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스크랩] 하박국 강해

공 상희 2009. 5. 6. 12:29

 

 

 

 

 

 

 

하박국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하박국 1:1-11  어찌하여  2005. 11. 2.

 
1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8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11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런 질문이 여러분에게는 없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데 여전히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악은 악대로 성행하며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 오히려 핍박을 받는 이런 세상이 되는가 하는 질문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신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똑 같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색깔만 약간 다를 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설교를 통하여 성공하는 비결에 대하여 들어왔고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계속되는 어려움을 당하면 아직도 내 정성이 부족한가? 왜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가?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

여러분은 어느 쪽에 의문을 가져보았습니까? 전자는 불신자의 의문이라면 후자는 신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불신자의 의문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신이 신자라고 생각한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이 나의 소원성취에만 관심이 있고 나의 행복과 불행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불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1절에서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고 합니다. 묵시라는 말은 계시라고 하여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람과 자연을 역사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성경의 계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 믿고 삽니다. 신자는 무엇을 믿고 삽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역사가 아니라 성경의 묵시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신자입니까? 불신자 입니까?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시가 주어진다는 것은 역사 세계를 공격하고 심판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묵시는 곧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향하여 경고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는 자기 백성을 구하여 냅니다. 역사세계만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묵시 세계를 말하고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 입니까?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가 부르짖는 것은 무엇 때문에 부르짖는 것입니까?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남쪽 유다의 선지자로서 유다 안에 율법이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고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는 일에 대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기도하는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분통이 터지는 것은 지금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성행하고 있는데도 왜 그들이 벌도 받지 않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일들이란 강포, 패역, 겁탈, 변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유다 땅에서 일어나는데도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지 않으시니 율법이 해이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는데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니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공의가 굽어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해이하여 지는데도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의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시편 73편에도 나옵니다. 시편 기자가 실족할 뻔하였고 미끄러질 뻔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데 오히려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고서 질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인이 얼마나 형통한지 죽는 때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더하였기에 더욱 교만하여졌고 항상 편안하고 재물이 더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고민이 없습니까?

 

 

 

그러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깨끗하게 살고자 손을 씻고 무죄하다 한 것이 헛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살고자 할수록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니 경건하게 살고자 한 것이 헛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심히 고민이 되는 중에 성전에 가서 그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졸지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응답을 받고 나서의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은 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늘과 땅에서 주 밖에 사모할 일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마무리 합니다.

 

 

 

우리가 주일 오후에 보았던 욥기에서도 이런 질문에 대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죄로 인하여 욥이 고난을 당한다고 공격하고 욥의 대답은 나는 그런 벌을 받을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핍박을 받고 악인이 형통한 이런 세상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최종적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 아래 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구약에서는 밝히 드러나지 않았기에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고민하며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을 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받으실 영광에 대하여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이 섬긴 바가 그들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시 근심하게 되어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가 부지런히 연구하고 고민하며 살핀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악인들이 형통하게 되고 율법의 정신대로 살고자 하는 자들이 핍박을 받는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고민에 대하여 하나님의 답변이 5-11절입니다. 12절부터 다시 질문이 시작되고 2장에서 답변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찬양하는 것으로 하박국이 마무리 됩니다.

 

 

 

오늘은 첫 질문과 첫 답변만을 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답변을 하시는데 5절입니다. 너희 생전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놀라운 일이란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이란 바벨론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쳐들어온다고 선지자들이 예고하여도 유다 백성들이 믿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믿지 아니하였을까요? 그들의 엉터리 같은 종교성으로 인하여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사회적인 약탈과 폭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성전에 나아갔고 절기를 지키며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들은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기고 마음대로 악을 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고서는 다시 악을 행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한 이유도 바벨론이 쳐들어오는데 항복하라고 하기에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대로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오게 되는데 그들의 힘과 무자비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말이 많이 있어서 새번역으로 본문을 보겠습니다. 6-10절입니다. “6 이제 내가 바빌로니아 사람을 일으키겠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민족이어서, 천하를 주름 잡고 돌아다니며, 남들이 사는 곳을 제 것처럼 차지할 것이다.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다.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8 그들이 부리는 말은 표범보다 날쌔고, 해거름에 나타나는 굶주린 늑대보다도 사납다. 그들의 기병은 쏜살같이 달린다. 먼 곳에서 그렇게 달려온다.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쌔게 날아온다. 9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러 오는데, 폭력을 앞세우고 와서, 포로를 모래알처럼 많이 사로잡아 갈 것이다. 10 그들은 왕들을 업신여기고, 통치자들을 비웃을 것이다. 견고한 성도 모두 우습게 여기고, 흙 언덕을 쌓아서 그 성들을 점령할 것이다.”

