿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니다. 마침 ‘신앙상담’란에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답변을 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을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의 온전하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를 능히 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도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대로 한 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심으로 자신의 몸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전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거늘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한지 너희는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사람들의 행위로 보자면 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저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온전한 제사장의 역할을 믿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라고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말씀합니다. 부디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라기 2:1-9  생명과 평강의 언약  2007. 11. 14.

 

 


1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6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9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니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면서 대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지난주 본 말씀에서는 네가 나를 멸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는가 하면서 대듭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너희가 흠 있는 재물을 드리면서도 그것조차 번폐스러워하고 코웃음 쳤다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멸시하였다는 책망이 계속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제사가 드려지는 가장 큰 잘못은 제사장들에게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제사를 드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죄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기억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제대로 자기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그래 지도자가 문제야!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책임은 회피하려고 하는 죄된 속성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정당화시키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챙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문제가 일어난 것은 제사장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백성들도 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 한 통속이 되어 있기에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체가 제사장 나라입니다(출19:6).

 

 

 

오늘 ‘오마이 뉴스’의 어느 기사를 보았더니 아무리 많은 부정한 일들이 드러나더라도 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나라가 꾸중물 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서 더러운 물이 콸콸 흘러나오니 그런 정도는 용납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조적인 기사였습니다. 왜 이런 인용을 하는가 하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이 모양입니다. 누가 누구를 탓할 입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눈 먼 것으로 희생을 드리고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오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이 제사장이나 백성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은 제사장들에게 합니다. 그들 속에 백성들이 다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망하면 백성도 다 망하는 것입니다. 1절-3절까지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고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저주가 조건적으로 내려질 것이라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다음 말씀에서는 이미 저주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저주하신 이유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저주한 상태가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저주의 선포는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절기 희생의 똥을 너희의 얼굴에 발라서 함께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짐승을 잡으면 짐승들이 죽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 똥이 나옵니다. 그런 똥들과 짐승을 잡을 때에 버리는 것들과 함께 제사장마저 치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버려져도 사실은 마땅한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주님께서 갚으신다면 우리도 제물의 똥과 함께 버려져야 할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요한서신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목사나 전임 사역자나 하는 것이고 우리 같은 평신도들을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9절에서 성도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제사장이 아니라서 제사장의 책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나는 직분자가 아니니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구약처럼 버림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밭에도 거름에도 쓸모가 없어서 길에 버려져 밟힐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런 책망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이 명령을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을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 너희가 알 것이라고 합니다. 레위와 세운 언약을 레위지파는 어겼지만 그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취소할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항상 있게 하시기 위하여 이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위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그 신실하심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입니까?

 

 

 

5-6절입니다. 생명과 평강의 언약입니다. 성경 원문에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과 그 평강’입니다. 유일한 생명과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도, 줄 수도 없는 생명과 평강을 레위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언약을 주신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레위언약이 세워진 과정을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에 어린 양의 피로 장자가 다 살아남았습니다. 그 장자는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구별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지파에서 장자를 계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지파를 정하였습니다. 그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민3:12-13). 처음 난 것은 다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게 한 것입니다. 이들의 희생과 봉사로 다른 이들이 복을 받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이렇게 제사장 직분을 맡을 어떤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레위지파는 야곱으로부터 시므온과 함께 흩어질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후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 사건 때에 모세가 여호와의 편에 설 자는 오라고 하였을 때에 레위지파가 여호와의 편에 서서 우상 숭배자를 도륙하였습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유언대로 흩어지지만 동시에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입니다(출32:29). 이제 이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축복을 비는 자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25:10-13절을 봅니다.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비느하스의 질투가 바로 제사장의 질투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우상숭배를 하는 데 대하여 여호와의 질투로 질투한 비느하스 즉 레위지파에게 평화의 언약과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말라기 시대는 이런 제사장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일에 제사장이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 제물의 똥을 발라서 제거하여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영원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와 율법과 제사장이란 무엇을 유지하기 위한 직분입니까?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5-6절이 제사장의 직분인 것입니다.

