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오바댜 강해
오바댜 강해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오바댜 1:1-9 오바댜의 묵시 2003. 10. 22.
1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찌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3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5 혹시 도적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찌라도 그 마음에 만족하게 취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찌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6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7 너와 약조한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이고 이기며 네 식물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 함정을 베푸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9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인하여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1:1절에서 ‘오바댜의 묵시라’라고 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묵시라는 말은 우리가 인식하고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세계를 ‘묵시의 세계’라고 합니다. 땅의 일을 역사라고 하면 하늘의 일을 묵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시를 받은 선지자가 장차 있게 될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를 ‘계시’라는 말과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묵시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계시가 모든 것을 진행시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땅의 일로 하늘의 뜻을 움직이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묵시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이 땅의 일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모였습니다만 무엇을 위하여 모였습니까?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한번 물어보시고 오늘 말씀을 대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문제나, 집안의 문제나, 나라의 문제들이 중요 관심사라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 무엇보다 주님의 묵시에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27절의 말씀처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처럼 역사 속에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 묵시의 세계인 것입니다.
오늘은 오바댜서의 전체적인 내용과 그 상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바댜 선지자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별로 없습니다. 선지서의 내용으로 보아 에돔이 예루살렘을 괴롭히는 배경하에서 주어진 말씀으로 봅니다. 그 내용으로 1:1-9절에서 에돔이 망한다는 내용입니다. 10-14절에서는 에돔이 망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5-16절은 에돔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심판을 받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온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은 자의 구원과 영원한 메시아 왕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본문이지만 이 세상의 심판과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묵시란 이 세상의 심판과 구원이 달려있는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겠습니까?
우선 에서와 야곱의 갈등과 반목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하여 20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려면 자녀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쑥쑥 잘 낳아야 할 텐데 아브라함도, 이삭도 자녀 생산이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한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싸우던 에서와 야곱은 태어나서도 싸우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면서 에서가 먼저 나옵니다. 온 몸이 붉다고 해서 에서라고 하고 이 에서의 후손이 이룬 나라가 에돔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해서 야곱입니다. 둘 다 똑같이 욕심이 많은 자식들입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이삭과 리브가도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의 취향대로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고 리브가는 야곱에게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하고 야곱은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가 없을 정도로 자기들 욕심대로 산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묵시의 말씀이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야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야곱에게 주어졌기에 야곱은 세상의 힘과 권세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야곱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다 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들의 갈등, 자식들의 싸움, 자식이 계모를 범함, 천사와 씨름하다 불구자가 됨,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는 자리까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게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어떻습니까? 이삭의 축복의 내용으로 보자면 에서는 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힘이 있습니다. 부가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 이미 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선 이삭의 축복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27:27-29절입니다. “27 나의 아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주께 복 받은 밭의 냄새로구나 28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슬을 내려 주시고, 땅을 기름지게 하시고, 곡식과 새 포도주가 너에게 넉넉하게 하실 것이다 29 여러 민족이 너를 섬기고, 백성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는 너의 친척들을 다스리고, 너의 어머니의 자손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마다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마다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축복을 에서인줄 알고 했지만 야곱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서 이삭이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욕심과 상관없이, 그 욕심-자기 취향 따라 장남인 에서를 편드는-을 고발하면서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그렇게 축복하여 달라고 하여도 축복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삭이 에서에게 말한 내용이 창세기 27:39-40절인데, 새번역으로 봅니다. “39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40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엄청난 대비가 됩니다. 그러면 누가 축복을 받고 형통하겠습니까? 야곱이겠지요? 그러나 야곱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평생 동안 남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 남았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땅도 기름지지 아니하는 곳에서 칼이나 믿고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얼마나 힘 있는 나라가 되었는지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에 이미 왕을 세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계속하여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출애굽시에도 선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나서도 이스라엘이 공격을 받으면 그것을 좋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자기들의 잇속을 채웠습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아모스서에서도 에돔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아모스 1:11절에서 칼로 그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노가 항상 맹렬하여 분을 끝없이 품었다고 합니다. 