 

 

 

바벨론의 무섭고 잔인한 침략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폭력이 유다를 침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둥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 있는 나라가 쳐 들어와서 심판을 집행하시는 이유는 이미 바벨론의 폭력성이 유다 땅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흘러 넘쳐야 할 유다 땅에 온갖 폭력과 약탈이 자행되고 있기에 더 큰 폭력과 약탈을 일삼은 바벨론을 보내어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을 통하여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으로 인하여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만 망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를 심판한 바벨론이 교만하여지기에 바벨론마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바벨론의 신이 자기들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이들도 바람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역시 새번역으로 봅니다. “그러나 제 힘이 곧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이 죄인들도 마침내 바람처럼 사라져서 없어질 것이다." 결국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그들의 신을 자기들의 힘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힘으로 자기 신을 삼고 있는 바벨론을 사용하시지만 바벨론마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심판 후에 주님의 약속만을 믿는 남은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들은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삽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하박국서 2:4절의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으로 삽니까?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는 하소연이 있습니까? 그 어찌하여! 라는 탄식이 선지자들의 탄식과 같은 탄식입니까? 그렇다면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이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주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묵시세계를 실제로 믿고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박국 선지자처럼 묵시의 사람입니다. 동시에 주님만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 1:12-2:3  기다리라  2005. 11. 9.

 

 


1:12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공의로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율법이 시행되어야 할 유다 땅에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이런 일이 어찌하여 일어나는 것입니까?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유다 땅에서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으니 율법이 해이하게 되며 공의가 굽게 되었다고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셔도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 그 놀라운 일이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유다를 치신다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이 쳐들어오는데 그들의 두렵고 무서운 나라로서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나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사람은 말이나 병거를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니 이스라엘도 역시 이방나라처럼 세상의 힘을 그들의 신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힘센 바벨론으로 유다를 공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에 대하여 그들이 그 당시에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바벨론이 세계 무대에서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의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듯이 이제는 바벨론이 남 유다를 공격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 답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이 답변에 대하여 또다시 질문합니다. 13절에서 어떻게 악인이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러나 우리보다 더 악한 나라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런 경험들이 없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서 손가락질 받는 것은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잘못하였을 때에 나보다 의로운 자가 나를 책망하면 할말이 없겠는데 평소에 나보다 형편없이 악을 행하는 그런 자에게서 책망을 받는다면 이것이 과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처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이 1:12-2:1절까지입니다.

 

 

 

12절을 봅니다. 이제 심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심판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자신을 유다 나라로 대표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부릅니다.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셨나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비록 심판을 행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일으키신다고 하셔도 반석이신 주께서 우리를 경계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임을 선지자의 질문 속에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들어있습니다. 만세 전에 계신 분이시기에 그의 계획과 작정이 영원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심판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 취소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대를 하고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맑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우리가 악을 행하여 심판을 당하여 마땅하지만 그러나 우리보다 악한 이방민족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옳습니까?

 

 

 

14절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바다의 물고기마냥 아무나 잡아먹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주권자가 없는 곤충같이 여기십니까? 이런 질문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시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이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눌림을 당하고 억압을 받도록 그냥 두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15-17절입니다. 바벨론은 그들의 힘을 신으로 삼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의 무기와 군사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면서 그 군사력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그들의 무력적인 힘을 신으로 삼고 있는 나라인데 어떻게 그런 나라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다 나라를 공격하여 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이 없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일본인의 소설이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인데 포르투갈의 신부들이 일본에 선교를 가서 당하는 일들을 줄거리로 한 소설입니다. 신부 앞에서 신자를 고문하며 그 신음소리를 듣게 하여 신부가 배교를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그 사람을 살리려고 배교합니다.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었어도 배교하였을 것이라고 하면서 배교를 합니다. 성화를 밟고 지나갑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하여 왔다고,,, 그런 과정에서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신은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일본인들을 선교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한 투쟁이었음을 주인공의 입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매달리면 반드시 응답한다는 그런 설교를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소원과 꿈을 이야기하면서 성공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말하면서 당연히 자기가 성공해야 하고 성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손해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사람들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들도 세상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멋있게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유다가 바벨론의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였기에 세상에서 가장 힘센 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힘 있는 왕을 달라고 백성들이 요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왕이신데 그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힘이 센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힘 있는 사울 왕 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힘이 센 골리앗이 공격해 온 것입니다. 이 골리앗 앞에 벌벌 떨듯이 바벨론이 쳐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은 아직 군대갈 나이도 아닌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서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이름만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형들조차 건방지다고 나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기대를 언제나 빗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답변을 들어봅시다.