 

 

 

7절을 봅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율법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수시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율법의 중심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제사장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여호와의 사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여호와의 사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8절입니다. 너희는 정도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른 길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듣고 그 율법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율법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어기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면 나도 너희를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와 맺은 언약이 생명과 평강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가 그 언약을 이루어 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파기하실 수 없기에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제사장의 역할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히브리서 7장에서 아주 상세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릴 때에 레위지파에 소속이 되지 아니한 이때에 레위지파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이 멜기세덱을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의의 왕, 평강의 왕입니다. 레위지파와 맺은 언약이 무슨 언약이라고 하였습니까?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생명과 평강이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유일한 생명과 유일한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생명과 평강입니다. 세상의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생명과 평강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레위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연약하여 담당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충분하고 완전하게 담당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7:24-26절입니다.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어지는 말씀에 보시면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 얻은 것입니다.

 

 

 

 

말라기 2:10-16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2007. 11. 21.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11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을 것입니다. 특히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면서 묻고 싶어 합니다. 다른 성경에서도 그런 질문들이 많습니다만 특히 말라기서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많습니다. 첫째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사랑하신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1:6-2:9절의 말씀에서 너희가 나를 멸시한다고 하시자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까?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따지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고 제물도 드리고 절기도 지켰는데 왜 멸시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물을 드리는 그 내용에 하나님과 맺은 레위 언약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것을 드리면서 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너희의 헌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헌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의 신들과 성경의 하나님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세상의 종교와 신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정성을 바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도 계속하여 언약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이스라엘은 한 아버지 한 하나님을 가진 것입니다. 신명기 32:6절입니다.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고린도전서 8:6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처럼 한 아버지 한 하나님을 모신 자들이 어떻게 형제에게 궤사를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궤사를 행한다는 것은 배신하고 반역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언약을 배신하고 반역하는 행위가 궤사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는 것은 곧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열조가 받은 언약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언약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에 대한 궤사가 곧 아버지께 대한 궤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심판 때에 양과 염소를 나누실 때에 그 기준을 무엇으로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춥고 굶주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준 자와 그렇게 하지 아니한 자를 나누어 버리십니다. 예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형제들에 대하여 궤사를 행한 것만이 아니라 가증한 일도 행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가증한 일이란 제물을 드릴 때에 더러운 것을 드리면 가증한 것이 됩니다. 우상 섬기는 사람이나 땅이 가증합니다. 남녀 사이의 간음도 가증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가증한 것이란 우상을 섬기는 자와 결혼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신의 딸과 결혼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신을 섬기는 자와 결혼하는 것은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방인이라고 무조건 결혼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에 편입이 되면 결혼할 수가 있습니다. 룻과 같은 여인은 이방의 모압 여인이며 과부였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에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신의 딸과 결혼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보면 늘 이 문제가 떠나지 아니합니다.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만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미디안 여인들에게 미혹을 받아서 바알에게 복속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늘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과의 결혼이 문제였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은 이방신을 섬기게 됩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만 그곳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이방인과의 결혼이 계속되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에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개혁이 나옵니다. 이런 일들이 언약을 욕되게 하고 성결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나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3절에서는 눈물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이방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린다고 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에서 이방의 우상인 담무스를 향하여 애곡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겔8:14). 하나님의 언약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방식으로 눈물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13절 중반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당장 따집니다. 어찜이니까? 다른 번역으로 보면, 어찌 된 일입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서 문제이지 헌물을 드리는데 왜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배가 고파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지요! 무엇이 부족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천하 만물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까? 지난주에 본 레위와의 언약 때문입니다. 제사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으로 인하여 그 생명과 그 평강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희생을 통하여 생명과 평강이 주어지는 것을 레위 언약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제사를 번폐스러운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인들 받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제사 언약을 무시한 것입니다. 오늘은 결혼 언약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무시하고 배신하는 것은 결국 언약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배신하는 행위가 되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제물을 받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찌하여 그렇게 하셨나이까? 왜 우리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까? 하는 자들에게 답변을 합니다.

