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말씀강론) 사도행전 2
사도행전 2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강론 목차
23.사도행전 15:1-21 주 예수의 은혜
24.사도행전 15:36-41 다툼
25.사도행전 16:1-10 마게도냐로
26.사도행전 16:19-34 예수 믿습니까
27.사도행전 17:1-15 성경
28.사도행전 17:16-34 십자가와 철학
29.사도행전 18:1-11 하나님의 백성
30.사도행전 19:1-7 성령을 받았느냐
31.사도행전 19:8-20 하나님 나라
32.사도행전 19:23-32 우상
33.사도행전 20:23-32 말씀의 위로
34.사도행전 20:17-35 교회의 사명
35.사도행전 21:7-14 주님의 뜻
36.사도행전 22:1-21 바울의 바울 됨
37.사도행전 23:1-11 곁에 서신 주님
38.사도행전 24:1-27 두 권세
39.사도행전 25:1-12 삶과 죽음
40.사도행전 26:16-29 부활 신앙
41.사도행전 27:9-26 구원
42.사도행전 28:1-10 따르는 표적
43.사도행전 28:16-23 이스라엘의 소망
44.사도행전 28:23-28 복음의 비밀성
45.사도행전 28:30-31 사도행전의 끝
책 머리에
성경 본문을 실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본 강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강론은 말씀을 이해하는 방편이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본문의 말씀을 헤아리면서 강론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스물 세 번째 강론
주 예수의 은혜
사도행전 15:1-21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2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16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한 신앙적 입장은 한국 교회에 있어서 대단히 심각합니다. 심각하다는 것은 그 문제로 인한 논란이 많기 때문에 연구가 활발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혀 연구가 없고 정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도무지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정리하려고 생각들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구약도 신약도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두 가지 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신학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일반 교인들은 교회 봉사나 잘하고 목사에게 충성하면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 그런 현상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은 알고 신약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아는데 십자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율법도 지키면서 예수도 믿으려고 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 가지를 아는 것조차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아는 것으로 인해 엄청난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구약으로 신약을 이기려고 합니다. 구약에서 성전과 관계된 제사와 절기, 갖가지 제도, 율례 등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없애려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행했던 온갖 율법들을 가지고 성령을 무시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교인들은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오해합니다. 만약 율법이 완성되었다고 한다면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서는 찢어 버려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 특히 레위기는 아주 매력이 없는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한국 교회가 구약의 모든 제사 의식과 절기들에 대한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은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온 이론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은 세 가지 법으로 나누어진다는 이론입니다. 소위 말해서 의식법, 사회법, 도덕법이 그것입니다. 의식법이란 제사와 관계된 법이고, 사회법이란 이스라엘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율례들을 말하고, 도덕법이란 십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율법을 세 가지로 자기들 임의대로 나누어 놓고서는 의식법과 사회법은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이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도덕법인 십계명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유효하고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계명만큼은 모든 교회가 생명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이 법으로 꽉잡아 매고 있습니다. 여기에 현대 교회의 법을 첨가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나 있었던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생활수칙들을 만들어서 교회에 붙여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주일 성수, 십일조, 또는 성경을 매일 3장씩 주일에는 5장을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년에 한 사람 이상씩 전도해야 한다든지 또는 교회의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30분 이상씩 그 기도시간에 맞추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공공연히 주보 전면에 실어서 그렇게 지키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교회의 율법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인들은 그러한 율법에 길들여져 있고 그러한 율법을 수행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지키지 못하는 교인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에는 교회에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수칙들을 지켜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방종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율법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십자가로 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들의 상상에서 나온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도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이 가르치기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1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믿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된 표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안디옥 교회는 근본적으로 유대로부터 온 사람에 의해 제기된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알아봄으로 결론을 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왜 발생되어야 했습니까? 한마디로 이방인들이 믿음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였습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그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행 14:27).
뿐만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도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역사하신 일들을 증거하였습니다(3절). 예루살렘에서도 이방인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말했습니다(12절). 본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성령이 예루살렘에서 임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든 정황들이 기독교가 유대인의 전유물같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온 자가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말에 혼란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루살렘만 아니라 사마리아를 비롯해서 이방인의 땅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은 이 문제 때문에 회의를 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님의 뜻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8-10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성령을 받았고 같은 믿음으로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방인에게 주어진 은혜가 다르고 유대인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다를 수 없습니다. 은혜란, 내가 잘났는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은 내 힘과 내 공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이 모양 이 꼴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못났는가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완성되었습니다. 갖가지 제도와 절기를 통해 언약의 뜻을 설명했던 시대는 구약입니다. 구약 시대에 주셨던 모든 것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완성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셨던 기대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하는 것을 보려고 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주심으로 그 율법이 의미하는 바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우리는 율법을 행하면 행할수록 내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자인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철저히 우리가 죄인임을 지적하고 폭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과 맞붙어서 한번 싸워보자는 결투신청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으로 오늘 우리 역시 할 수 없음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방인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에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의 실패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행동, 자기의 일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증인되는 것으로 만족을 느끼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그분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에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19-21절).
이것은 새로운 율법이 아닙니다. 구약은 완성되었지만 여기 새로운 율법을 주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초대 교회 상황에서 안디옥 교회에 이렇게 전하자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율법을 가지고 막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 이런 것들로 절제할 수 있다면 절제하자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방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 나가시는 복음사역 때문에 이방인들 앞에서 절제할 수 있으면 하자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 곳도 있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8, 19).
주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 매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의 종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증인되는 이 일 때문에 사는 것에 의미가 있게 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령에 의해 장악된 자는 율법에 관심을 가지고 살지 않고 예수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1997.12.7).
사도행전 스물 네 번째 강론
다툼
사도행전 15:36-41
“36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율법에 관한 문제를 정리한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유대에서 온 자가 안디옥 교회에서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것에 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 여러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여 심사숙고했습니다.
문제에 대한 결론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 확고한 진리였습니다(행 15:11).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차원에서 우상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스스로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절제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정해진 기본적인 새로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율법적인 요소를 가미해서는 안됩니다. 율법이라는 것도 우리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언해서 말하자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자에게 어떤 율법을 들이대고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이 염려하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에 대해 어떻게 통제가 가능한가? 방종으로 가기 쉬운데 자기 마음대로 살면 그게 어디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방종으로 내몰게 될까봐 아직도 구약의 율법이 살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방종으로 나가게 될까봐 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쳐야 하고 그 율법에 묶어 놓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인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으로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발상입니다.
교회의 통제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결코 방종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사는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방종이라는 것도 우리의 시각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어긋나 있다는 시각 아닙니까? 그러므로 방종이라는 것이 주님의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율법이란 우리의 죄를 보여주고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상과 어떻게 구별되고 다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흔히 세상과 달라야 하고 구별된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율법을 지키고 안지키고 하는 것에서 차이가 나고 구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건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든지 아니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를 안 믿는 자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보면 마가 요한의 일로 인해서 심히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다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도여행을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전에 복음을 전했던 각 성에 형제들이 어떠한가 하여 다시 가보자고 했습니다. 여기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사도행전 13:5에 보면, 1차 전도여행 때에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3:13에 의하면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왜 돌아갔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3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마 전도여행이 힘들어서 다시 돌아갔기 때문에 2차 전도여행에서 따라 나서는 마가 요한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다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마가 요한과 동행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마가 요한과는 동행하지 않기 위해서 바나바와 갈라서서 따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이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조금 다투어서 유감이지만 결과는 하나로 갈 전도여행이 두 개로 나누어져 갔기 때문에 더 많이 선교할 수 있어서 유익이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로마서 8:28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물량적으로 많이 전도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교회가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매일 싸워야 합니다.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바울 사도가 말한 다른 한 본문을 봄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1:12-18입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 본문을 볼 때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서로 다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복음이 가리워진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그것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조차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거나 차단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이 어떤 짓을 하든지 그 인간의 행위가 주님의 복음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복음 그것은 주께서 십자가로 친히 홀로 이루신 기쁜 소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홀로 이루셨기 때문에 홀로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주님의 복음에 도움되는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도록 자기 백성들을 사용하시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증인입니다. 그 증인의 역할도 우리 자의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히 주장하실 때에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어떤 방도로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것으로 인해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게 고난이 오는가 오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내가 신경쓸 문제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본문에 좀 더 나가보면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19-21)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죽고 살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고 있다면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은혜입니다. 또한 죽는다면 죽음이라는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 안에 사는 분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 때문에 바울 자신은 부름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 떄문에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고 그 복음이 전해지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다른 기쁨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판단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주님이 일하십니다.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우리는 따라갈 뿐입니다.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율법이나 아니면 나 개인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 자체를 판단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얽매여서도 안되고 또한 율법에 얽매일 수 없는 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다시 확인된 분명한 진리,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얻는다는 이 분명한 사실에 어떤 율법도 추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다는 것은 서로의 성격 차이일 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격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사람의 성격이 바뀌어집니까? 인격의 변화가 과연 가능합니까?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격의 변화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때에 변화된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셔서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그 순간에 성령의 열매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변화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성령에 의해 맺혀질 뿐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다르고 원리가 다르다는 차원에서 다르다는 것이지 세상에서 무엇을 지키고 사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목표를 가지고 주의 은혜로 사는 자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를 위해서 살고 그분을 보여주는 차원으로 산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줌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급한 성격으로, 어떤 사람은 느긋한 성격으로, 어떤 사람은 꼼꼼한 성격으로, 어떤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성격의 차이로 인해 충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가 나쁜가 혹은 어떤 사람이 복음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실 뿐입니다. 판단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싸워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싸우더라도 싸운 것으로 결말을 맺지 말고 주의 은혜를 되새기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에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후에 마가 요한을 신실한 사역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는 것은 윤리와 도덕 속에서 또는 내게 얼마나 잘해주는가 하는 자기 기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잘해주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늘 십자가에 자신을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그 십자가에 자신을 놓고 보아야만 나는 한 일이 없고 주님의 은혜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1997.12.14).
사도행전 스물 다섯 번째 강론
마게도냐로
사도행전 16:1-10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대부분의 교회는 많은 일거리를 만들고 그 일들을 충실히 해 나갈 때에 교회답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일이 없고 예배당에 사람들이 매일 북적거리지 않으면 죽은 교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일거리를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일 때문에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서로 간에 마음이 상해서 심지어는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실로 교회에서 많은 일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교회답게 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다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교회에서 봉사하게 만들고 목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죄에서 건짐 받아 의의 나라에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먼 미래의 것으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믿는 이 순간부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받아들이고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 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 나의 주인이 누구신가를 늘 확인하면서 그 주인의 말씀대로 사는 모습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모습,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내가 세상과 결별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나를 죄악된 세상에서 분리시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분리시켜내되 한 번 분리시킨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순간순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날마다 죄의 성향대로 죄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존재가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봉사 생활, 예배당과 관계 된 일, 목사를 섬기는 일, 가정 생활, 직장에서의 생활 등으로 분리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분리해 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그분에 의해 세상에서 분리되어 사는 일이 교회와 관계되는 일은 괜찮고 직장과 관계되는 일은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16:1-5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를 데리고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다”(7절)고 합니다.