 

 

 

2:1절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질문을 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결국은 2장 전체에서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당장에 어떤 결과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몇 년만 기다리라는 식의 말씀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기다리라고만 답변을 하십니다.

 

 

 

2:2-3절입니다. 이 묵시를 판에 기록하여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왜 판에 명백하게 새겨야 합니까? 반드시 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묵시를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장에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7장에서 보면 남쪽 유다가 북 이스라엘과 아람 왕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신다는 징조를 구하라고 하지만 아하스 왕이 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적이 쳐들어 와 있는데 어떻게 구원하실 수 있겠느냐며 믿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 징조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징조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이사야 시대 이후 약 700년이 지나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성취란 인간의 불신앙을 공격하시면서 주어지는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묵시의 정한 때가 있으니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더디다고 하는 것은 우리 눈에만 더디게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은 하나도 더딘 것이 아니라 만사가 다 주님의 뜻대로 하나의 실수도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요동을 칠지라도 악인이 의인을 삼키고 부조리한 일이 매일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살아계셔서 자신의 일을 쉬지 않고 이루고 계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묵시대로 바벨론은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묵시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연결이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란 복음을 증거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기다리는 자들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이겠습니까?

 

 

 

우리도 하박국 선지자의 고민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더 힘을 가지고 큰소리치면서 사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믿는 우리에게 힘을 주세요! 이것이 기도제목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이란 세상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 알 수 있도록 십자가라는 고난으로 가려놓은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버림 받은 모습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정하여 놓은 묵시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8-13절입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더딘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도록 참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박국 2:4-1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2005. 11. 16.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6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찐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 진 자여 7 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게 할 자들이 깨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합니다. 아주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신약만의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다음에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두 번에 걸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데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두신다면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서지 않는데 왜 저의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십니까? 하나님 대답 좀 해보세요!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 응답이 왔는데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다 땅에 일어나는 불법에 대하여 갈대아 사람을 보내어 심판하신다는 응답입니다. 그러자 선지자는 어떻게 더 악한 자가 덜 악한 자를 칠 수 있느냐고 다시 질문을 합니다. 그 응답은 지난주에 본대로 하나님의 묵시는 정한 때가 있는데 그 종말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결코 거짓되지 않을 것이니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합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 기다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며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 시대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유대 나라에 율법이 해이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징계의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것과 그 징계의 몽둥이가 교만해짐으로 그 바벨론조차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4-5절입니다. 바벨론이 어떤 모습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정직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힌다고 합니다. 사망과 같다고 합니다. 음부는 무덤이니 둘 다 사망을 말합니다. 사망이 족함이 없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사람을 덮쳐옵니다. 그런데도 무덤과 사망은 족한 줄을 모르고 계속하여 사람을 삼키듯이 바벨론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면서도 족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국을 자기에게로 모으며 만민을 모으는 것입니다.

 

 

 

6-14절입니다.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고,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 지고, 여러 나라를 노략하고,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강포를 행하고,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에 자기 집을 짓기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고, 여러 민족을 멸하고, 피로 성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한 것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하여 바벨론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 멸망하는 것에 대하여 무리들이 속담으로 평론하고 조롱할 것인데 화 있을진저! 하면서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벨론이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가 된 것은 유다 나라가 이방나라 바벨론의 모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포부를 이루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이 세상의 힘을 믿고 살지만 이스라엘만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나라들처럼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도 하나님도 믿고 세상의 힘도 믿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은 바벨론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이심으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처럼 되었다는 심판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 1:10-17절입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열심히 제물을 바치고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까? 그러면 열심히 제물을 바치고 절기를 지키고 분향하는 것이 믿음생활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악행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한 것입니다.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게 된 것은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함이기에 그 나라는 긍휼과 자비가 늘 흘러넘쳐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간곳이 없고 이방나라와 똑같이 힘이 있어야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가난한 자를 학대한 것입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도록 율법으로 정하여 두었으나 그 율법이 해이하여진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 나라가 되어버리니 세상의 강한 나라가 와서 지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 1계명과 2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고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섬기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하시는데 이스라엘이 이방나라가 되었음을 바벨론을 통하여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도 심판하시고 유다를 심판한 바벨론도 심판하셔서 무엇을 드러내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알리시는 것입니다.