 

 

 

14절 중반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다는 것입니다.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궤사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취한 아내를 보기 싫다고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를 아내로 데리고 온 것입니까? 이방신을 섬기는 딸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방신의 딸들의 관심사는 오직 세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겉모습에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언약으로 취한 아내를 버리고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서 취한 아내, 조강지처를 버리면서도 율법대로 행하였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모세가 이혼하려면 이혼증서를 써 주라고 하였다는 조문(신24:1)을 가지고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 적용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데도 그들은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은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가짜이지만 자기들은 그것이 진리임을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시험하여 묻습니다. 올무로 잡으려고 율법으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시험출제자에게 시험 치르는 자가 테스트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연고를 무론하고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좋으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 부모를 떠나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되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하여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보다 다른 여자가 마음에 들면 아내를 계속 구박하고 그냥 쫒아내어 버리면 그 여인은 보호를 받을 수가 없기에 이혼증서라도 주어서 재혼이라도 하게 함으로 그 여자를 보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 이 율법을 가지고 음행의 연고 없이도 마음대로 이혼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러면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이정도로 완악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을 어려서 취한 아내를 버리고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하는 것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지었다고 하십니다. 아담에게 아내를 여럿 주실 수도 있었지만 왜 하나를 주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경건한 후손을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라고 하십니다.

 

 

 

16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는 자를 미워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궤사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혼도 하고 싶을 때가 있고, 약한 자를 괴롭힐 때도 있고, 형제를 무시하고 깔보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면서 따지고 대드는 인간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끊어져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호세아 2: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신랑이 변하지 아니하는 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런 반응이 나올 것입니다. 어찌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십니까!

 

 

 

 

 

말라기 2:17-3:6  주께서 임하실 것이라  2007. 11. 28.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라기서는 그 동안 보아온 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논쟁이 많습니다. 1장에서 너희가 나를 멸시하였다고 하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우리가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2장에서도 내가 너희의 헌물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자 어찌 된 일입니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2:17절을 보시면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였다, 피곤하게 하였다고 하시는 말씀에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항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라”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는 질문은 정직한 선지자들도 많이 질문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나 하박국 선지자도 공의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시편 37편과 73편도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동일한 질문 같지만 그 저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불신앙의 말이 있고 하나는 신앙의 말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나 하박국 선지자나 시편의 질문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한다고 하시지 않으시고 응답을 주십니다. 악인이 아무리 형통해 보이지만 졸지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항의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질문 같지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사는 자들입니다. 1장에서 본 대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병든 것, 저는 것, 눈먼 것을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줄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께 잘 한다고 여기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얼 잘못하였는가 하는 항의성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괴로우신 것입니다.

 

 

 

이사야 1장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고 무수한 헌물을 가지고 오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절기지킴과 제물 드림과 분향이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물을 드리고 나가서는 악을 행하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악업을 버리고 공의를 구하며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는 불신앙적인 힐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3: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사자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사자’라는 말이 말라기라는 이름과 같은 말입니다. 말라기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말라기가 하나님의 사자이지만 말라기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예언한 ‘내 사자’란 세례 요한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0절입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 오실 메시아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한계가 이런 모습입니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하였지만 자기들 나름대로의 메시아관이 정립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내용이 바로 말라기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3:1절에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께서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말씀이신데 예수님은 이 여호와의 자리에 자신을 그대로 대입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언행을 유대인들이 견디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예언대로 하나님의 사자가 세례 요한으로 왔고 그 세례 요한이 증거한 주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분이 주가 되십니다. 주란 여호와 하나님께 호칭한 내용인데 예수님을 향하여 주라고 고백한 것이 성령이 임한 사도들의 증거였습니다. 주께서 홀연히 전에 나타나신다고 합니다. 홀연히 나타나시는 것은 예기치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심판의 주가 임하신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언약의 사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께서 임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임하신 것은 12세 때에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내려가지 않고 성전에 계셨을 때에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므로 자신의 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시에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헐어 버리고 3일 만에 다시 세운 것이 바로 주의 전에 임하신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 분이 그들의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로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그의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누가 설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께서 임하시는 날, 즉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지만 그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을 다른 선지자들도 예언하였습니다. 구원과 기쁨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기에 두려운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임하셔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주께서 임하시는 날에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불이란 부정한 것을 소멸하는 동시에 정화시키는 일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하실 자를 심판하시고 정결케 하실 자를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세탁하는 사람들이 잿물로 옷감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언약의 사자가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은을 연단하는 것처럼 레위자손을 연단하여 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드린 제물이란 1장처럼 여호와를 멸시하는 제물이었지만 이제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제물을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물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불 심판을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금과 은을 연단하시는 것처럼 연단하셔서 의로운 제물을 드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같이, 고대와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고 하나님도 기뻐하신 제물 드림은 많지 않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드린 것이 몇 번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구약의 제사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사자가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수 있도록 일을 이루어 내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자기들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을 드릴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무엇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까?