그리고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9,10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도 우리가 반드시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보여주셔야만 주님의 뜻으로 알고 따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강론하면서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내용을 가지고 그대로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아시아로 가려 했으나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사람이 환상 중에 나타나서 도와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아시아로 가지 않고 마게도냐 쪽으로 가는 것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인 줄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쪽으로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는 일이 누구의 일입니까? 바울 본인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이 친히 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의도 때문에 7절에서 “예수의 영”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로 등극하신 그 주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세우셨습니다. 괜히 세운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주로 세우신 것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빌 2:10,11)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일도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셨고, 영광 돌리신 그대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아시아 쪽으로 가면 어떻게 될까? 또는 마게도냐 쪽으로 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자신의 복음이 마게도냐 쪽으로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하여금 바울의 일행을 그 쪽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이 아닙니다. 또는 바울의 일행에게 어떤 유익이 될까 하는 것은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주님의 일이란 그야말로 주님의 일이지 나의 일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친히 계획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주께서 진행시키시며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더러 아파야 된다고 하신다면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길을 요구하신다면 거기에 어떤 이유도 우리는 덧붙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항상 주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뜻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를 유익된 길로 인도한다는데 성령님의 존재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나의 욕심대로 나의 갈 길을 원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주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끌고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라도 바나바와 다투어서 갈라섰지만 결국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바나바와 싸웠다고 할지라도 괜찮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아무렇게나 살아도 결국은 주의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성령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복음으로 망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 주의 영에 붙잡힌 바 된 자의 생애입니다. 아니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를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고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 뺨을 맞으면 즉각 두 대를 때려서 응수하는 것이 세상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왼 뺨을 돌려 댄다는 것은 분명 망하는 일입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면 내가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돈을 벌어서 혼자 다 써도 시원찮을 세상에서 교회에 헌금을 한다는 것은 분명 손해보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헌금 한 것에 몇 배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망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면서 하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일행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신 길은 분명 그들에게 부와 편안함이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환영받고 대접받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신 길은 바울을 적대시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자기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자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는 주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까지 가고 서라는 곳에 서는 자입니다.
비록 내 생각과 내 계획과는 맞지 않더라도 주님의 요구요 말씀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내 생각과 계획을 좌절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성공한 자아를 그려놓고 그것을 위해 도와주는 성령은 없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무조건 잘되게 해준다는 십자가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헛된 십자가, 잘못된 예수, 허상의 성령에 속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 백성들을 몰고 가시는 성령님에 의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인가를 늘 말씀으로 확인하시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1997.12.28).
사도행전 스물 여섯 번째 강론
예수를 믿습니까
사도행전 16:19-34
“19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20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모르는 교인은 없을 만큼 유명한 구절입니다. 전도지에 항상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전도용으로 세운 정류장이나 공공시설물이 있다면 어김없이 새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흔하게 많이 인용되고 있는 성경 구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흔하게 자주 또 많이 인용하고 있는만큼 이 말씀에 대한 오해도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는 전도용 말씀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없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어떤 계층이나 신분에 따라 서로 다르게 주신 말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모태 신앙이나 오래 믿은 신자에게 다른 말씀이 있고 초신자에게 다른 말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의미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 사도가 옥을 지키던 간수에게 한 말입니다. 밤에 지진이 났습니다.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잠자던 간수가 놀라서 깨어 달려와 보니 옥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것을 본 간수는 곧바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간수가 죄수를 놓치면 그 죄수의 죄 값을 간수가 대신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본 바울 사도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죄수들이 모두 도망을 간줄 알았는데 그대로 있자 간수는 놀라서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구원의 의미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즉 미래적인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래에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너무나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도피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너무 크게 생각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신앙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이라고 하는 말 속에는 미래를 위한 도피도 아니고 현실만 생각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 삶이 바로 천국이라고 여기고 사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간수가 자결하려고 한 것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죄수를 놓친 이 심각한 책임을 벗어날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일행이 도망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감옥에 다 있었습니다. 간수가 생각하기에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망을 가야 상식적인 것인데 도망을 하지 않은 것은 간수의 상식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즉 간수가 가진 가치관과 도망하지 않은 바울 사도 일행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간수의 가치관과 바울 사도의 가치관이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이 쪽의 가치관은 죄수들이 도망하고 간수가 자결하는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저 쪽의 가치관은 옥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도망하지 않는 이상한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가치관입니다.
간수가 도전받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혼란이 온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웠습니다. 29,30절에 보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간수는 바울을 통해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기에 참으로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따로 모셨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고 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간수의 물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삶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기존에 가진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 도전을 던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검을 주고 불을 던지러 오셨듯이(마 10:34-39)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역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도전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가치관과 상식에 매여 산다면 결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릴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1,32절). 간수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음에 바울 사도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을 한 것은 예수를 믿으면 네가 자결하려고 하였던 골치 아픈 문제들이 다 해결된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로 전하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복음은 결코 우리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냉소주의도 아니고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염세주의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기독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문제, 현 상황에서의 어려운 문제 등으로 인해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는 현실로 그대로 다 떠 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골치 아픈 문제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 의식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이 보여지기 때문에 더욱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수에게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은 간수 네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간수가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음 저 너머에 다른 세계, 다른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죽음을 넘어선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상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것, 현재를 바라보고 절망이 아니라 또 다른 주님의 세계에서 주는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 세상의 절망 속에서 십자가가 보이는 것, 그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은 단순히 지금 세상에 사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예수 믿는다고 하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한번 예수 믿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믿어왔기 때문에 내게는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넘어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담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2,13).
여기서 피할 길이란 결코 그 시험이 우리에게 닥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시험으로 주셔서 능히 그 시험을 감당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일어난 어려운 일로 말미암아 도피하거나 그 시험이 제거되도록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는 예수 믿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까 조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향해 ‘예수 믿는가? 나를 위한 예수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는가?’라는 물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주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항상 자신을 주님의 십자가와 견주어 볼 줄 아는 사람이 성도입니다(1998.1.4).
사도행전 스물 일곱 번째 강론
성경
사도행전 17:1-15
“1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특징지워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정죄하셨습니다(요 7:7).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세상과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하셨고 세상을 이기셨습니다(요 16:33).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 영원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보셨던 그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셨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희망이 있고 세상의 것에 대해서 많은 가치를 두면서 살고 있다면 아직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밖에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 문제를 자기의 어떤 개인적인 감정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특별한 체험이나 신기한 이적들에 대한 경험이 신앙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게 예수를 믿도록 환상을 보여주셨다, 아니면 병원에서도 못고치는 질병을 고쳐주셨다는 등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신앙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것처럼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마귀의 속임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막연히 성경만 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펼쳐서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의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바울은 성경을 강론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가지고 설교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여기서 왜 갑자기 성경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어 갈라섰습니다. 그래서 실라와 함께 독자적으로 전도여행을 하게 됩니다.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서 아시아로 가고자 했으나 성령이 허락하시지를 않았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더러 손짓하는 환상을 보았기에 마게도냐 쪽으로 가는 것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갔다가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로 말미암아 돈을 버는 자가 바울의 일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거기서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사명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데살로니가로 오게 되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게 되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계속된 고난의 길을 과연 바울이 무엇 때문에 계속 가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바울의 일행에게 그것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51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지 않자 먼지를 털면서 이방인에게로 간다고 했습니다. 18:6에도 보면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강론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강론하는 그것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알아듣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성경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말씀을 강론하니까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4절에 보니까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바울의 일행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성경을 대하기 전에는 같은 사람이었는데, 아니 같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성경을 펼치니까 서로 다른 사람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한쪽은 말씀을 추종하고 한 쪽은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굳이 바울은 이방인으로 가지 않더라도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을 갈라놓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갈라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로부터 시기와 질투,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일생은 그런 모습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좌절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성격이 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경을 강론하였는데 무엇을 강론하였습니까? 3절에 보면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는 내용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 생애에 있어서 유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한낱 인간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십자가에 죽은 자로만 알고 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로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믿는 바를 증거할 수밖에 없고 생애 전체의 유일한 내용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전했기 때문에 바울은 가는 곳마다 반대와 위협이 고난 으로 끊임없이 밀려옴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아시아로 가지 못하게 하시고 마게도냐로 인도하시는 길은 바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이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과 같다는 것을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쳐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책에서 제시되고 있지 않은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만 가짜 세상과 진짜 세상을 잘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진짜 세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생으로 소개하고 있고, 이 세상의 희망없음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입니다. 그것만이 진짜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분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진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사적인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으로 그것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내가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란, 우리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지금 이 자리에 다시 재현시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피 흘림이 없으면 죄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사안임을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식의 복은 성경의 복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저급한 복을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한정된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복이 진짜 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짜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주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그분의 말씀을 추종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복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적인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식의 복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더라도 예수님만으로 만족이 되어진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결국 성경공부는 내가 주님께 속했는가 세상에 속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해석도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중심에서 내 기준으로 성경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여주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신자요 성도입니다.
성경을 100독했다 200독했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많이 그리고 열심히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믿느냐 하는 문제이지 성경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믿는 바를 확인하고 그분을 말씀으로 따르는가 하는 점검이 자신을 향해 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다가 자기의 자존심이 짖밟혀지고 무시당해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즐겁고 고마워지면 천당가고 있는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다리십시오. 억지로 예수 믿는 척 하지 마시고 성령이 오셔서 나를 주장하시고 말씀으로 끌고 가실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경건의 폼을 있는대로 다 잡는다고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주를 좇는 생색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속이고 주님을 속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요즘은 IMF 한파로 인해 더욱 고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만이 성도가 하는 일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종교를 가지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라만을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악하게 보셨던 세상을 악하다고 성경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또 모일 때마다 말씀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주어질 수 있는 주님의 나라가 진짜 세상임을 성경에서 찾고 그대로 증거하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성도인지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1998.1.11).
사도행전 스물 여덟 번째 강론
십자가와 철학
사도행전 17:16-34
“16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창세기 3장 이전에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창 1:31). 처음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대로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한 이후의 땅은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창 3:17).
성경은 창세기 3장 이전과 이후의 상황은 전혀 다른 상황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3장 이전과 이후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범죄하기 이전에는 사람이지만(창 2:15,19) 범죄한 이후에는 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3:19).
때문에 창세기 3장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시면서 가능성으로 찬사를 보내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에 대하여 항상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서 4:14에 의하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목숨은 결코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22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40:6 이하에 보면,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고 급기야는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처음 창조하실 때에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있었던 그 능력의 말씀, 그것 외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해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나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하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끝없이 자신을 위해 수고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 지혜의 위대성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철학이란 바로 그러한 인간의 활동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가 아덴에 이르게 됩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입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에비구레오(에피큐리안)란 완전한 즐거움을 추구하며 삶의 목적을 고통에서의 자유함으로 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운명에 승복하고 상황에 적응하여 평안을 얻자는 사고방식입니다. 스도이고(스토아)라는 학파는 우주가 멀리 계신 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이성’이라고 불리우는 신과 같은 합리적인 과정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진리를 찾고자 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하는 일에 대해서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누구든지 새로운 것을 말하면 그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 세월을 보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란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세상의 지혜를 사랑해서 연구한다는 말이지만 그 기본적인 바탕은 인간의 가능성과 이해력을 절대라고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땅에서 어떤 방법이나 재주를 사용하면 나중에 높은 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철학을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가능성에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과는 정면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고 또한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친히 사람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24, 25절).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30,31절).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것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모두가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되었던 것들이 성경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갖가지 전도 방법, 교인들을 다루는 방법, 교회를 키우는 방법, 아들을 낳는 비법,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방법 등등이 성경의 자리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로 교회되게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천국가는 방법을 정교하게 다듬어 내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믿음이 없이 신학을 시작한 사람은 결국 이 세상에서 멋진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덤벼들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사회보장제도, 구제사업, 이상적인 국가체제, 완전한 교회조직, 그런 것에다 성경을 인용하고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우리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늘 우리에게 십자가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에 대해 사람들은 시큰둥했습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32절)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아주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4절)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 의하면 바울의 전도는 완전한 실패입니다. 도무지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환영할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철학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은 누구나 다 신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철학적 욕심에서 제외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가 가는 길 역시 바울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거부를 당하셨듯이 바울도 당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 신자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예배당으로 모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서로가 갈라서는 기준이 혈연이나 인간의 감정, 또는 환경이나 학연, 지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언약 백성과 비언약 백성이 갈라설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로 은혜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시하고 표적을 구하기도 하고 지혜도 스스로 찾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고전 1: 22). 그러한 것들이 헛된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날마다 폭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8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철학은 헛된 속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된 속임수 안에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이성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기본과제는 자신이 죽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철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생명이 이 세상에는 없고 하나님만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나타내셨고 그 생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지옥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복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애(humanity)의 요소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자들의 올림픽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십니다. 그러면서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어려운 역경을 헤쳐나간 일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인간승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도 아니고 인간승리도 아닙니다. 막연한 인간의 자존심일 뿐입니다. 그 자존심으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배격하고 심지어는 쫓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서 지옥에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철학적인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 땅에 남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마저도 날마다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으로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1998.1.18).