 

 

 

13-14절을 봅니다.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강력한 나라가 수고하고 곤비하게 만든 것들을 불태워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일에 수고하고 곤비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심판받는 자들이 왜 심판을 받는가를 드러내셔서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유다 나라가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힘을 의지할 때에 세상의 가장 힘 있는 나라가 와서 심판을 합니다. 그러나 그 힘 있는 나라조차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온 세상에 알리시는데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만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예수님도 믿고 세상도 믿습니까? 둘 다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 외에는 일절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믿고 사는지 모릅니다. 이 땅이 영원한 것처럼 믿고 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이 영원할 것처럼 믿고 삽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인간관계도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도 운전사를 믿어야 하고 건물에 들어가도 그 건물이 무너지지 아니하리라는 믿음으로 들어간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지고 성경의 믿음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세상의 것들은 다 무너집니다. 그런 믿음은 확률인 것입니다. 삼풍백화점도 무너지고 성수대교도 무너지고 버스도 사고가 나고 비행기도 열차도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예수님 외에는 믿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 이런 요구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주면 나에게 무슨 힘을 주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십자가에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상의 욕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어느 나라였습니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바벨론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 욕망이 무덤과 같아서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바벨론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바벨론이 바로 이 세상이 추구하는 모습의 결론입니다. 그런 바벨론이 심판을 당하고 유다가 심판을 당함으로 온 세상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선지자의 예언이 부분적으로 역사적인 바벨론이 멸망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드러나게 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에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바벨론은 세계 경제와 무역의 중심입니다. 온 세상이 그 바벨론을 의지하고 살다가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될 때에 그를 의지하였던 나라들과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됩니다.

 

 

 

하박국에서 화있을진저,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라고 외칩니다. 한 순간에 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신원하시는 심판을 행하셨기에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8:4절에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무너질 세상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모든 사실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교회마저도 힘을 원하는 이 세대에서 누가 힘없이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만을 믿고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로 남은 자는 주님만을 믿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박국 2:15-20  잠잠할찌니라  2005. 11. 23.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16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17 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하여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에베소서 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술에 취하지 말라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취한다는 것은 그것에 정신이 빼앗겨서 분별력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하게 정신이 없는 상태로 기도원에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분별할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15-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성령의 충만이란 때가 악한 줄을 알고 주의하여 지혜를 가지고 세월을 아끼며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세력은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계속하여 바쁜 세상에서 더 바쁘게 만들어 버립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쫓아가는 일에만 취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 시대를 분별하여 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처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취하여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까지 깨닫지를 못한 것처럼 주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에 취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만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도록 만드는 거대한 세력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력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계속하여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배후에 조종하는 것은 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가지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 조종하는 배후의 실상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을 유혹하던 마귀가 줄 수 있다고 한 것이 빵과 종교적인 기적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부하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을 이겨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마귀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에만 취하여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세상의 거짓된 영광으로 가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혹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세상을 미혹하며 믿는 자라도 삼키려고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이러한 마귀의 궤계를 알아채고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15-17절을 보시면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면서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하게 하여 그 하체를 드려내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시는 술에 취하게 되면 세상의 영광이 주어진다고 하는 잔입니다. 그러나 영광이 아니라 화가 가득한 것이며 그 하체가 드러나듯이 부끄러운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그 잔을 받아 마시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 잔을 도대체 누가 마시게 하는 것입니까?