 

 

 

마태복음 23:23-26절입니다. “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이 말씀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이미 구약의 말라기 시대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속에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이 다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말라기 3:5절입니다. 주님이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술수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는 자,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압제하며 억울하게 하는 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라기 시대의 고발이나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고발하는 내용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 노릇하고 있지만 그 속은 더러움으로 가득하기에 예수님께서 소멸하는 불로 임하셔서 그들을 다 태워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과 동시에 자기의 남은 백성들은 정결하게 되어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정결이란 주님의 피 뿌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남은 백성들이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가 하면, 6절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역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 진멸당하고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남은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이 땅에 초림하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 15:16절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가 받은 은혜의 직분이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함으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시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도 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끝내실 때가 재림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증인이어야 합니다. 주께서 홀연히 임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말라기 3:7-12  내개로 돌아오라  2007. 12. 5.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전체의 상태가 어떤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보아도 언제 제대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잠시잠깐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언제나 잠깐이고 곧 거역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이 답변은 정말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가기를 원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답해온 것처럼 너희가 나를 멸시하였다고 하면, 우리가 언제 멸시하였습니까? 하는 식의 대답입니다. 이런 답변이 나오는 것은 자기들은 돌아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나서 선지자들의 약속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도 드리고 절기도 지키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어려움만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형식화 되어버렸고 심지어 병든 것, 저는 것, 흠 있는 것들을 드리면서도 그들은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시니 어떻게 하면 돌아가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8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도적질하였나이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인데 온 나라가 다 이렇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십일조와 헌물을 온전하게 드림으로 하나님의 집의 창고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황충을 막아주시고 과일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복되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이 그런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이 드려져야 하는지, 십일조가 무엇인지 그 근원부터 찾아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4:17-20절입니다. “봉독” 소돔과 고모라 성의 왕이 그돌라오멜을 반역하였다가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쳐들어 와서 조카 롯까지 사로잡아 가게된 것을 아브람이 318명의 군사를 데리고 가서 대승을 거두고 사람과 재산을 다 되찾아오는 때에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한 내용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합니다. 이때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아브람의 승리는 아브람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여주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자신의 승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일어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가 된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가 아니라 복을 받았기에 그 복의 통로가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타나는 십일조는 야곱이 형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들판에서 잠을 자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나타나셔서 언약을 주십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서 도망가는 신세인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주십니다.

 

 

 

창세기 28:10-22절입니다. “봉독”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사닥다리가 보이고 그 사이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주시면서 야곱을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을 받고 나서 야곱이 서원하면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역시 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이러한 십일조가 모세를 통한 율법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출애굽 할 때에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기념하는 장치로서 십일조가 제정이 됩니다. 출애굽 한 이후 모든 짐승이나 사람이나 처음 난 것의 수컷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지파의 맏이를 대신하여 레위지파를 맏이로 대신하게 하십니다. 이때부터 각 지파는 모든 소산물의 십분의 일을 레위지파를 위하여 드리게 합니다.