사도행전 스물 아홉 번째 강론
하나님의 백성
사도행전 18:1-11
“1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6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큼은 앞으로의 더 나은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남보다 앞서야 하고 자아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남에게 지배받지 않고 군림하며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를 군림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될 그 때에 자신은 또 하나의 누군가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우리가 스스로의 힘에 의해 지배당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중요한 한가지 사실은 인간은 누구나 다 어둠의 세력이나 아니면 빛의 세력 중에서 한가지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와 그 일행은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라는 도시에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는 항구도시로 사회적인 부도덕이 팽배한 도시였습니다. 어쩌면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모한 것으로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5절) 증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어떤 의지에 따라서 말씀을 전하고 전하지 않고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는 단순히 말씀을 전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말씀을 인격으로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참 떡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자들이 다 떠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그런데 그 다음 말을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 베드로는 자신을 내세웠습니다. 자신이 믿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는데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70).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요한복음 6:65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참고 37-40,44절)는 것입니다. 때문에 베드로가 고백한 것도 자기 마음대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영생의 말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를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오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를 영생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이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그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토해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부단히 연구하면 내적인 실력이 쌓이고 그 실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내가 연구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실 때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이 말씀되도록 전하는 것도 우리가 임의로 전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붙잡고 있을 때에 말씀되게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말씀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 어떠한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구절이 바로 5절에 이어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바울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이런 일로 말미암아 후에 바울이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바울은 실로 부도덕이 횡행하고 복음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을 대적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두려워하며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9,10절).
하나님은 오래 전에 노아를 통해, 아브라함을 통해 그리고 모세와 다윗을 통해 이미 자신의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약의 후손으로 뱀을 짓누를 여인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언약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아 승리하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본래 오신 목적, 즉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마 1:21) 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주님은 계속해서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방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완성해 가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러한 일을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훌륭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죽도록 고생했다는 기록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 때문에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주님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환상 때문에 힘을 얻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일, 곧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것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시에 투입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는 근본적인 뜻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의 어떤 유익을 위해 일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것 때문에 바울을 붙잡고 계시고 고린도에 복음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고자 하시는 그것 때문에 지금 바울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이 아니면 주님의 일이 안된다든지 바울이 없으면 복음 전파하는 일이 그르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하여 나타내는 반응과 같이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싫어하고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 바울을 말씀에 붙잡아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붙잡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복음 앞에 굴복시키고자 하시는 그 뜻 때문에 바울은 할 수 없이 고린도에 있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있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것은 바울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두렵고 떨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인간은 누구나 다른 세력에 의해 장악 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사탄의 말을 추종할 때에 원했던 것은 자기가 신이 된다는 것에 솔깃했던 것입니다. 아니 전적으로 사탄의 그 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신이 되기는커녕 신이 되고자 하는 투쟁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었을 때에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복음의 말씀에 장악된다는 것은 도무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죄인이 주님의 말씀에 굴복되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이 사실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이르기 전에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철학적인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이 말씀이 바울은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전하는 것은 더 이상 철학이나 세상적인 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방법조차도 철학적이거나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복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의하면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두려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바울의 위대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신의 뜻,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신의 언약 때문에 바울을 말씀에 붙잡아 매어서 일하신 것입니다.
이 도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혹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말씀에 붙잡혀 말씀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일 수밖에 없는 자를 두고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라고 하며, 그 사람들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씀은 자신의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언약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기쁨이 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라는 공동체는 교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자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밝혀주고 있는 교회상은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제자훈련, 전도훈련, 입시 기도회, 일천 번제 예배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방법들은 교회아닌 단체를 교회되게 하고 유지시키자는 교회보존운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씀에 그저 그냥 말씀에 붙잡혀 있는 것으로 교회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냥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이 있고 일거리가 있어서 부단히 움직여야 교회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말씀이 교회를 낳는 것입니다. 교회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개하게 되는 자들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장악당하기 싫어하고 누구에게도 다스림을 받기 싫어하는 인간이 자기라고 하는 신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길 수 있는 자가 되었다면 주님의 은혜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라고 하는 신을 날마다 무너뜨리고 제거하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 자리에 또 다시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날마다 말씀에 붙잡히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진리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의 백성입니까?(1998.1.25).
사도행전 서른 번째 강론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1-7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몇 년 전에 성령운동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굉장히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경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계속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성령운동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서울의 두 교회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심지어는 이단 시비까지 붙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서로에 대한 완고한 입장이 완화되었습니다. 이단이라고까지 함부로 정죄하지 말자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긴장이 완화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한 교회가 성경적인 견해를 바꾸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적 입장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공격을 받던 당시에는 한참 세력이 커져가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제는 세력이 한국교계에서 무시할 수 없을만큼 커졌고 교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서로 이단으로 정죄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좋은 게 좋다고 교리적인 논쟁은 서로 접어두고 친하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로 교회를 키우면 어느 교회든지 세력이 커지면서 이단논쟁의 시비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교계에서 무시할 수 없을만큼 커져 있을 때에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나 교회의 세력을 크게 하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혹시 이단적인 논쟁거리가 되더라도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까지 참고 지내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단 논쟁의 도마에 올려놓는 그것이 그 교회를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로 진리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를 키우고 세력을 확장해서 힘으로 다른 교회를 눌러 자기의 목회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도구로 가장 많이 등장되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도구로 삼아 교회를 마음껏 키워보자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성령의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면 신비의 문제로 돌리고 영적인 문제니까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소치라고 협박을 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믿음이 없이 주님께서 그를 신학교에 보내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주님의 소명이라고 하면서 신학을 해서 교회 사업을 벌인 결과입니다. 이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교회에는 주님께서 보내주신 자만 올 수 있습니다.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나 왔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들이대서 비언약적 요소들을 늘 털어내는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의지대로 찾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다른 예수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입니다. 한국교회는 자기 구원에 도취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래 나는 훌륭한 인간이야 이렇게 훌륭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구원받는 것은 기정사실이야! 저 구석에 왔다가 그냥 가는 저런 교인보다는 그래도 나는 교회에 중추적인 일을 하고 있고 목사님을 잘 섬기면서 목사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나만큼 잘난 인간은 이 교회에 없는 것같애!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구원안하면 누구를 구원하나’라고 늘 되뇌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성령을 받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받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바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그 사람들이 대답합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래서 바울 사도가 그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한국교회가 성령운동을 할 수 있는 근거가 결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받도록 안수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성령이 이렇게 오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세례만 받은 자는 아직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입니다.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물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어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분이라고 선포했더랬습니다(4절).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이 안수하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6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받으면 무조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방인이라도 누구든지 요한의 세례에만 멈추어 있다면 구약시대에 살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그분 안에 있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뜻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가 방언도 하고 예언을 했다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으로 기도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록된 말씀으로 주시기 전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못알아 듣는 말로서 계시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비밀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죄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했던 인간들의 죄에 대해 방언을 통해 책망하시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죄인들인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잘나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로 모이고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란 이렇게 성령을 받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장악한 자를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받은 자는 예수를 자신의 주로 고백하면서 주인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2-3).
성령을 받아야만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받지 않으면 교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 왔다가도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부 주님의 은혜만 자랑하는 모습으로 일관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자들이 모인 단체는 자기 자랑으로 도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분의 피로 사신 바 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5:9).
그러므로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나를 살려주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제 내가 주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는데 무엇을 하면서 살까 라고 고민이 된다면 성령받은 자가 아닙니다. 무엇을 하면서 주를 위해 살까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을 하며 주를 위해 살까가 아니라 그냥 주님의 소유로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 삶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자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기 때문입니다(엡 4:12). 고린도전서 12:12에 의하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27절에 나가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는 자기를 바라보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 나는 결코 나로서의 내가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서의 나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거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문득 주를 바라보는 마음이 생깁니까? 그 때에 자기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세례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진 자여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냥 밋밋한데도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른 곳이란 오직 하늘입니다. 위엣 것을 찾고 세상과 세상의 것을 공박하면서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더 이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받아서 모인 자들이 오직 하늘의 것을 보여주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교회들은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성령을 도구화하려고 합니다. 성령을 도구로 해서 우리의 교회 사업을 멋지게 번창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현실적으로 교회는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는 원하지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많은 목사들이 비밀리에 최면술을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최면술을 걸어서 성령받은 것처럼 위장하려는 술수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기행각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체험이나 경험을 우상으로 삼는 우리들 때문에 마귀가 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임의로 일하십니다. 그러나 철저히 자기 백성은 찾으시고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교회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뿐입니다. 심방한다고 해서 사람이 모아져서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영이 우리를 심방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증인노릇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도록 우리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의 영이 하고자 하시는 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일에만 신경쓰시기 바랍니다(1998.2.1).
사도행전 서른 한 번째 강론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19:8-20
“8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0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누구든지 가장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천국일 것입니다. 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천국이 막연히 좋은 곳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무조건 좋은 곳으로 알고 천국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세상에 대하여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자는 부자들 나름대로 다 고민이 있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들 나름대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만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그토록 원하는 또 한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만으로 끝이라고는 생각이 안되는 것입니다. 아니 저 세상이 있든 없든 죽은 다음에 혹시 천국이라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사후 보장을 받아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후 보장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목표를 돈에 걸고 죽기 살기로 돈을 모으는데 일생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많은 돈을 가지고 보면 그것으로도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인간의 관심이 종교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돈으로 만족이 되지 않는 세상이니 사후에 대한 보장을 만들어 놓자는 심산으로 헌금을 듬뿍듬뿍 하며 종교에 열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마치 보험이라도 들어 놓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천국도 돈으로 사려고 하는 마음으로까지 우리의 욕심이 뻗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천국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개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막연히 그리고 무조건 좋은 천국은 성경에 없는 천국입니다. 그리고 또한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말씀하는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 권면하고 말씀을 가르치되 3개월동안 했다고 합니다. 8절에 보면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9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 도를 비방하는 자들과 구분하여 따로 2년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11절). 즉 바울이 이적을 베푸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과 더불어 이적을 행한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여기서 하나님을 말씀을 전했다든지 아니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전했다고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했다고 합니까?
그것은 이적을 통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씀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바울이 이적을 행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가 하면 바로 천국,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 4:23,24).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더불어 제시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질병을 고치며 약한 것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적 배경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35:5,6에 보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통해 성취되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여러 가지 병으로 말미암아 억눌려 있는 자들이 거기서 놓임을 받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속에서 제자들이나 바울 사도가 이적을 행하는 것을 통해 오늘날 우리도 믿음이 있고 능력을 받으면 이렇게 이적을 마음대로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은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코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바울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모든 대상은 죄의 권세에 철저히 매여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할 때에 그 도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무조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을 고치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행하는 것처럼 예수를 빙자하여 이적을 나타내며 인기도 끌며 돈을 벌어 보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습이 한국 교회 교인들의 상황을 다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를 빙자하여 자기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모습이 지금 한국 교회의 상태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를 믿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을 대항하니까 귀신들린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했다고 합니다(16절). 이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17절).