 

 

 

바벨론입니다. 그 이웃나라들이 바벨론과 동맹을 맺어 세계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방해하는 나라가 있다면 공격하여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나라가 그 힘을 거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잔을 받아 마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취하게 만드는 바벨론인 것입니다. 만약 바벨론이 마시게 하는 잔을 받아 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공격하여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에이펙이라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이 줄줄이 참석한 것입니다. 그 회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신자유주의 물결의 흐름에 방해될 것을 제거하고 더 잘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 회의에 참여하여야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끼이지 못하면 굶어죽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북한이 굶주리는 이유는 세계의 경제 질서에 편입하여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주체사상을 가지고 자본주의 세력에 항복하지 않으니 먹고살기도 힘이 든 것입니다. 에이펙 정상회담에서 함께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해야만 밥을 먹고 살뿐 아니라 세상의 영광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세상이나 하박국 시대나 간에 세상의 힘에 굴복하여야 밥이라도 먹고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18-19절입니다. 새겨 만든 우상을 스승이라고 하면서 의지합니다. 나무와 돌에 금과 은으로 입혀놓고서 그것에 말하라고 하고 그것더러 일어나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나무와 돌에 왜 금과 은을 입혀 놓은 것입니까? 그렇게 우상에서 금과 은을 입혀서 정성을 바치면 자기들에게 더 많은 금과 은을 줄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취하여 사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취하게 만들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드는 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 심판은 세상에 취하게 한 자로 하여금 더 취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16절을 봅니다. 세상을 취하게 만드는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오른 손의 잔으로 취하게 하시면 그들이 행한 강포와 피를 흘린 것들이 그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영광이란 더러운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5:15-18절입니다.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16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하시기로 17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18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방백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치소와 저주를 당함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의 왕들과 백성들부터 마시는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후에 온 세상 나라들이 다 마시게 됩니다. “27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마시라 취하라 토하라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 이는 내가 너희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28 그들이 만일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 29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거민을 칠 것임이니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의 영광에 취하기 위하여 우상을 섬긴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상이란 자기를 위하여 섬기는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불러도 자신이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고 불렀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서 취하고 토하고 엎드려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상에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상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지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이 멸망당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 세상에 취하게 한 자들과 그 취함에 함께 동참되었던 자들을 한꺼번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8-12절입니다.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모든 나라를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나라가 멸망합니다. 음행이란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세상의 것으로 힘을 삼는 것이 음행이며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본에 대한 숭배입니다. 이미 공산주의는 망했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곳입니다. 이 자본주의의 정점이 바벨론의 영광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이 바벨론이라는 짐승에게 절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을 고발하면서 복음을 전하여야 할 교회조차 이런 경제흐름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6절에 천사가 날아가는데 온 세상에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 안에 이 세상의 심판도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경배를 돌려야 하는데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며 세상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짐승에게 절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모습들은 세상의 경제흐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주변의 수많은 구멍가게들이 문을 닫아야 되는 것처럼 오늘날 큰 교회라는 곳에서 지점을 냅니다. 그러면 주변의 개척교회들은 문을 닫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교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갖 특화 상품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교회의 부흥이나 성장이란 누가 경제력을 가지고 목 좋은 곳에 멋진 예배당을 짓는가 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자들, 아무런 힘도 기적도 아닌 버림받은 흔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것만 의지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주지 않는다고 외면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마저 십자가 앞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마저 십자가에 달려 죽을 판이니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선 그들을 다시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남겨진 자들이 예수님만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힘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찍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를 향하여 성경은 복되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3:14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믿음을 지키다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2:20절 말씀처럼 온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빈틈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잠잠히 예수님만 믿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박국 3:1-15  부흥케 하옵소서!  2005. 11. 30.

 

 