 

 

 

레위지파의 특징은 그들의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받아서 살지만 땅 없는 레위지파가 땅이 있는 다른 지파를 축복하는 장치가 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땅이 없는 고아 과부 나그네도 십일조의 혜택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매 3년마다 십일조를 더 하여 이들을 위하여 사용하게 합니다.

 

 

 

그러면 레위지파는 십일조를 받아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또 그들이 생활합니다. 이들의 기능이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화목을 이루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가 드려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살도록 하시는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가 제대로 된 제사를 드림을 통하여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말라기 2:5절에서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생명과 평강이 레위와 세운 언약을 통하여 주어지는데 이 레위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기한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느헤미야서에도 나타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나서 레위지파를 제대로 정비하여 세우고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서는 바벨론에 다녀오는 사이에 다시 십일조가 드려지지 않았기에 레위 사람들이 그 직무를 행하지 않고 각각 그 전리로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불러와서 정비하고서는 레위언약을 새롭게 하였으니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간적인 순서로는 말라기보다 느헤미야가 먼저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레위지파를 정비하고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게 하였지만 다시 제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에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림으로 복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온전하게 드리지 못하였기에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까? 이 문제는 신약까지 가 보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마태복음 23:23절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유대인들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도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 고생을 하면서 왜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할까를 연구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 보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만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까? 텃밭에 가꾸는 향신료조차 십일조를 계산하여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빼 먹은 것입니까? 의와 인과 신은 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로움과 인자와 믿음을 버려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자가 없다는 결론이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복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람이 노력하여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 말씀을 보시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데 한 가지 십일조 잘한다고 복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온전한 십일조란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까지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저주를 예수님 자신이 온전한 십일조가 되셔서 대신 드리는 것입니다.

 

 

 

레위지파가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맏아들의 희생을 대신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레위와 맺은 언약입니다. 제사를 통하여 생명과 평강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로는 온전한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따른 레위지파와 다른 별다른 한 제사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7장에서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가 태어나기도 전에, 즉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십일조란 십일조를 바침으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았기에 십일조를 통하여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증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시라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온전하게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인한 영원한 생명과 평강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레위와 세우신 언약의 내용이 생명과 평강의 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7:22-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구나! 이제는 십일조를 안 해도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이제는 십일조를 율법을 따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왕 같은 제사장이기에 레위지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을 따라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이 아니라 아예 성도 자신이 거룩한 제물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롬12:1).

 

 

 

그러므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도 당연하고, 극심한 어려움가운데서도 형제를 위하여 힘에 지나치도록 헌금하는 일도 가능하고, 자원함과 감사함으로 주를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헌금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와 제물이 됩니다(빌4:18). 그러므로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봉사를 하거나 간에 모든 것이 다 온전한 십일조가 되시는 예수님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주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에게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 자가 되게 하옵소서!

 

 

 

 

 

말라기 3:13-18  무슨 말이 나옵니까?  2007. 12. 12.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13절을 봅니다. 오늘 말씀도 논쟁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라기에서 이런 논쟁을 많이 보아 와서 이제는 익숙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니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1:2) 하면서 따집니다. 너희가 나를 멸시하였다고 하니 역시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까?(1:5)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였다고 하니 언제 괴롭게 하였나이까?(2:17)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니 어떻게 돌아갑니까?(3:7)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가 되시기에 피조물로서는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면서 따질 일이 아닙니다. 지금 부산에서 어느 목사가 전도에 대한 책을 내었습니다. 인기가 있어서 전국에 강사로 다니면서 집회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책에 전도는 어명이라는 것입니다. 어명은 임금의 명령이기에 그 명령이 어떠하든지 심지어 사약을 내릴지라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면서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시고 또 그 말씀에 순종을 하십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에 왜 그런가 하면서 시비 걸며 따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부터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이러합니다. 그 결과가 바벨탑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가 혼잡하여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말이 통하지 아니하는 답답함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선지자는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말씀하시고 이루어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게 하시고 또한 나는 듣지 못하였다는 다른 군말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말로서 대적하였다고 외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선지자는 무엇이 여호와를 대적한 것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고 만군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부지런히 지키고 또 슬프게 행한다는 것은 금식도하고 울며 기도도 하는데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게 하여도 복은 고사하고 고생만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2:17절에서도 이런 말씀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시편 73편과 하박국서를 통하여서 이 말씀을 함께 보았습니다만 우리는 이런 생각이 없습니까? 어떻게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그래도 섬긴다고 섬겨왔는데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복을 받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더 고생만 하는가!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에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의 다스림을 믿으며 또 하나님이 결국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없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대적의 말이 15절입니다.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팽배하여 있으니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온 세상이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결코 세상이 이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지식이 없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당하고 사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또 작은 문제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세상살이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들의 억울함만 하소연하고 공의의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원망을 듣는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제가 이런 원망을 듣는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소돔과 고모라 성처럼 심판하였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조롱하였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믿어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들이 알지 못하고 저러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조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느냐며 하늘을 향하여 삿대질과 욕을 퍼붓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온 세상이 이런 원망과 아우성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원망을 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택한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의 아삽이나 하박국 선지자의 경우에도 이런 질문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는 믿음으로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접하시는지 봅니다.