성경에서 말씀하는 천국,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나라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얻은 상태가 천국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아들의 나라에 옮겼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모두가 예수님에 의해 옮겨짐을 당했다고 고백하는 자들뿐입니다. 자기 힘으로 나왔다고 하는 자는 발붙일 곳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란, 특정한 한 인격체,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으로 자기 백성들을 모아서 그 사람들만 통치하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따라서 왕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격체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나라에 산다는 것은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일을 믿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의 인격, 삶이 전체로 투영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2:20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는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기 때문에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 사도를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함에 있어서 바울이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서 있기 때문에 귀신은 바울도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장악하고 계신 예수님을 무서워합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라 주님의 싸움입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능력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내 안에 예수님이 살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의 종입니다. 예수의 이름만 차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인지 마귀가 먼저 알고 조롱합니다.
에베소의 이런 일로 말미암아 결국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절)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가 힘을 얻어 더 능력있게 말씀을 전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말씀이 세력을 얻는 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우리 주성교회라는 단체의 세력이 커진다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말씀이 세력을 얻는 이 일에 우리 교회가 동참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능력 받아서 주의 일을 하겠다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만큼 교만한 말이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주님과 함께 죽는 것에 만족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살아줄 때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흉내는 누구나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도권이 내 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인생이 예수님께 흡수되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그런데 그 앞에 항복이 안된다면 가짜 예수, 가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가짜 천국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를 덮쳤습니다. 항거할 수 없는 이 사실 때문에 꼼짝없이 발목잡힌 자로 순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1998.2.8).
사도행전 서른 두 번째 강론
우상
사도행전 19:23-32
“23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 26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저희가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여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는지라 30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많은 부분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구절들을 말하면 거의 불신자를 향해서 전도하는 구절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에서 불신자를 향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촉구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만이 진리다 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 하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믿으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못믿는다 하는 강한 부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성경을 보면 늘 모세와 다윗 편이고 참된 선지자들의 편이며 예수님 편이고 바울의 편에 서 있습니다.
한번도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잡족들 속에 들어 있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의로운 쪽에서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을 평가해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성경이 제대로 깨달아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가 보여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지적하는 죄에 대한 사항들은 항상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나를 미워하는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적어도 자신은 예수를 믿었으니까 근본적으로 죄를 지적받아야 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제외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은 불신자를 위해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신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신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면이 훨씬 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을 때에 그 원망하는 이스라엘 무리 속에 내가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편에 나 라고 하는 존재가 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속에 아니 갖은 방법과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 전면에 나서있는 유대교의 지도자들 속에 내가 보여져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 편이 아니라 바울을 반대하는 그 세력 속에 나를 편승시키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보여져야 그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아데미라는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돈벌이가 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20절)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놀라운 이적들을 베풀게 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바울 쪽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 대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술을 하던 자들이 책을 모아 불태우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다 믿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새로운 인식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적잖은 우려를 가지면서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뿐만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27절)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장사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25절).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천국에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것을 사수하기 위하여 그들은 바울 사도의 일행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삶의 위협이 된 것에 대한 복수입니다.
이처럼 세상이란 다른 사람이 죽더라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중에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니 상대를 제압하고 죽여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 욕심은 돈을 좇는 것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끝없이 돈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돈이 우상이 아니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우리 자신이 우상입니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습니다. 내가 바로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파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고 그 돈으로 내일에는 좀더 나은 자아를 표출시켜 보자는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우상을 섬기는 문제는 말하면 항상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안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우리에게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가르칠지라도 교회와 관련된 것들만큼은 예외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교회의 부흥에 대한 것입니다. 양적인 성장을 원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라고 말합니다.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자기 백성들을 더하여 주신다면 교회는 얼마든지 많은 수가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 수를 늘리는 그것이 교회의 목표가 되어 있고, 또한 그 목표에 대한 욕심은 정당한 것으로 소위 말하는 거룩한(?) 욕심으로 교회에서 가르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교회의 모든 행사는 교인 수 늘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모든 일이 그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장에 방해되는 요소가 발생된다면 언제든지 가차없이 제거해 나갑니다. 목회자의 시무에 대한 문제도 그러합니다. 교회 부흥을 시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목회자이기 때문에 교회 사업에 도움이 안되는 직원으로 몰아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를 섬기기 때문에 탐심조차도 종교적으로 미화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섬기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원하되 주님의 몸은 원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믿어주되 예수믿는 것은 거부합니다. 예배당은 믿지만 십자가는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베소서를 통해 에베소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7-20).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모든 것이 죽은 것이고 우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계속해서 떡을 얻어먹는 것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라는 기적조차도 썩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생명이란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행했던 이적에 대하여 병낫기를 구하는 그것 자체도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한 주님을 기뻐시게 할만한 것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우리에게서 나왔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기독교란 하늘에 오신 어떤 분에 의해 새로운 나라에 옮겨져서 날마다 나를 옮기신 그분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날마다 신기한 일을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보통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니까 자기가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소지하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거룩, 경건 이러한 것들을 자꾸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어서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과 더불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무엇을 받았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보다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이 이루신 그의 나라를 받았음을 알고 더 이상 받을 것이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여년 전에 러시아 상공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썼다는 소식이 기독교계에 파다했습니다. 어떤 극성스러운 사람은 외신 보도들을 번역하여 복사를 해서 각 교회들마다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글을 쓴 내용은 ‘때가 가까우니 예비하고 있으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성경적이다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러한 것들을 기독교의 어떤 한 내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우상입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하는 기도, 예배, 찬양, 전도, 헌금 행위 등으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할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천국이라는 나라를 보장받아 놓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곧 천국 가고자 하는 내가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와 전도의 행위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네잎 크로바, 럭키 세븐 같은 것 과 차이가 없고 내가 드리는 예배, 찬양, 헌금 등은 절간에서 부처에게 공을 드리고 시주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도 우상일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날마다 나의 육체의 소욕을 못박는 십자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십자가는 우상입니다.
우리 교회를 왔다 가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존 교회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가 썩었기 때문에 자신은 거기에 동화되어 썩지 않기 위해 페니실린을 찾는 것과 같이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 다니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같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를 비판한다고 해서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닌 것은 버리면 됩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뜯어고쳐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나에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은 주님이 직접 만드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고, 교회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는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의 것을 더럽히고 본질을 훼손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내게서 만들어지는 모든 종교적인 것들을 날마다 버리는 작업이 있어야 주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를 믿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게 되고 무엇이든지 믿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날마다 부정하고 버리며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주님이 원하시는 신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정리하도록 합시다(1998.2.15).
사도행전 서른 세 번째 강론
말씀의 위로
사도행전 20:7-12
“7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사람들은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는다면 모든 계획과 목표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활동들은 자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작업입니다. 이러한 생존 경쟁에서 진다면 그 인생은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계획과 목표 때문에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인가 해놓는 것이 없다면, 남겨놓는 것이 없다면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로부터 우리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생을 살아온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된 것도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내자는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선악과를 먹는 행위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독립된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죄를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바벨탑은 오늘날도 끊임없이 쌓아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이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기도라는 바벨탑, 전도라는 바벨탑, 예배라는 바벨탑,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바벨탑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과 교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명예와 관련된 바벨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많은 교회들의 주일 설교 제목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 강조점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신앙의 금메달을 따자는 것으로 일색입니다. 신앙의 금메달을 따자는 것은 인생의 성공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인생의 성공자라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세상의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교회에서도 우리 이름을 내자는 죄를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금메달을 따자는 목표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대로 주어진 신앙이라면 우리의 이름을 무시하자는 것입니다. 무시된 우리 이름 위에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것이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우리의 이름이 무시된 나라입니다. 우리의 의와 공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행해지는 모든 일이라면 천국과 무관한 것입니다.
결코 성경은 바울 사도가 얼마나 위대한가? 혹은 그들이 행한 일들이 자랑스러운 일이다 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일들을 무시하고 무의미한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붙잡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을 행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기에 대하여 성경이 무슨 지침이나 어떤 교훈을 주는가 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그런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드로아에서 있었던 한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드로아에서 바울 사도가 오랫동안 강론했기 때문에 창에 걸터 앉아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하면서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12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위로를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인해 위로를 받은 것입니까? 물론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으로 인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살려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게 했다는 아주 간단한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다시 살림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위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말씀과의 결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결과와 증거로 죽음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죄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이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이 지배할 수 없는 새로운 부활의 나라를 친히 세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살린 것은 바울의 하나님 나라 전파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행한 이적들은 바울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그의 나라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바울 사도를 통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19:8-12). 그 나라는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에서 유두고를 살린 것은 유두고를 살린 이적 자체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이제까지 강론한 것에 대한 실질적인 실물교육으로서 말씀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이며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위로입니다. 즉 말씀의 지배를 받는 상태란 죽음을 극복하는 주님의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교훈받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여기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예수님께만 관심 가진 자세로 살아진다면 내 의지 대로 뭐가 하나도 되는 것이 없는가 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지는 그것이 복이라는 하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어다 살아나는 기적 체험하지 않아도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 안에 있으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에 밑줄을 긋는 곳은 자기에게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어느 것은 은혜가 되고 어느 말씀은 은혜가 안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은혜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나의 욕심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 나의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중심에서 나를 위해 성경을 보지 마십시오. 나를 위한 어떤 위로가 있는가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고생하셨고, 왜 죽으셔야 했는가 하는 것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1998.2.22).
사도행전 서른 네 번째 강론
교회의 사명
사도행전 20:17-35
“17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19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28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물론 자기는 예수님에게만 관심있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가 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교회라는 조직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가 원하는 바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에 나온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도 성경 말씀에서 교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오직 자기가 생각한대로 되어지는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주일이라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그 주간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벌 주실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에게 유익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매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이 있고, 교회라는 조직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온전한 자기를 실현해 보자는 쪽으로 나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교회의 사명은 선교와 구제에 있다고 정해 놓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선교와 구제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일로든지 거기에 참여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푼의 돈이라도 선교 헌금으로 내놓으면서 헌신을 하고 있다고 흐뭇해 합니다. 돈으로 먼 이국 땅에서 선교하는 선교사의 복음 전하는 고난에 동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에게 충성하고 교회 조직체의 요구에 응하면 주를 위해서 사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교인들의 심리를 오늘날 목회자들은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잡동사니 같은 프로그램들을 얼기설기 만들어 놓고는 참여하지 않으면 갖은 회유와 협박을 동원해서 교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상급이라는 것이 있어서 열심히 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성경 구절들을 갖다 붙입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교인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교인들을 천국에 가도록 하는 일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체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 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천국에는 열심히 봉사한 자에게 많은 상급이 주어지고 적게 봉사한 자에게 적은 상급이 주어지는 그런 차등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영생 그것 자체로 기뻐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 가진 자는 이 땅의 교회 조직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관심이 있고, 그 교회 조직체를 통해 온전한 자아를 실현시키려고 온 자는 교회의 많은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선교와 구제의 일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교회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선교와 구제가 활발하게 되어지고 있으면 그것은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전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바울 사도가 밀레도에 들러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성령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과 결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에베소 장로들에게 강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마는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행위나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졌다면 그것은 주님을 계시하는 차원에서 기록되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개인에 대한 자랑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한 모든 감독자(장로)들에게, 즉 모든 주님의 몸 된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했던 일과 결부하여 교회에 말씀으로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의 전 생애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도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향하여 “지금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말씀이시고 살아계신 주님께 맡겨진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전했던 것, 바울이 나타내었던 것들을 그대로 증거하고 드러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무엇을 증거하였습니까? 21절에 보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다고 말씀합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25절에서는 “하나님 나라”, 27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전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의 사명이었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이란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의 할 일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내고 전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지지 않고 살았던 바울 사도와 같이 주님께 생명을 바치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누가 합니까? 32절의 표현대로 하자면 교회는 이미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겨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사로잡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말씀대로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주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움직여져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주님의 몸에 속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일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교회란 주님의 사명 안에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한다거나 인간의 조직체를 위한 모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목숨을 예수님께 바치고 이미 죽은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생명이고 그 생명이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3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주어야 합니다. 구제와 선교한답시고 세상을 향해서 물질과 알량한 동정을 베푸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노라고 주보의 전면에 소위 “우리가 도우는 교회와 기관”이라는 제목으로 시골교회와 개척교회의 이름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명이라고 떠들어대면서 하는 구제와 선교는 세상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도무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비밀인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사명 때문에 사도행전 9:15,16에 의하면, 바울은 무수한 고난을 받아야 할 것으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역시 주님의 몸 된 자들에게도 이러한 고난에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나타난 주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냄은 받은 자로 말씀하셨습니다(요 17:18).