1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5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6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7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8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9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10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11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12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둘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14 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여러 곳의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하는 말씀을 강단 위나 좌우에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을 붙여놓은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부흥이라는 말의 뜻, 사람들이 열심을 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헌금도 많아지고, 예배당도 넓게 짓고 하는 식의 부흥을 생각하고 걸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라는 뜻을 제대로 보신다면 그런 곳에 붙여둘 말씀이 결코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알고서도 붙여 두셨다면 정말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부흥케 하옵소서, 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고 참으로 주의 일이 부흥케 되는 일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3:1절에 시기오놋에 맞춘 하박국의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추었다는 것은 어떤 곡조에 맞춘 것입니다. 그러니 곡조가 있는 찬양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 본문보다 안으로 한 글자씩 들여서 구분되게 기록한 것은 성경에 곡조가 있는 시편이나 기도의 경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3:2절에서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주께 대한 소문이란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주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 계시란 이미 보았던 대로 유대 땅에 일어나는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일으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는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악한 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의로운 자를 심판하는가 하는 질문을 다시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벨론도 심판하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심판을 하실 것이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심판하시는 날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계시를 받은 선지자가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 심판의 소식을 들었기에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무서운 심판의 소식이 임한다는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부흥케 되는 일을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주의 부흥이 나타나는 것이 심판이기에 3절 끝에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흥과 얼마나 다른지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부흥회를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일년에 한두 번씩 심령부흥회를 하면서 부흥 강사를 초청하여 며칠씩 집회를 합니다. 그런 부흥회를 하고 나서 어떤 집사님이 딱 한마디로 평가하는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네’ 여기서 예수 잘 믿는다는 이야기는 예배에 잘 참석하고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고 주의 종을 잘 섬기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이 없으면 예수 잘못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가장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노숙자였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집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언제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였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의 자취를 좇아 핍박받고 대부분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가 한국교회의 이런 부흥회를 보면 어떻게 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고 있는 현장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인줄 보아야만 주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부흥케 하시는 하나님이 임하시는 모습을 봅시다. 주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그 심판의 무시무시함이 어떠한지를 출애굽시의 재앙과 시내산에 하나님의 강림하시는 모습과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임하시는 모습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3-5절입니다. 하나님이 데만과 바란에서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곳은 시내산 주변에 있는 산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 그 주변이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런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하늘을 덮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한 것입니다.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그 권능이 그 손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고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옵니다. 온역이란 전염병입니다. 불덩이도 역시 불같은 질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데 이런 전염병이 나오게 하는 것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반역할 때에 쏟아진 재앙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서신즉 땅이 진동합니다. 아주 큰 트럭이 갑자기 멈추어서면 그 주변이 흔들립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멈추어서시면 땅이 진동합니다. 그가 보시기만 하여도 열국이 전율합니다. 여기서 보신다는 것은 노려보시는 것이겠지요! 노려보시기만 하여도 열국이 전율하며 흩어지고 영원한 산들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들이 엎드려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하는 산들이 하나님께서 한번 노려만 보셔도 무너져 내리는 위엄의 하나님입니다. 찬송가 79장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7-12절입니다. 사사시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리스다임의 압제에서 사사 옷니엘이 구원합니다. 미디안의 압제에서 사사 기드온이 구원합니다. 그런데 사사란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을 보이시는 도구입니다. 기드온은 얼마나 겁이 많은 사람입니까? 그렇게 약한 자를 사사로 세우셔서 지원한 군인들이 많다고 추려내어 300명만 나가게 하신 것은 그들의 수와 힘으로 이겼다고 할까봐서 일부러 적은 숫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구원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주님의 부흥을 나타내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병거를 모시고 하수와 강과 바다를 노여워하시며 화살을 발하시고 하수들을 쪼개시는 것입니다.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고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다고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멈추어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나는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해와 달이 멈추어서는 것처럼 여호와의 싸우심은 하늘과 땅이 다 진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분노입니다. 노를 발하사 땅에 둘리셨으며 열국을 밟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주의 분노와 심판을 누가 알겠습니까? 피조물이 자신의 신분을 모르고 스스로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하여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매일 분노하시기에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를 위하여 그 칼을 가시며 죽일 기계를 예비하셨다고 시편 7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90:9-13절을 봅니다.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분노를 아는 자는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그러므로 주의 소문을 들은 자는, 주의 계시를 받은 자는 이런 두려운 주님 앞에서 구할 것이라고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회하면서 세상의 복을 받는 비결을 가르쳐준다고 하고 그것에 목을 매면서 복을 달라고 간구한다면 이런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진노꺼리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13-15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구원을 받는 자들은 그 심판 속에서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백성이며 주의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몰려와서 나를 흩으려 하며 가난한 자 삼키기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물의 파도를 밟으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백성,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의 백성이 구원받으려면 기름 부음 받은 한 사람을 구원하면 됩니다. 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 또는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바벨론에서 구원받아 나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왕이 기름 부음을 받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 왕 고레스를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이사야 4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의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하여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베드로후서 3:10-13절입니다.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것이 구약의 하박국이 부흥케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 내용입니다.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나타내어 달라고 간구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21절입니다.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간구를 하는 것이 주의 부흥을 기다리는 자의 모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하박국 3:16-19  없을지라도  2005. 12. 7.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사람들이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유가 많아지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소유가 많음은 축복이고 소유가 적으면 저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개인이나 성공한 교회의 평가도 소유물의 양으로 측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런 것이 성공의 평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언제나 소수일 뿐이며 그런 소리는 무능하거나 축복을 받지 못하여 소유물이 적기에 변명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무소유의 자세로 소유를 줄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새로운 의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물질을 많이 축적하였느냐? 우리는 구제와 선교를 많이 하였다는 것으로 자기 소유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민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고민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유다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핍박을 받고 가난하게 사는데 악인은 고난도 없고 부자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고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일으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또다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악인이 더 의로운 자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악인이 악한 짓을 하는데도 계속하여 소득이 풍부하여지는데 이것이 옳습니까? 하면서 묻습니다.