모압과 암몬도 이스라엘을 괴롭혔지만 에돔도 계속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사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바댜 1:10-14절에서 에돔의 멸망 이유가 나오는 것도 유다 자손의 패망을 기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교만이 멸망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고,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면서 야곱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야곱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아무리 땅에서 힘이 있고, 강하고 든든하여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세상의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중요한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에돔 족속이 사는 곳은 천연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의 토지는 비옥하였고, 무역으로 보물이 쌓여있었고, 이들의 지혜도 소문이 나 있을 정도입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는 정도로 세상의 여러 가지 조건을 다 갖추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살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가 늘 바라는 바가 무엇입니까? 돈 걱정 없이, 나라 걱정 없이 든든하고 안전하게 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없습니까? 그런 든든함이 에돔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중심의 교만이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필요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든든한 국가, 든든한 사회, 가정, 하나 더 보태어 든든한 교회까지 갖추어진다면 누가 감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고방식을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을 오바댜 선지자가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묵시가 임한 것입니다. 묵시란 세상의 역사가 예측할 수 없고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뱌다 시대의 현실은 야곱이 심히 미약하여 있습니다. 나라가 힘이 없으니 외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틈을 타서 에돔은 더욱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 세계에서는 에돔이 멸망한 것입니다. 에돔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절에서 열국 중에서 에돔을 치기 위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들은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에돔을 치러 일어난다고 그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에돔을 치러 일어나는 역사 세계에서의 일은 묵시의 세계에서 결정된 일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에돔이 얼마나 철저하게 심판을 받는가 하면 4-9절입니다.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사이게 깃들일지라도 끌어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도적이나 강도가 와서 물건을 훔쳐가도 그들이 만족할 만큼 취하면 어느 정도는 남지만 에돔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돔과 약조한 자들이 배신하고 화목하던 자들이 속이면서 에돔을 멸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와 지혜와 용사들이 다 멸절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역사 세계입니까? 선지자들이 증거한 묵시세계입니까? 오바댜의 묵시를 통하여 에돔의 멸망을 예고하였는데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더 넓게 확대하면 온 세상이 에돔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들의 소유를 늘리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것으로 든든하게 여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물어도 다시세우겠다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말라기 1:2-5절에서 에서를 황무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에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헐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세운 성으로 든든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에돔의 정신이며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고집을 부리지만 마침내 자기의 손을 털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묵시를 믿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에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묵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오바댜 1:10-14 에돔의 멸망 이유 2003. 10. 29.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13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14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오바댜 선지자가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서 증거한 내용은 에돔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에돔이 망하는 것은 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교만 자체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서 나오는 보편적인 죄이지만, 에돔의 구체적인 교만이 무엇인가 하니 야곱에 대한 교만이었습니다. 야곱이 망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야곱이 망하기를 바라며 그 망하는 것에 일조를 하였다는 것이 에돔이 망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5절에 보시면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을 한번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사이가 좋은 관계라면 상대방이 즐거운 일이 생기면 함께 즐거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는 일이 생기면 함께 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가 평소에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고 서로 원수 같은 사이라면 정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든지 흠집을 내려고 흉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는 일들이 일어나면 동정하는 척하면서 더 쓰라린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의 죄된 모습을 성경에서 다 보게 됩니다.
에서와 야곱은 지난주에 보았듯이 그들은 쌍둥이 형제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국가의 이름이 됩니다. 야곱의 이러한 선택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계시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에서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이삭에게 축복하여 주기를 강청하였으나 축복은커녕 척박한 땅에서 살고 칼을 믿고 살게 되리라는 말을 듣고서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형성된 민족이 에돔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돔이 형제이기에 선대하라고 말씀하셨고 또 신명기에서는 3대가 지나면 에돔 족속도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교만하게 행하였습니다. 야곱이 잘되는 것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방적인 선택으로 복이 야곱에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에돔은 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부자가 되고 튼튼한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이것으로 더욱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만은 하나님께서 택한 야곱을 향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에 이르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10절에서 에돔이 영원히 멸절되는 이유가 야곱에게 행한 포학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해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영원히 멸절시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하는 항의가 나올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어디 완벽하게 바르게 살았습니까? 그들도 역시 범죄하고 욕심을 부리며 살았는데 그들에게 포학을 행하였다고 영원한 멸절이란 너무 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가 아닌 왜 하필 야곱인가 하는 것입니다.