자기가 자기를 보낸 자는 오직 자기의 목표와 비전을 이루는 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교회라는 조직체를 바라봅니다. 목사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가 교회에서 가지는 명예와 직분 등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자기 자신의 모든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세상에 보낸 분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쏟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께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 것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기 위해서 사는 그것이 기쁨인줄을 아시기 바랍니다(1998.3.1).
사도행전 서른 다섯 번째 강론
주님의 뜻
사도행전 21:7-14
“7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예수 믿는다는 사람치고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때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신학교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신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 문제로 인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아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께 질문도 많이 했더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로 나온 책이 10권 이상이 되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책들을 모조리 다 사서 읽었습니다. 물론 저는 수많은 상담과 책을 통해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했으나 어쨌든 신학의 과정을 하게 되었고 지금 목사가 되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쯤에 와서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많은 상담과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내가 신학을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지적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이나 계획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일하려고 했기 때문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라고 잘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계획했던 길이나 자신에게 유익되는 길로 결과가 맺어지면 그제서야 그것이 당연한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그런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어떻게 나타내시는가를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20:22,23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앞으로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로부터 온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절)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합니다(12절).
4절에도 보면 두로의 교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만류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바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나니 두로의 교인들은 바울을 아끼는 마음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말릴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단호하였습니다. 두려워할 수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자신을 만류하는 가이사랴의 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13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절). 이 말은 바울의 단호한 답변에 대한 가이사랴 교인들의 말이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앞에 교인들은 더 이상 바울을 만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더 나아가서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 향하신 주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기도에 보니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신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께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고, 예수님 또한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으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뜻도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위하는 베드로의 생각은 사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십자가였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운명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생애는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음을 성경은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서 죽는 것처럼(눅 18:32) 바울 사도 역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어 있었습니다(11절).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셔야 했던 것처럼(눅 9:51) 바울 사도 역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13절).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만류하는 베드로로 인해 괴루우셨듯이(마 16:2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가이사랴 교인들로 인해 바울의 마음이 심히 상한 적이 있습니다(13절).
이는 문자적으로 예수님과 같이 바울도 그대로 당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은 바울의 생애를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 나가면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일에 바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십자가의 길에 늘어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예수님의 위한 것이 아니었듯이 가이사랴의 교인들이 무조건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울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예수의 이름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결박받고 죽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는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이었습니다(13절, 20:24). 결국 바울의 살고 죽는 문제는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에 맡겨진 것일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개인적인 일을 억지로 주님의 뜻과 연관시키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늘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두 가지 물음이 내게 왜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저 멀리 계시고 이미 내가 계획해 놓은 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과 내 생각을 포기한다면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함께 복음을 위해 십자가에 죽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계획, 내 생각을 포기한다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갈등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란 내 생각을 포기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면서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시면서 어느 길로 갈 것인가 결정하라는 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 성령의 인도로 철저히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신자란 결코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십자가의 길 외에 나의 길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주님의 뜻이란 성령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모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죽음이란 성령 안에서 날마다 행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날마다 우리는 죽이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자는 더 이상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습니다. 날마다 성령께 붙잡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고 묻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심을 죽이시기 때문에 묵묵히 주님의 인도를 따라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내 뜻만 포기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죽음 안에 던져 넣으시기 바랍니다(1998.3.8).
사도행전 서른 여섯 번째 강론
바울의 바울 됨
사도행전 22:1-21
“1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2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4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6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21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무엘상 16:7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실 때에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외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사람은 외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체면치레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면서 삽니다. 높은 학력을 추구하는 이유도 이런 것에 있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좋게 만들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결국 종교라는 것도 자기를 포장하고 치장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겸손과 경건 이런 것들은 자기를 얼마나 훌륭한 인간으로 보이게 나타내느냐 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교인들이 기도, 예배, 찬송, 전도, 헌금 심지어는 성경을 읽는 것조차도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어쨌든 결과만 만들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결과를 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였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모습이 있으면 훌륭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인물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그러한 결과를 자기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잘못된 신앙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항상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속임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생을 심지 않은 곳에서 영생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심어놓고 영생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영생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심겨진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영생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영생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갖가지 종교적 형식 속에 자신을 밀어넣고 있으나 가짜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도 바울을 대적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자들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철저히 해부하고 또한 폭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루살렘에서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긴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서 고소한 것에 대한 변호의 내용이 본문에 전혀 언급되지 않지 않을 뿐만 아니라 22:11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에 대해 증거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죄목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율법을 훼방하며 어그러뜨리고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거룩한 것을 더럽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가장 크게 분노한 것은 저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 노선을 거부하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력에 대하여 도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곰곰히 생각해 보고 또 성경을 연구해 보니 이렇더라 그래서 이것이 맞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맞는지 기존에 자기가 알고 있던 신앙이 맞는지 연구한 적도 없고 심지어 꿈도 꾼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앙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바울 자신을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는 바울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관을 가지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전혀 주님을 향해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부르심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신앙에 대한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종교 단체에 의해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해서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고 했던 자신을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히려 바울은 같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모함을 받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7,18절).
바울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을 때에 이미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지금 여기서 증거하는 것도 결코 사람들이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전에 예수님을 거부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하나도 다를 바없다는 것을 폭로할 뿐이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소도 바울을 고소한 것과 흡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나 그 고소의 내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는 것으로 거짓 증거를 채택했을 뿐입니다(마 26:59-61). 스데반에 대한 분노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행 6:13,14). 모든 유대인들이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모독한 것을 곧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율법을 고수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바울이 드러내고, 공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형식만 가지는 것으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경건과 의식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또 다시 죽이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의 바울됨은 오직 자신이 핍박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있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 인간이 주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거나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베풀어지는 것으로 말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죽이려고 하고 예수를 없애려고 하는 주님과의 원수 관계로 있었을 때에 주님의 부르심에 굴복되어진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주를 거부하고 공격하는 그런 상태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상태로 살자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예수님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거부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모습이었고, 지금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요 죄인된 상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권세에 매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수용하지 않습니다(요 8:44-46).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즉 주님께서 부르신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요 8:47).
연구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야만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를 보게 하실 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성경을 자기 자신이 유익되는 길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인간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모르니 주님의 은혜가 보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세상이 자신을 악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본래 세상이 악한 것입니다. 악한 것 속에 있는 인간들이 선하다면 얼마나 선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래봤자 하나님이 보시는 악이요 죄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열심이었고 그 열심 가지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복음적인 것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비복음적인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참된 주님의 교회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또한 신자들은 참된 교회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낳도록 묵인하셔서 이스마엘이 있는 중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심으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짜 속에서 주님의 은혜가 더욱 견고하게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의 바울 됨을 통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십자가로 증거되어졌습니다. 내 안에서 종교적 틀을 갖추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은혜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된 인생 그가 주님의 사람이요 또 다른 바울입니다. 그 사람에게서는 인간의 냄새나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날 것입니다(1998.3.15).
사도행전 서른 일곱 번째 강론
곁에 서신 주님
사도행전 23:1-11
“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 11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종교를 가지는 사람들의 고질병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근거를 내 쪽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확인이 되지 않으면 안믿겠다는 식입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신앙의 형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러한 이적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신앙을 요구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나 신기한 일들을 가지고 주님이 왜 이렇게 하셨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내 쪽에서 나의 신앙을 확인하는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대로 자기에게도 그렇게 주님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기도원을 좇아 다니고 신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집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입니다. 확인해야 확실히 주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될 뿐만 아니라 내가 분명히 눈으로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신앙으로 되어질 때에 주를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뚜렷한 증거를 나타내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필요없고 예수님도 안믿겠다고 주님을 향해 협박하는 기도를 합니다. 환상이나 아니면 병낫는 기적이라도 한 번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두 번도 아니고 한 번만 보여달라는데 그것도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무능한 하나님 내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간주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흥정이고 거래입니다. 신앙의 근거를 주님 편에 두지 않는 이상은 항상 흥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문제가 닥치면 우리에게서 이런 흥정은 항상 튀어나옵니다. 집안의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나 아니면 자식에 대한 문제가 발생되면 이번만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간사합니다. 어떻게 하든 위기만 모면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인간이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이런 점에서도 역시 유효합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만들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죄의 본성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은 그 심성이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할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사람은,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십자가가 믿어지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집니다. 도무지 내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고백이 있는 자가 예수믿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란, 자기가 무슨 결정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붙잡혀서 사는 삶입니다. 바울의 삶이 그런 삶이었고 또한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일 수밖에 없다고 바울의 생애를 통해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전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제거하려고 하는지 그 전모를 듣고 싶어서 유대인 공회를 모으게 하여 바울을 그 앞에 세웠습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1절). 그리고는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3절)고 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기보다는 기존에 가진 종교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절)라고 바울을 공격한 말에서 그들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와 유대인들의 관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대제사장을 향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의 편에서 율법을 통해 바울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동일한 시각으로 바울을 보고 있고 또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대제사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열심히 지킨다고 하는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쯤되면 우리는 바울의 원수들에 대하여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자리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대제사장에게 재앙을 내리는 역사만 일으켰더라도 아마 그들이 꼼작 못하고 다 예수를 믿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셔서 재앙을 내리시거나 아니면 믿도록 하는 증거를 특별하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에게 큰 이적을 베푸시거나 특별한 증거를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1절).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힘을 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을 강하게 해서 조금만 기다리면 뭔가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뜻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담대하라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상황, 또는 상대방을 보지말고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의 공격과 협박에도 굴하지 말고 로마에 이르게 될 때에도 결코 그들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장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바울 곁에 서서 말씀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을 증거하였으니 앞으로도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그렇게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주님의 창조 때 하신 말씀처럼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실 열심입니다. 주님 편에서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어떤 방해와 반대가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바울이 신경써야 할 문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바울 곁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10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되게 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일을 하고자 하는데 주님이 와서 도와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를 불러서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셔서 주님의 일을 하시는 데에 있어서 자기 백성들을 놓지 않으신다는 무서운 선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붙잡힌 바 된 자가 예수믿는 자입니다.