 

 

 

하박국 1:15-17절입니다. “15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악인이 우상숭배 하는데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이냐고 묻습니다. 우리의 상식도 그렇지 않습니까? 악인은 망해야 하고 의인이 소득이 풍성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박국 선지자가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 취하여 사는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으로 마시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은 진노의 잔입니다. 이 잔을 마시게 하시면 그들의 영광이 더러운 욕이 되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라고 하면서 좋아한 것들, 복이라고 하면서 소유를 늘린 것들이 오히려 심판의 재료가 되는 것임을 하박국 2장과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들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일을 수년 내에 이루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 일을 부흥이라고 하였습니다만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에 부흥이지만 그 안에는 심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부흥이기에 그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 부흥의 소식이 얼마나 두려운 소식인지 하박국 3:16절을 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이런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를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목소리를 한번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이 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소리는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온다는 환난 날의 소식을 인하여 내 뼈에 섞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선지자는 갑자기 어떤 질문이 사라져버린 것입니까? 어떻게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형통하며 소유가 더 풍성하여 집니까? 하는 질문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런 의문은 심판을 모를 때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개그맨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 지구적인 재난이 오면 백억을 보상하는 보험 상품을 개발하였다는 것입니다. ‘딥 임팩트’와 같은 재앙일 때 보상한다는 것입니다. 딥 임펙트란 영화를 보시면 유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영화입니다. 지구가 멸망하는 그 순간에 백억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19절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직장이 있어도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때론 직장도 없고, 은행 통장에는 잔고가 없고, 돈 될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 욕이나 하고 죽으라고 하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무엇이 기쁘고 즐거운 것인지를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소유가 많은 것이 복이 아니고 소유가 적다고 저주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유가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선지자가 여러분의 남편이라면 함께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목사라면 좋아하시겠습니까?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아서 소유의 많음이 복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이 복임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방패와 상급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그대로 성취되는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2:13-21절입니다.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정당한 재산의 분배를 요청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냉정하게 거절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요청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그런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가지고 개인의 부유함을 정죄하고 교회가 부유하게 되어야 한다고 하면 그것 역시 정죄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어떤 단체이던 그 소유의 넉넉함이 생명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더 쉽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서 소득이 많고 소유가 늘어나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도 왜 오늘날 교회라는 곳의 분위기가 말씀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구약에서 심판의 소식을 한 곳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에스겔 7장에서 몇 절만 보겠습니다. “10 ○볼찌어다 그 날이로다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 피며 교만이 싹났도다 11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 12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13 판 자가 살아 있다 할찌라도 다시 돌아가서 그 판 것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묵시로 그 모든 무리를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도 돌아갈 자가 없겠고 악한 생활로 스스로 강하게 할 자도 없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심판 때에 사고파는 일들이 소용이 없습니다. 사고파는 일들은 단지 먹고사는 것만이 아니라 소유를 축적하는 과정입니다. 사고팔아서 축적된 금과 은이 심판 앞에서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19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금과 은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예물 같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오예물이란 오물입니다. 쓰레기처리 할 오물을 끌어안고 살았다는 것이 주님의 심판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심판의 말씀이 성경에서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런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소유물이 많아지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러니 괴로운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의 현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1-4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엄중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듣고 즐거워하십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듣고서 비록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고 한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또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는가를 돌아보면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소유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썩어질 것들, 구원하지 못할 것들을 사랑한 것이 죄임을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부터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사시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돈이 없어서 난방을 하지 못하는데도 구원의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가 아픈데도 치과에 못 가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심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린 양의 진노에서 무엇이 우리를 가리겠습니까? 금과 은이? 산과 바위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만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 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용서를 받았다면, 비록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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