야곱 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선택을 먼저 생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도 하나님의 선택을 계시하지만 야곱은 쌍둥이이기에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미워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를 확정시켜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태어나서 미움 받을 행동을 하고, 사랑받을 행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에 택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언제 하나님의 사랑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은혜로 선택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심을 보이시는 것이 야곱인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 대하여 미워하고 이런 선택방식을 미워하는 것이 온 세상의 모습입니다. 다른 열방들이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쌍둥이 형제인 에서가 미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미워한다고 에돔을 영원히 멸절시키고 온 세상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집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영원한 지옥 형벌에 넣어두는 하나님이 믿어지십니까? 믿어진다면 그것이 믿어지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상한 하나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여 모두가 심판과 저주 아래 있다고 보신다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하여 항의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가 그런 사실을 모르도록 가리고 있으니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항의를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자신의 언약을 담아낼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받은 자들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바로 왕을 비교하여 보아도, 이삭과 아비멜렉 왕을 비교하여 보아도, 모세와 바로 왕을 비교하여 보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갔을 때에도 바로 왕은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겠다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법은 인간의 그 어떠한 선행이나 옳고 그름을 인정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잘못하였는데도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방의 나라들을 가시와 몽둥이로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교만하여지면 어김없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남기시는 것은 자신의 언약의 말씀만 중요하게 남기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도전하고 싫어하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또한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편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미워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바댜 당시에 에돔에 비하여 유다는 너무나 약한 상태입니다. 에돔은 안전한 요새에 도시를 마련하고 힘과 지혜와 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주 외국의 여러 나라들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며 쇠약해 진 상태입니다. 이런 유다에 대하여 에돔은 동정은 커녕 눈에 가시 같은 자들로 여겼기에 망하는 것을 아주 즐거워한 것입니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것이 아니라 우는 자들에게 더욱 상처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방인과 외국인들이 예루살렘의 재물을 늑탈하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에돔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열강들이 아시아를 서로 삼키려는 의도를 그려놓은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피자를 그려서 조각을 내어놓고 포크와 나이프로 서로 먹으려는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마치 유다를 집어 삼키려고 달려드는 중에 에돔도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참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덤벼드는 에돔이 차라리 이방인이었으면 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쌍둥이 형제입니다.
12절입니다.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하고 고난의 날에 입을 크게 벌린 것입니다. 형제에 대하여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눈에 가시 같은 자들이 망하니 속이 시원하다고 기뻐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을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내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다 백성, 열방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고 약하여질 대로 약하여진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이 비록 범죄하여 징계를 받고 있어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과 고난을 당할 때 함께 성문에 들어가지 말고, 환난과 고난을 방관하지 말고, 그 재물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는데 오히려 성문에 들어가 재물을 탈취하였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으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하는 자들을 막아서서 다른 나라에 팔아먹은 것입니다. 형제의 환난에 위로와 동정은 되지 못할지라도 가만있었으면 나을 텐데 오히려 적보다 더 악랄하게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에돔의 멸망 이유입니다. 에돔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이 방법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15-16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하실 것입니다. 그 원리는 에돔이 야곱에 대하여 행한 것을 보응하시는 방식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온 세상 만국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택하신 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였는가를 심판의 기준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시편 41편입니다. “봉독”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택하신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다윗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자들이 다윗이 범죄함으로 약하여 있을 때에 다윗을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의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반역을 꾀하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다윗이 신뢰하여 함께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들이며, 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발꿈치를 들은 것입니다. 반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가장 완전하고 온전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는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예수님에 대하여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온 열방과 관원들이 함께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형제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소리 높여 외치기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8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시편 41편을 인용한 말씀이신데 가룟 유다를 지칭하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에돔의 멸망 이유는 하나님의 택하신 야곱을 미워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멸망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에너지가 부족하며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무기로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문제로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를 싫어하고 배척한 것이 세상의 멸망 이유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까? 보잘 것 없는 이웃으로 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누가 핍박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목사가, 교인이 이런 사람을 핍박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고전16:22). 그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살후1:3-12). 우리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그 아들을 밟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한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히10:29). 이것이 에돔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멸망의 이유입니다.
오바댜 1:15-16 만국을 벌할 날 2003. 11. 5.