내가 이렇게 붙잡혔다고 믿어집니까? 그것이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증거를 얻으면 얻어지는 것과 동시에 곧 의심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증거를 찾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밟고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끝없는 속임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바울 곁에 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을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이 물론 바울이 없으면 주님의 일이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한 죄인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는 주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일과 상관없이 주님께 붙잡힌바 된 채로 로마에까지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했던대로 주님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음침한 골짜기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참고 시 23:4). 다윗이 노래했던 그 길은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가셨던 길과 동일한 길로 이제 예수믿는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그 길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좁은 길입니다. 다윗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시 23:5)고 노래했듯이 원수들이 널려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바로 이런 길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으로 돌아와서 12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바울 당시에 있었던 이런 자들이 오늘도 우리를 위협하고 공격하면서 예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그런 환경이 주어질 때에 실제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에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자기 자신 안에서 신앙의 근거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직 주님 편의 십자가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말씀으로 확인합시다. 오늘도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살아지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증거인줄 알고 말씀 안에 살게 됨을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1998.3.22).
사도행전 서른 여덟 번째 강론
두 권세
사도행전 24:1-27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4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6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7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8우리의 송사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10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11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12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16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17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20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2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24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복음을 전하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항상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외치면서 전도하는 것같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대나 봐요. 그분을 한 번 믿어보세요! 잘은 모르지만 마음의 평화가 올 것입니다. 가정에 우환이 없어질 것입니다. 항상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의 사업이 성공하며 자녀들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믿어봐 주세요! 혹시 압니까? 죽어서 천국가게 될지…’
이런 거짓 꾀임에 빠진 여인네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얼마간의 교회 생활을 통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느끼고 항의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이 온다고 해 놓고서는 왜 복이 안오는겁니까? 자녀들이 잘 되고 남편의 사업이 성공한다고 했잖습니까?’ 이쯤되면 으레 수학공식처럼 동원되는 말이 있다. ‘자매님! 주일 성수 했습니까? 십일조 떼먹지 않고 꼬박꼬박 했습니까? 새벽기도회에 참여했습니까? 성경은 얼마나 읽습니까? 전도는 몇 사람이나 하셨습니까? 이제까지 그렇게 안하셨잖습니까? 자매님의 믿음이 부족해서 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나오면 교인들은 기가 죽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한 단면입니다. 신앙을 전부 내 쪽에서 어떤 틀에 집어 넣으면 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요구하는대로 좀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성경읽고,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하는 것을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그것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믿음이 없는데 기도하고, 성경읽고, 예배나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종교적 행위를 함으로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가지고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성령께서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에서는 선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믿음은 주시는 분의 권세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의 어떤 근거도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믿었다는 말조차도 하나님 앞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졌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3:19-24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롬 1:17).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의를 은혜로 베푸신 분을 위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12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완악한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답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권세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예수님은 결코 인간들보다 연약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권세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고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이라는 한 인물도 바로 그러한 주님의 권세에 굴복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대항하고 예수믿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죽이려고 했던 자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앞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일생을 주님께 붙잡힌 자로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하여 당시 로마 총독인 벨릭스에게 바울을 재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한 말을 보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5절). 전에 같이 유대교를 믿던 자였지만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하루 아침에 원수가 되어 바울을 두고 ‘염병’이라고 하며 ‘이단의 괴수’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동족이 문제가 아니고 전에 얼마나 알았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관계, 혈통의 관계는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학연, 지연 등이 자신에게 유익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유대교에 방해거리가 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제거하는 일에 필사의 각오를 가지고 덤벼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들이 40여명이나 될 정도였습니다(23:12,13). 이것이 하나님을 빼버린 인간 종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조직에 방해거리가 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비단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교 뿐만 아니라 벨릭스에게서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6절)고 했고,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2년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놓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27절).
빌릭스는 오직 돈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만 신경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 혹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싸서 총독의 권력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벨릭스의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에 바울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사실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전하는가 하는 것 역시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항상 만들어 놓은 조직체와 그에 따른 권력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된다고 믿고 있는가 하면 돈으로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돈이 힘입니다.
로마서 13:1에 의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권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권세를 주신 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권세가 누구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권세를 쓰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은 이런 곳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향해, 유대교라는 종교적 권세 앞에서 그리고 로마라고 하는 엄청난 정치적 권세 앞에서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바울 사도는 “예수 믿는 도”에 대해 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25절에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의 형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에 의해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종교적, 정치적 이 두 권세는 두가지가 아닌 하나로 보았습니다. 곧 세상이라는 권세로 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권세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본 것은 세상의 없어질 권세가 아니라 영원한 주님의 권세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십자가를 지신 실질적인 주님의 권세가 지금 바울 사도를 붙잡고 있기에 바울은 그 권세에 붙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뿐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고통 당하거나 죽는 그런 과정을 통해 계속 복음은 주님께서 증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잘되어야 복음이 복음되게 증거된다는 그런 공식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없습니다. 내가 성공해야 주님의 복음이 잘 증거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형식을 행하는 것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앙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들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IMF로 인해 각 회사들마다 인력을 감축하느라고 무더기로 해고를 합니다. 웬만한 중소기업들은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나서 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나 자신에 대하여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직 당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회사에 그대로 눌러 있고 싶은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이 걱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권세에 붙잡혀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하셔야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힘에 의해 밀려나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걱정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세상의 권세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지고 세상보다 큰 권세자이신 주님이 보여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종교적 정치적 권세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을 때에 세상의 권세에 대항하여 승리하신 방법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세에서 빠져 나가신 구멍이 십자가였다면 오늘 우리들 역시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을 전도하고 이 나라와 민족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허울 좋은 슬로건 아래 한국 교회가 ‘국가조찬기도회’를 열어주는 것은 명백하게 권력에 아부하는 행위입니다. 국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나의 삶에 대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생명에 대한 문제를 거머쥐고 계신 실질적인 권세자이십니다. 그분만 존귀히 여기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분만 증거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종교적 형식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하늘의 권세자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권세에 굴복된 자가 성도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1998.3.29).
사도행전 서른 아홉 번째 강론
삶과 죽음
사도행전 25:1-12
“1베스도가 도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4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5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6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되 능히 증명하지 못한지라 8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바울이 가로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에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12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세상을 산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이 IMF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될 때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심하게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관심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실직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직장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가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걱정입니다. 보너스는 고사하고 월급이 제대로 나오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안부를 묻습니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한 상태요 어지러운 상태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더욱 알고 싶은 것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고, 가정의 미래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미래입니다. 물론 국가나 직장, 가정에 대한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속해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나의 직장, 나의 가정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실로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주팔자를 보거나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사업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TV에서도 풍수지리설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시사 프로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교인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으로 좋아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교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 이런 것들이 인간들로 하여금 교회를 찾거나 절간을 찾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항상 자기 개인적인 위기와 관련되어질 때에만 신을 찾는 종교심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생명 보장을 예수 보험으로 대비해 놓자는 심보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천국이나, 생명은 자신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서의 천국이고 생명일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더라도 결코 나의 삶의 전부를 예수님께 맡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나의 모든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과 함께 죽는 것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어떻게 하면 예수의 힘을 빌려서라도 극복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예배당을 찾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된 심성을 성경은 심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관계된 일로 인하여 유대교가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또한 베스도가 처신하는 것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바울에 대한 문제를 곧장 처리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바울을 2년이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합니다. 그가 유대 총독으로 오자 유대인들이 벨릭스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바울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베스도에게 여러 가지로 간청도 하고 압력도 넣어서 어찌하든지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베스도가 부임하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바울의 재판에 관한 문제를 다시 제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를 간청했습니다.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3절).그런데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다른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갈 때에 그 노정에서 죽이려고 베스도에게 이러한 간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며칠 후에 가이사랴에 내려간 베스도는 재판 자리에서 바울에게 묻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9절). 그러자 바울이 대답하기를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10절)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무슨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6:32에 의하면,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바울)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 하였다.”
만약 바울이 눈치가 있어서 정치적인 문제를 빨리 간파하였다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아그립바 왕에 의해 놓임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 때문에 그는 로마가 압송되어 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생애가 왜 이렇게 되어가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왜 로마로 가야 하는지를 주님 편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 때문입니다. 즉 로마에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인하여 로마에까지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억울함 때문에 로마의 시민권을 이용해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 때문에 로마에까지 끌려가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1에 의하면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 중대한 사명으로 인해 바울이 로마로 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 개인의 삶이 어떤 결과로 맺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성경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의 생애 마무리가 비참하게 되든 영광스럽게 되든 그것은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사도들의 생애 마감에 대한 문제를 그토록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바울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11절). 바울 사도는 죽는다는 것이 두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교회의 신자들이나 바울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였을 때에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것이 바울 사도의 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그런 모든 것들이 바울을 괴롭게 하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주님의 일에 바울이 없으면 큰일날뻔 했다든지 아니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주님의 복음이 로마에까지 증거될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가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바울을 고생시켜가며 로마에까지 보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붙잡힌 자는 주님의 일에 이렇게 쓰임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무리 유대인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를 간청하여 예루살렘에서 재판하도록 요구하며, 압송될 때에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이 있었더라도 그 일이 성사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 그것은 한낱 인간의 계획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수고가 주님이 바울을 통해 일하시고자 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것은, 바울의 죽음에 대한 권한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가지고 계신 고유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바울을 죽이는 문제에 대하여 주님의 계획, 권한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일을 인간이 거부하거나 방해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은 누구입니까?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입니까? 아니면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정치적 문제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얽히고 섥혀서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주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나의 가정, 직장의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나에게 유익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나의 일들을 주관하시는가? 과연 어떤 분이 역사의 모든 일들을 이끌어 가지는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감안해서 적절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길로 그의 아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성령으로 주장하시는 길은 내가 사는 길이냐 편한 길이냐가 아니라 주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하지 말고 나의 운명 전체가, 나의 살고 죽는 문제가 몽땅 주님의 손에 있음을 그대로 인정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자를 예수 믿는 자라고 합니다(1998.4.5).