 

 

 

16절입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여도 그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피차 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기념 책에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말이기에 믿음으로 살자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피차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3:12-14절입니다.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오늘 같이 불신앙이 팽배한 세상 속에서 피차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모습이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까지 피차 권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요 교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위를 하는지 주님께서 다 들으시고 기념 책에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념 책이란 기억하여 기록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말을 들으시고 기록하시는 책에 대하여 모세도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범죄 때에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신다면 자기의 이름도 책에서 빼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출32:32). 목숨을 건 중보인데 여기서 책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나 다니엘서, 시편과 누가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도 책에 대하여 나옵니다.

 

 

 

책에 기록이 된다는 것은 변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부동산 사무실에 계약하러 두 분 집사님과 갔을 때에 우리가 말한 것을 다 녹음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말 못하도록 그렇게 하고 심지어 비디오로 촬영까지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도 다른 말 하지 못하도록 녹음도 하고 녹화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를 경외한 말인지 대적한 말인지 그것을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대에서 가장 정확한 증거가 된다는 뜻으로 책에 기록이 되기에 어느 인간도 나는 그런 말한 적이 없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2-37절입니다.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서 귀신의 힘을 입어서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로서 예수님을 거역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하였지만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 하셔서 친히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령이 임한 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고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말로 대적하는 것이 이 시대에 무슨 말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하나님께서 세우셨는데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5-10절을 봅니다. “봉독”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그 짐승의 일에 참여할 수가 없기에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나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이거나 간에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피차 권면합니다. 오늘이라고 이름 하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합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라고 서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보배같이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여호와를 말로 거역하지 아니하고 경외하는 자들을 아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힘과 도움이 되지 않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살려면 오히려 고난이 가중되는 세상에서 그래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사시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살았지만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만물의 찌끼같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든지 주님은 정한 날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의인과 악인이 분별될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가 분별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며 산 사람들과 주님의 말씀을 믿고 산 사람이 분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삽니까? 그 믿는 대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서는 무슨 말이 나옵니까?

 

 

 

 

말라기 4:1-6  그 날이 이르기 전에  2007. 12. 19.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3:18절에서 의인과 악인을 분리한다고 합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며 악인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분리하는 날이 만군의 여호와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그 심판의 모습은 4:1절에서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날이라고 합니다. 풀무불이란 쇠를 벼리는 대장간의 불을 말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용광로의 불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풀무불의 온도는 적어도 1,000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런 풀무불보다 극렬하다면 그런 불에 소멸되지 아니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니엘 3장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나서 풀무불의 온도를 평소보다 7곱 배나 더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을 극렬한 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불에 집어던지는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불속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에 탄 흔적도 냄새도 없도록 지켜주셨습니다. 세 사람 외에 신들의 아들과 같은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불속에 거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극렬한 불이 악인과 의인을 정확하게 분리시켜 내는 것이 여호와의 날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합니다(신4:24). 그러므로 심판을 하시는데 어떤 자를 심판하시는가 하면 4:1절에서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이 악인 것입니다. 잠언 16:5절에서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이 다 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 즉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하신다고 하십니다(시101:5).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 중에 이 세상에서 형통한 자들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아주 강한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마른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그 이르는 날에 그 뿌리와 가지까지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2절입니다. 이처럼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심판의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는 것은 이사야 60: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하늘의 태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해란 여호와가 영영한 빛이 되시며 영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이 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메시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0:1-3절도 빛에 대하여 예언하지만 이사야 9:1-2절을 봅니다. “1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 말씀의 성취를 마태복음에서 봅니다.