15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16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10-14절에서 에돔의 멸망 이유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이었습니다. 그 교만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약하여진 유다가 이방의 침략을 받을 때에 함께 동참한 것에 대하여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멸망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기를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언약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즉 언약을 받은 개인이나 단체에 대하여 대적하는 것이 멸망의 이유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비단 에돔만이 아니라 온 세상 만국을 심판할 근거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는 에돔이 멸망하는 이유가 하나의 모델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멸망이 온 세상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여호와의 날은 자기 민족은 구원을 받고 이방 민족은 심판을 받는 날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이 기다린 구원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인 심판은 이스라엘에게 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만국에 대한 심판이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돔 당시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 이 종말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베드로전서 4:16-19절입니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이런 순서로 일하시기에 세상에서 성도는 믿음의 시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유다가 이방의 여러 나라에 시달림을 당하고 있을 때에 형제라는 에돔의 시기와 질투로 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 중에 오바댜 선지자가 에돔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돔이 곧 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중에 나바르 왕국이 세워지면서 에돔이 세일 땅에서 쫓겨나서 남방의 네게브 지역을 차지합니다. 이때 에돔 사람을 이두매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유다 마카비 왕조가 들어섰을 때 강제로 할례를 받고 유다에 편입됨으로 에돔은 영원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헤롯왕은 바로 그렇게 해서 유다에 편입된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그 조상을 따지자면 에돔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시에 유아살해를 명한 자입니다. 에돔이 이렇게 오래간 것입니다.
오바댜 당시에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였는데 왜 빨리 망하지 아니한 것입니까? 멸망하리라는 에돔은 더 기세가 등등하게 올라가고 구원받으리라는 유다는 더욱 망하는 모습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나오지는 않습니까? 섭섭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까운 원수가 있는 것은 나를 낮추기 위하여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 가시와 사람 채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복수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원수가 언제나 망하는가 하는 생각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더욱 더 든든하게 평안하게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이런 모습이 역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돔과 유다의 관계가 지금 종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도 바르게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힘들고 어렵게 사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입니다. 적당하게 세상의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망하지도 않고 더 잘 사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실족할 뻔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언젠가 망하겠지 하고 지켜보아도 죽는 때도 고통이 없고 타인과 같은 고난과 재앙도 없는 것입니다.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더 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만이 저희 목걸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고 거만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살고자 마음을 정하게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헛되지 아니한가 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지 실족할 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히 곤란하였는데 성전에 가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은 졸지에 망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망하는 것이 우리 눈앞에서 바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실족할 만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을 알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주님만을 사모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며 영원한 분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다 망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라고 합니다.
15절 상반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에 여호와의 날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에 먼저 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결국 모든 열국을 심판하는 전조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가 지금 열국에 의하여 점령을 당하고 그 틈에 에돔도 함께 성산에 와서 마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가 망하는 것을 좋아할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온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전조가 되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입니다.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희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에돔이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본 내용입니다. 유다가 망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함께 망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에돔의 멸망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행한 대로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대적한 것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에돔이 유다에 와서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여호와의 성산에 와서 유다가 망하는 것을 함께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도 만국인이 마셔버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다가 망하는 일에 와서 함께 마셨기에 너희도 마심을 당하여 원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고 에돔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에돔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 에돔만이 아니라 에돔 같은 온 세상이 다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하실 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유다와 에돔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언약을 받은 유다의 남은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구약의 언약들이 세례 요한의 손가락으로 모아져서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을 지목한 것입니다.
포도원의 악한 품꾼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결국 아들까지 죽였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이 땅은 심판을 받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유다가 망한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이제 온 세상이 다 망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해당하신 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진멸을 받아야 마땅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온 세상의 심판의 기준이 명확하여 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와 십자가의 죽음을 유다가 멸망할 때 기뻐한 에돔처럼 대하는가 하는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3, 29-31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상 멸망의 징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AD 70년에 망하고서 지금 약 1,933년이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고 나면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땅에서는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 망하지 않았습니까?
오바댜 선지자가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여도 오랜 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 성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가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 기간은 종말입니다.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습니다. 역사의 시간이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묵시의 세계가 역사의 세계를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이 심판의 날이요 종말의 날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역사의 발전이라든가 개인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 안에 들어 있기에 진노의 대상인가, 긍휼의 대상인가 하는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 안이냐 예수님 밖이냐, 십자가 안이냐 십자가 밖이냐는 구분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십자가 안을 보면 죽은 자들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15절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15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표준 새번역)
오늘 세상도 동일한 원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에서 망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여도 별 볼일 없구먼! 하면서 멸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심판하실 그 날이 이르게 되면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행한 대로라는 것은 에돔이 유다를 어떻게 대하였는가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19-29절입니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지금이 심판의 때입니다. 모든 심판의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믿고 살아난 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삽니다. 이들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죽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를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는 자들은 만국을 벌하시는 여호와의 날에 영원한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날에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오바댜 1:17-21 피할 자 2003. 11. 12.