사도행전 마흔 번째 강론
부활 신앙
사도행전 26:19-29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20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21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26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7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한국 교회는 해마다 춘분이 지난후 만월(滿月) 그 다음 주일을 정하여 부활절이라는 절기로 지킵니다. 과연 일년에 한번씩 부활절을 지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니 우리도 나중에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믿음을 갖자는 다짐의 반복입니다. 메시지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교인들의 마음도 부활절 특별헌금을 한번하고 계란을 나누는 행사를 가지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반복이 계속되어지는 한 부활절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참신하고 획기적인 부활절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목회자들은 고심합니다. 그 고민의 흔적들은 교회들마다 각양각색입니다. ‘총동원 전도’ 혹은 ‘온가족 출석’이라는 상품(?)을 곁들이거나 아니면 참신하고 톡톡 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부활절이라는 절기가 식상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주일에 무엇인가 색다른 프로그램들을 도입해야 의미가 있는 모임이 된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가 하는 것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일년에 한 번 정도 의미가 있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활이 일년에 한 번 정도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모두 헛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고전 15:14,17). 그러니 일년에 한 번 부활절을 지키고 의미를 되새기는 정도가 아니라 항상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속에서 사는 부활 신앙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한 차례로 한정해서 부활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도 진부함을 없애려고 해마다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고안해서 부활절과 연결시켜야 의미있는 부활절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부활절을 기념하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못믿고 싶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을 일년에 한 번으로 한정해서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기념하는 것 아닙니까? 마치 제사 기일처럼 여기듯이 말입니다. 이쯤 말하면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은 왜 모든 절기들을 부정하는가? 구약에도 절기를 하나님께서 주셨고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했잖아!’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면 이미 부활 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부활절을 부정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항상 매일매일이 부활절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절기를 통해 신앙이 성장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기라는 율법을 주어서 지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항상 어기고 자기들 유익되는 쪽으로 변개시켜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구약 성경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절기라는 율법도 이스라엘이 완벽하게 지켜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로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가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기 자랑을 위한 간증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지 않으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율법을 가지고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 했고 교회를 없애려고 했는데 부활의 주님께서 바울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2,23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그러자 바울 사도의 선포를 들은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24절). 실로 베스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25:19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고 아그립바 왕에게 보고합니다. 도무지 베스도 자신에게는 그것이 아무 유익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싫어하였습니다. 관심이 없든지 싫어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안믿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것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처음부터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2:23-32, 3:14-15, 4:10 등). 유대인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4:1,2)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전하는 부활이라는 것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그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4:7의 말씀을 보면, 공회에 사도들을 붙잡아 와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은 죽고 없는데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렇게 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단순히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계속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으로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며 계속 일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들이 주도하여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 계속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박된 채로 여기 이 자리에까지 있게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깨닫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이 자리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나 또는 전하게 하시는 분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신은 전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이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가로막고 주님의 복음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바울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과거에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과 교회의 일을 무로 돌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셨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결박된 채로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박당한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나 불편한 것이나 더 나아가서 고난이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재판받으셨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연합된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고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입니까? 바울과 같이 결박된 모습으로라도 복음을 드러내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쉽게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쉽게 아무렇게나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이라는 현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 나의 환경이 좋으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내 남편이 건강하고 자식들 별 문제가 없으니까 안일한 생각에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넘겨짚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붙잡고 계셨기 때문에 결박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에게서 우리를 붙잡고 계신 것이 능력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장악하고 계실 때에 우리는 복음을 복음답게, 주님의 주님되심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알지 못하는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이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볼 때에는 바울을 미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저쪽 세상에 있는 사람이 볼 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이 미친 것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금란교회 김홍도목사의 비리가 MBC를 통해 방영되었다고 금란교회 교인들이 방송국을 에워싸고 시위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PC통신에서도 굉장히 시끄럽습니다. 대부분의 의견을 보면 MBC방송국이 기독교를 왜곡보도하고 탄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김홍도 목사의 재산과 여자 문제에 대한 비리가 있다 없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사의 비리를 공개적으로 MBC가 다룬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금란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가 과연 누구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백일하에 다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금란교회는 교인수를 8만여명으로 성장시켜준 김홍도 목사를 믿고 있었고, 한국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사건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시 십자가로 방향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 안에서, 주님 안에서 볼 때에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날마다 십자가를 보며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능한 것임을 다시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먼 미래에 나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부활 세계 안에 살고 있음을 말씀으로 확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죽음이 있는 이 땅에 죽음이 없는 새 생명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같이 이런 결박된 모습이라 할지라도 매일 죽고 새롭게 살려짐을 당하는 것을 경험하는 신자라면 세상의 죽음이 두렵지 않은 존재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활 신앙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란 새롭게 부활절에 대한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고 해서 새롭게 고취되거나 없었던 믿음을 새로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란 날마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살려줌을 받아서 그냥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넘어져도 실패해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생애 전체가 살아 계신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사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 자는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들이 듣든지 안듣든지 주님의 복음만을 전할뿐입니다(1998.4.12).
사도행전 마흔 한 번째 강론
구원
사도행전 27:9-26
“9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11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현대인들의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습니다. 나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고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 광고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TV광고에서도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을 가만히 보면 모든 것들을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광고하는 물건을 구입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또 하나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유혹들을 얼마나 적절히 잘 유용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오늘날 한국 교회 속에서도 그대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세상에서 하는 광고 방식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항상 편안한 교회라는 인식이 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의 실내 장식도 최대한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되도록 꾸밉니다. 될 수 있으면 고난이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이야기하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혹에 매료되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따로 가지고 교회를 찾습니다. 예배당에 나오면서 주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목표와 일치하는가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채워줄 수 있는가를 따집니다. 그 목표는 이 땅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얼마나 누리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으면서 그런 분위기에 자신을 맡기고 교회 안에서만큼은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감에 젖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을 이런 세상적인 차원으로 오해하도록 광고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달리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행복에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일부 교회들에서는 억지로 기쁨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일부러 즐거움을 가지고 살면 예수 믿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 일환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세미나를 열어 주는 것입니다. 가정에 즐거움이 있고 행복감에 젖어 살면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이란 그런 것에 있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고난과 어려움이 제거된 상태가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제거된 상태라고 할지라도 주님과 더불어 거하지 못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이란 이런 점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심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가 로마로 가는 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서 심하게 고생을 합니다. 왜 이런 고생을 바울이 당해야 합니까? 세상 모든 만물과 자연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런 어려움을 왜 당하게 하십니까? 조금 편하게 로마로 가게 하실 수도 있는데 이런 고생을 하게 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사건을 전개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가 사람들을 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많은 타격과 손해가 있으리라”(10절).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항해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말을 배에 있는 사람들이 왜 들어야 합니까?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비범하게 보인다든지 특별하게 보이는 구석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고 있는 상태인데 누가 바울의 말을 듣겠습니까?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13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항해하기에 좋은 날씨였습니다. 자기들의 경험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짐을 바다에 다 던져 버립니다. 태풍을 만났을 때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전에 태풍이 왔을 때에 했던 대로 배의 물건을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20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산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바울 사도가 사람들 가운데 서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하는 것을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22-25절).
2년여 전에 주님은 바울에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행 23:11).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 이러한 주님의 뜻 때문에 바울의 일행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은 바울의 사명과 결탁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바울을 호송하는 자들과 또한 그 일행들의 목숨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바울과 바울의 일행들의 목숨을 보호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축복하는가 저주하는가 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으로 약속 안에 있는 자와 약속 밖에 있는 자로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가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떤 길을 가셨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하셨습니다(막 10:45).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었고 자기 백성들을 천국에 두시는 유일한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란 반드시 고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35절 말씀을 보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주셨던 최후의 만찬(눅 22:19)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의 식탁이 예수님의 만찬을 기념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했다고 본문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니라 ”(눅 23:44,45)는 표현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주님이 이루어 내십니다. 바울로 하여금 로마에까지 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약속의 성취는 많은 환난을 통과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바울의 생애 속에, 오늘 본문의 사건 속에 담아서 메시지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시면서 당하셨던 그 고난을 지금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고 있는 사건 속에 그대로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의미를 바울의 생애 속에 담아 내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의 일행이 배에서 살고 죽는 문제를 본문 20, 32, 34, 43, 44절에서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주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유대인들의 수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십자가로 반드시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행 14:2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저주하지 아니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환난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나의 행복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한 새로운 생명이요 새로운 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을 전혀 가지지 못할 때까지 주님께서는 바울의 배를 뒤흔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위기에서 구해주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하나님은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하나님입니다. 「초인생활」(베어드 T. 스폴딩著/정신세계사刊)이라는 책에 보면 히말라야 산을 근처에 인도나 티벳 지역에 수많은 성자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성자들의 삶을 보면 그야말로 기적을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물 위를 걷고, 병자를 치료하고, 먹는 양식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 내는 것 등등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저자가 직접 경험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성자들이 하는 말들도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은 전부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속에 내재화해서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라면 얼마든지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도(修道)를 통해 신과 교통만 제대로 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이런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고난과 어려움을 제거해 보려는 심보가 우리의 종교성입니다. 그 종교적 본성을 억누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이적들이 성경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 밖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계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태풍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살아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애, 그가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구원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은혜에 날마다 무릎꿇고 복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는다면 오늘 나의 행복에 연연하지 마시고 십자가의 구원에 자신을 맡기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사는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1998.4.19).
사도행전 마흔 두 번째 강론
따르는 표적
사도행전 28:1-10
“1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5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7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신앙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통 신앙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를 잘하느냐 또는 얼마나 능력있는 은사를 받았는가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마태복음 7:15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열매로 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란 무엇입니까?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신 그 바로 다음 구절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신앙의 열매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무조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믿고 행하면 된다고 오해하고 있고 또한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비롯한 모든 신약의 말씀들은 새로운 율법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라는 것으로 주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고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다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이 행하는 많은 권능,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이 모든 것들을 비록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는 무관한 불법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의미를 말씀에 근거해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4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뜻을 무시한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고 놀라운 능력을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생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열매란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만들어 내고 나타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의 모든 의지를 포기하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도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적을 나태내지 않아도, 흔히 말하는 신기한 능력들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능력이 되는 것인 줄 믿어진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 사도에 관한 사건은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는데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5절)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아무 이적도 바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바울에게 나타난 이런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일행은 파선하여 멜리데 섬에 가까스로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석달을 머물게 됩니다(11절). 그래서 로마로 가는 것이 그만큼 지체되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일들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들은 분명 로마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 멜리데 섬에서 그토록 오래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까? 율리오는 죄수들을 데리고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게 할 의무가 있었는데 왜 로마로 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습니까?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에 체류한 것이 로마에 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바울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죄수로서 로마에 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살인한 자기의 죄에 대한 대가로서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그곳 사람들의 상식으로서는 독사에게 물리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고 멜리데 섬 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생각했습니다(6절). 그래서 그 섬에서 제일 높은 보블리오라는 사람의 영접을 받게 되고 바울은 보블리오의 부친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보고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 바울이 이적을 베풀어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바울을 통해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바울이 가면서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16장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7,18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대로 아무 때나 하나님을 시험해도 무방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내가 독을 마시는데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하고 병자에게 안수를 하면 낫게 해 주셔야 한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는 말은 믿는 자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5에 의하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실제적으로 누가 하시느냐 하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것입니다(막 16:20,21).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자기의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을 주님께서 챙기실 것입니다. 따르는 표적을 통해 복음을 막는 어떤 방해 요소라도 철저히 제거해 나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는 자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방해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게 물려도 전혀 해를 당하지 않았던 것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바다에서 건짐을 받은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바다에서 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안에 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 이적을 보이시고 보블리오의 부친을 낫게 하셔서 그들이 로마에까지 가는 모든 편의를 제공받게 하셨습니다. 결코 바다의 풍랑이나 세상의 어떤 조건이 바울을 통해 로마에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는 주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에게서 이런 능력이 나타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악함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경험에 의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바울을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것 등등 인간들은 전부 자기 중심에서 바울을 죄수로 끌고 가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만 주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에 복음을 증거하시는 주님 자신의 일을 중심으로 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 사도와 같은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입장에서 주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한 죄수를 로마에까지 호송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로마에까지 증거하시는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 때문에 주님은 바울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런 계시적 의미로 이 본문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자신의 복음을 위해서 믿는 자들을 이렇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호하신다는 것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아 무슨 능력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의 복음 때문에 우리를 이런 형편에 두실 수도 있고, 저런 형편에 두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계시적 차원에서 주어지는 사건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까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에게서 나타난 표적들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애초부터 주님께서 로마로 가는 여정을 어렵게 하시지를 말지 왜 이렇게 배가 파선하게 하고 독사에 물리게 하시며 멜리데 섬에서 오래도록 지체하게 하시는가 하는 의문을 우리는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렇게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철저히 실패하는 것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보여주시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열매를 내게서 신기한 이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이 주어진 것으로 감사합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이 죄를 이기는 것이 됨을 말씀 안에서 확인합시다. 오늘날 우리에게 따르는 표적이란 오직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일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못이겨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1998.5.3).
사도행전 마흔 세 번째 강론
이스라엘의 소망
사도행전 28:16-23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20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23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세상에 지겹지 않은 일이 있습니까? 김종환이라는 가수가 부른 “21세기에 19세기 사랑” 이라는 노랫말에 “세상은 너무 지겨워 하지만 너만은 지겹지가 않아…”라고 이성간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연인 사이의 관계가 그토록 날마다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지겹지 않은 것입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말합니다. 결혼의 첫째 조건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을 전제로 한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으로 서로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결혼하면 지겨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식에서 기도할 때에는 항상 결혼을 통해 먼저 모든 인간적인 환상이 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그래야 예수를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연인 간의 사랑이라도 결코 세상에서의 지겨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사랑이 일순간적인 진통제로서의 처방은 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에 대한 대안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전 1:9). 무슨 일이든지 세상의 일은 반복 속에서 지겨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 대하는 것에는 새로움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내 싫증이 나고 지겨움을 느끼는 것이 이 땅의 일입니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날마다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도 지겨운 것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하며 일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화끈하고 새롭고 신선하며 충격적인 것을 교회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선한 것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의 지혜와 힘으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날마다 듣는 십자가인데도 항상 새롭게 느껴지고 다시 보여지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 모일 수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자가 신자입니다.