 

 

 

마태복음 4:12-17절입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이처럼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이 비치면, 여기서 광선이라는 말을 날개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 치료하는 날개 아래 거하게 되면 마치 외양간의 송아지가 풀려나서 뛸 것이라고 합니다.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나와서 뛰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에 많이 보았습니다. 외양간의 송아지는 아직 코뚜레를 꿰지 않습니다. 어미 소를 따라 대문 밖에 나서기만 하면 얼마나 펄쩍 펄쩍 뛰는지 네 다리가 다 공중에 펄쩍거리면서 이리 저리 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정말 멋지게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3:6-10절입니다.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극렬한 심판의 날이 되지만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외양간의 송아지가 풀려나서 뛰는 것과 같은 기쁨의 날이기도 합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의 정한 날에 악인은 발바닥 밑의 재같이 밟힐 것이라고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장차 올 여호와의 날, 그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키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기에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모세의 율례를 기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명한 율법과 법도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법도를 기억함으로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주께로 돌이키게 함입니다. 그 율법과 법도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율법의 뜻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보내주신다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산 채로 하늘에 받아들여진 자이기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별세를 이야기할 때 나타났고 그것을 목격한 자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습니다. 방금 본 4절과 5절에서도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예언이 나온 것처럼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마태복음 17:9-13절입니다.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러므로 변화산에서가 아니라 지상에서 엘리야의 역할은 세례 요한이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였지만 성경의 증거는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7절입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천사가 제사장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들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세례 요한인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겉모습도 세례 요한과 비슷합니다. 열왕기하 1:8절에 아하시야 왕이 병들어 바알세붑에서 자기의 병이 어떻게 될지 물으려고 신하를 보내는 중에 엘리야가 왕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 왕이 그 선지자의 모양을 물어보니 털이 많은 사람이며 가죽 띠를 띠었다고 보고하는데 그 털이 많다는 것은 다른 번역에서 털옷을 입은 사람으로도 봅니다. 그러니 가죽옷을 입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막1:6).

 

 

 

이런 외모만이 아니라 사역의 배경도 엘리야의 활동 시에 악한 왕 아합과 더 악한 이세벨이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사역의 배경은 악한 왕 헤롯과 그보다 더 악한 헤로디아가 있었습니다. 이런 헤롯과 헤로디아를 공격하였다고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둘 사이에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며 주께로 돌아오라고 외친 것처럼 세례 요한도 외친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외친 그 외침의 끝에 누가 오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이 임한 것입니다. 그 날이 닥친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3:18절 말씀처럼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외치면서 그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고자 한 세례 요한조차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날이며 캄캄하고 두렵고 어두운 날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석에서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3:18-21절입니다.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6절부터 시작되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의 소식만 봅니다. 그러나 분명히 심판의 소식이 함께 있습니다. 그 심판이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정죄와 같은 말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 의로운 해가 비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기에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죄와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벌써 두렵고 무서운 그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들이 양쪽으로 나누는 내용이며 그 기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는 오래전에 시작이 되었고 아직도 미래라는 많은 시간이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바로 오늘이라고 부르는 이 시점이 여호와의 크고 두렵고 무서운 날인 것입니다. 물론 재림이 있지만 재림은 구원과 심판이 확정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히브리서 3장에서 본 말씀대로 오늘이라 부르는 이 시간에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피차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그것이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어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마음이 돌이켜지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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