17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18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19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20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21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유다를 괴롭힌 에돔에 대한 심판은 결국 온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무엇이길래 그들 앞에서 교만하였다고 에돔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때에 그 기준은 모든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시고(마28:18), 심판하는 권세 역시 아들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요5:27).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는 자, 그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가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를 괴롭힌 에돔의 멸망 예언을 통하여 에돔의 멸망만이 아니라 만국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 가운데서 피할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 가운데 피할 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노아 때 홍수 심판도 홍수로 심판 가운데서 노아 가족의 구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도 불로 성읍이 멸망하는 가운데서 롯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할 때도 진멸 받는 중에 기생 라합 같은 구원받는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심판이 전제되어 있는 곳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심판이 전제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의 구원이란, 현재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더 나은 상태를 말하게 됩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발전시키는 방향,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좀더 확대하고 영속화 시키는 방향으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애굽 시절보다 왜 더 고달픈 삶인가 하는 것이 원망의 원인이었습니다. 나를 위한 구원으로 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차원에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편한 것만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의 뜻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재료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존의 것들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마치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이것이 선지자의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오바댜 선지자도 에돔의 멸망을 통하여 온 세상의 심판을 말하고 새롭게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이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온 세상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이곳에서 구원이 나올 것입니다. 비록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의 비웃음을 받을지라도 이곳에서만 피할 자가 나올 것입니다. 이 산이 거룩할 것이고 야곱 족속이 기업을 얻을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야곱 족속은 불이 되고,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되고,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된다고 합니다. 야곱과 요셉이 에서를 마른 풀처럼 사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에서 족속에서 남을 자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에서의 멸망은 나라의 멸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돔 족속에서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예언하였습니다(암9:12).
19-20절입니다. 야곱 족속과 요셉 족속이 어떻게 에돔을 물리치고 땅을 차지할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8-19절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동서남북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에서 족속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지경의 다른 민족도 함께 몰아 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고(남),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고(서),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고(북),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고(동), 이스라엘에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은 북쪽지역을 더 확대하여 얻고,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은 남방의 성읍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동서남북의 가장 확대된 지역을 다스리던 때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이 다윗시대 때에 성취가 됩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지고 약화되면서 북쪽은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쪽은 바벨론에 멸망을 합니다. 나중에 남쪽 유다는 70년 만에 포로에서 돌아오지만 지금 오바댜 선지자가 예언한 야곱의 족속과 요셉의 족속이 하나가 되어 에돔을 멸망시키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단절과 도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의 도약입니다.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지역적인 시온산이 아니라 영적인 시온산입니다. 그것에 예루살렘에서 나온 복된 소식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하는 복음의 내용이 새로운 시온산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이 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는 자들이 시온산에서 피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문자적인 성취로만 보고 있는 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후원하는 미국도 자신들이 신의 나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영토를 차지하고 특정 인물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피할 자들인 것입니다.
창세기 28:14절입니다.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에서를 피하여 도망가는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민수기 4:17-19절입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8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들어가는 중에 모압의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저주 대신 하나님의 예언이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서 한 홀이 나와서 모압을 물리치고 에돔을 그들의 산업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8:13-14절입니다. “13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14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가 되는 것이 다윗 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약하여지자 여호람 왕 때에 에돔이 유다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기들의 왕을 세우게 됩니다(왕하 8:20). 그러므로 에돔의 완전한 멸망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며 에돔이 멸망하리라는 말씀은 어떻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31-33절입니다.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다윗의 왕위가 주어지고 야곱의 집에서 영원히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가 무궁한 나라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과정에서 피할 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위를 가지시고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분입니다. 이 분이 다스리는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아니하는 나라이며 그 왕위가 바뀌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21절을 봅니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여러 구원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사사들을 세우시고, 왕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에서를 심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왕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돔과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의 택한 나라를 세우실 영원한 왕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언약한 왕이 오셨습니다. 인자됨으로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분이 다스리는 나라는 망하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심판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시온산에 피할 자란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입니다.
성령이 임하므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구원자가 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온 세상에 증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소식과 동시에 구원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4-6절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바울의 무기는 십자가입니다. 복음입니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벌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8-9절입니다.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을 모르고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에돔의 멸망과 심판 가운데서 오직 시온산에서는 피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피할 자란 야곱의 남은 자만이 아니라 에돔과 이방나라 중에서도 택함을 입은 자들이 나올 것입니다. 이들이 심판에서 피할 자들이며 이들은 어린 양의 피로 씻고 나오는 자들입니다. 온 세상을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오직 피할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