우리가 바울 사도의 일생을 보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바울 사도를 특별하게 보려고 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의 생애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합니다. 일상적인 한 신자의 삶입니다. 특별하다면 주님께서 바울의 생애를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 외에는 우리가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생애를 통해 주께서 계시하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석달을 거하다가 다시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됩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거기서 여의도 광장과 같은 곳에서 수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심령대부흥회를 개최한 것도 아니고 병을 고쳐주면서 은사집회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 기도회를 하거나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머드 집회를 구상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거대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사람을 모으며 기독교를 크게 과시하는 일을 벌이지도 않으면서 로마에까지 그토록 오기를 원했던 바울 사도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아니 로마에까지 오도록 하신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17절에 의하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은 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23절에 보면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에까지 왔기 때문에 거기서 받는 대접이 융숭했다든지 아니면 가이사를 만날 수 있었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을 지키는 한 군사와 따로 있도록 허락되어서 거기서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울이 로마에 간 것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사도행전의 전체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충격이 오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처음 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토록 주님께서 바울을 로마에까지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셔 놓고 실제로 로마에 도착한 후에는 거대한 프로젝트 하나도 없이 죄수로서 그대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은 뭔가 주님답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바울 사도에 대하여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가게 된 것을 전도 혹은 선교 여행이라는 차원에서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기쁨과 감사와 순종이 있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그는 많은 학문을 한 사람입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인정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더구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그가 노년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의 생애는 실패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많은 학문, 이제까지 베풀었던 이적, 하나님을 향한 열심,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주님을 위한 무슨 유익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인들의 높은 사람들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 “이러하므로 너희는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20절)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바울이 닦아왔던 학문입니까? 율법에 대한 열심이었습니까? 바리새인이라는 사회적인 지위나 유대인 중의 베냐민 지파라는 가문이나 혈통이었습니까? 만약 그러한 것들이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다면 계속 율법을 고수하며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내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가졌던 모든 세상적인 배경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빌 3:8).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바울은 분명 모든 율법의 말씀, 즉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증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바 약속,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결국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오늘날 교회의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고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입니까? 율법을 가지고 지키며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공입니까? 십자가가 성공입니까? 십자가만 성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으로 성공하셨습니다. 그 성공을 나의 성공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신자요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지고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공과 실패는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는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소망은 곧 교회의 소망입니다. 교회라는 주님의 몸의 소망은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주님은 주님 자신의 몸만 남기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몸에 걸맞지 않은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곧 교회의 고백이 되며 또한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매인 바 되어도 괜찮고 자유한 바 되어도 괜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불만이 있습니까?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의 순종만 있을 따름입니다.
전도서 3:11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1-14).
사람은 본래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세상적인 것으로 잡다하게 채워넣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겨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선을 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본래 가져야 할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존재로 지극히 평범하게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많은 학문을 하고 율법에 열심이 있었던 바울을 주님께서 어떻게 묶어 놓으셨던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그리고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동기와 목적의 유일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998.5.10).
사도행전 마흔 네 번째 강론
복음의 비밀성
사도행전 28:23-28
“23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일반적으로 교인들이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기도 응답을 받았다느니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베푸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주신 것에는 원인 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인이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직장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원인을 자기 쪽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동에 따라 복을 주고 저주를 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하나님입니까? 과연 그분이 하나님 맞습니까? 인간의 행동에 따라 움직여지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의 행동으로 조종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닌다,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이야기가 막힙니다.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마치 다른 나라 사람하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거의 다가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다 같은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만 제각기 다른 예수를 믿으며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아니 얼마든지 다른 예수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의 권세, 즉 마귀의 권세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본성이 항상 다른 예수를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처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어도 괜찮다는 하나님을 믿도록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였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부터는 마귀의 권세에 매여 항상 그의 종노릇을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상징인 에덴이라는 곳은 인간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3:17이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 -19).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에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더 이상 희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땅 전체가 저주 아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죽었을 때 화장(火葬)을 하면 안되고 반드시 땅에 묻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다시 흙으로 되돌리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창조의 상태를 무효로 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땅 전체가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이 한군데 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입니다. 창조의 상태를 무효로 돌리시면서도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은 처음 창조를 무효로 돌리시고 여인의 아들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이 이 땅에 내려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것이 저주의 땅에 들려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는 복음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비밀입니다. 구원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복음이란 하늘의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 결코 공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복음을 이야기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의 노력들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가고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 여인의 후손을 통한 새로운 창조, 하늘의 생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는 우리의 모든 노력들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하나님 편에서 무엇을 하셨고 그분이 무엇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모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그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지 않고, 성경말씀을 통해 나타내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보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23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복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반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24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구약 선지서의 한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다름 아닌 이사야 6:9,10의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를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26,27절).
이 말씀을 이사야 선지서의 문맥에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부름을 받은 상황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백성이 다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받을 자만 받고 구원받지 못할, 즉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자는 철저히 구원받지 못하도록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왜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들을 철저히 황폐하게 하고 남은 자만 구원하시는데 그 남은 자는 이스라엘 중에 어떤 자가 아니라 본래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하실 언약의 후손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언약의 후손을 “거룩한 씨”(사 6:1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거룩한 씨만 남긴다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불순종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하셨습니다(롬 5:17-1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제 그의 지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고전 6:15, 엡 5:30).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어 있는 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하나님께서 곧장 하늘나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살게 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것이나 바울 사도를 로마에 보내신 것이나 같은 차원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나타내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성령을 받은 자인가? 혹은 누가 복음을 알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인가를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되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주님 편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분됨으로 죄악된 세상임을 확인하게 되고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이 베풀어지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하게 해놓고 선택된 자만 예수가 믿어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로운 하늘의 생명을 결코 값싸게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택하지 않은 자는 구원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성(秘密性)입니다.
마태복음 13:10-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이렇게 나타내셨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자기 백성들에게만 생명이 주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하물며 우리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말씀 선포를 하되 가려서 하고 아무나 구원받도록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선포는 항상 어디서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면서 내가 상대방을 설득시켜서 예수 믿도록 만들려고 해서도 안되고 또한 내가 전하는 것으로 상대방이 예수 믿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이미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로 확인하게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란, 복음 선포입니다. 저 쪽과 이 쪽을 분리해 내는 작업입니다. 상대방에게 우리 교회나 목사를 자랑해서 데리고 나와 예배당을 채우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말씀만 선포하면 주님께 속한 자와 아닌 자가 구분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까지 가서 그것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갈라내고 분리되게 하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까지 이르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으로 어떻게 자기 백성인 자와 아닌 자를 골라내시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것이 말씀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25절).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는 디모데전서 2:4의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이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4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구원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지만 인간의 죄악된 상태가 당연히 저주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범죄 이후에 약속을 주시며 그 약속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충분히 우리의 입을 막는 것이 됩니다. 그 은혜에 할 말이 없이 굴복되고 굴복되었기 때문에 오늘도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며 그분의 복음의 선포하면서 살 수밖에 없음이 인정된 자가 예수 믿는 자입니다(1998.5.17).
사도행전 마흔 다섯 번째 강론
사도행전의 끝
사도행전 28:30-31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이나 실력을 힘으로 삼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식에 대한 실력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가진 실력만큼이나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힘이나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실력을 쌓아 남보다 한 발 앞서 가려고 합니다. 실력이 안되면 다른 사람의 노력이나 실력을 도용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목표한 결과만 만들어 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에 치중한다는 말은 실적을 중요시하고 따진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교회를 키우는 목회 실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신앙에 대한 실력이 있어야 다른 교인들 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서로 남보다 나은 실력을 가지고 다른 교인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주일에 모이면 서로 누가 나은가 하는 실력의 경주장 같습니다. 성가대는 노래 실력의 경주장입니다. 교회 내의 각 모임들은 천국 상급을 누가 많이 쌓는가 하는 경주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는 복음을 아는 자가 이렇게 없는가, 정말로 교회다운 교회가 이렇게 없는가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란 인간의 실력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란 주님이 주신 결과를 받아 누리는 모임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간이 복음을 전해서 실적이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이고 신자는 그것을 누리고 증거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얼마나 아는가 또는 교회를 얼마나 부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하는 지식적 차원에서 실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상의 것을 버리도록 요구하십니다. 세상적인 것을 부인함으로서 주님의 증인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은 이렇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것이 사도행전의 끝입니다.
사도행전의 시작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성령이 불 같이 임하고 능력을 받아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던 사도행전의 시작과는 반대로 사도행전의 끝은 바울이 셋집에 유하며 죄수의 몸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숫적으로 부흥된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성령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된 교회, 사도들의 위대성, 성령의 능력에 대한 결과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니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저 바울 사도가 죄수로서 복음을 전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도행전의 초점은 사도들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성령님에 대한 것도 아니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비록 바울 사도는 죄수의 몸으로 매여있고 감금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복음은 매일 수 없고 방해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을 묶어 놓을 수 있는 세력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가능한 것입니까?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이 시작하셨고, 주님께서 계속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주님의 복음을 단절시키거나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주님께서 마무리를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사도행전이 기록될 초대교회의 상황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에 관한 한, 즉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것에 관한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흔히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말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교회의 일을 가지고 사도행전으로 이어서 계속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붙잡고 일하시는 그 일하심이 계속되고 있고, 오늘날에도 그 주님의 일을 방해할 어떤 세력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6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장터에 노는 아이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세례 요한이 금식하니까 유대인들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고,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먹고 마시니까 먹는 것을 탐하고 술을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마 11:18,19).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신 중요한 말씀이 19절 하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 7:35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란 무엇을 말합니까? 구약에서 지혜는 ‘여호와(주)를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신약에서 예수님 자신을 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지혜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일을 행하고, 누가복음의 표현대로 하자면 지혜가 자기 자녀를 두고 그들로 인하여 옳다함을 인정받는다고 했습니다.
즉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말씀을 연관시켜서 생각하자면,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동조하든 하지 않든 예수님 홀로 독자적으로 자기 자녀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하여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그들로 인하여 주님만 옳고 진리임을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6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를 무엇을 비유할꼬”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세대는 비록 예수님을 진리로 혹은 하나님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며 그들로 인하여 진리가 받아들여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으로 복음을 아무도 받아들이는 자가 없는 것 같으나 결코 복음이 이 세상에 선포되어져 무의미하게 되거나 허공을 치는 메아리 같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마귀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방해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방해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를 그 나라에 참여시켜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아프지 않아야 되고 만사형통의 축복이 내게 주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내가 좋지 않은 형편에 처한 것으로 주님의 복음이 가리워지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욕심입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하는 요소가 됩니다. 복음 때문에 내가 병들 수 있고, 망하는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매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복음은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내가 일하지 않아도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십니다. 우리더러 어떤 실적을 만들어 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전도를 해서 예배당을 채우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은혜에 나를 참여시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도행전 강론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점검합시다. 주성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만 증거하고 가르칩니까? 그것 때문에 매인바 되어도 괜찮고 망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그만 두라고 하시는 뜻이 나타난다면 얼마든지 이제까지 해 온 것을 공로로 생각하지 않고 그만둘 수 있습니까?(1998.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