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일군의 고백 (고전3:4-9)
참된 일군의 고백 (고전3:4-9)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군들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자세를 구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차라리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음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6-27)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항상 잊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할 몇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신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단지 심고 물을 준 것뿐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항상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으로 일하시게 하는 귀한 고백입니다.
스룹바벨 총독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안팎으로 난관에 봉착했을 때도 스갸랴 선지자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슥4:7)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산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사52:7에도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믿으면 그 난제가 산처럼 커도 다 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불가능이 없어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믿음 없어 하나님의 일의 방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만이 위대하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 장애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2.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눅17:10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해도 종은 종입니다. 당시의 종들은 주인을 위해서 봉사하고도 그 봉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가 무슨 벼슬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함을 받은 빚진 죄인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생명 바쳐 충성해도 모자랄 자입니다.
요즘 기독교노조가 생겨나 성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노조에게 물었습니다. “기독교노조가 과연 성경적이냐? 사명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정당한 보수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이익단체를 결성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그러자 노조에서는 지금 교회가 타락하여 당회장이 고액 억대 연봉을 받고 부교역자들을 직원 부리듯 채용하는 처지에서 어떻게 사명의 논리로 접근할 수 있겠느냐 교회만 개혁되면 언제든지 사라지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기업적인 교회가 얼마나 되며 과연 그렇다면 이것도 저것도 다 잘못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상이 타락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위치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본래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전1:26-8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쓸모없는 나 같은 사람들을 불러 성령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주어 귀히 사용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기 공로의식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 대신 "주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 무익한 종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쓰임 받은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합니다.
3.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딤전1:15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했습니다.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한 후에도 바울은 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에) 했습니다.
바울이 이신득의의 진리를 담은 로마서를 쓴 사람인데 그가 믿음으로 의를 얻지 못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했겠습니까? 이것은 과거의 잘못을 뼈아프게 반성하며 그런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과 아울러 다시는 죄악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 공로로 의인 되었지만 나는 의인이라고 외치고만 다니는 것은 한 편만 알고 한 편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히 “나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인입니다. 지금도 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는 죄인 괴수입니다.” 라고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4.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는 고백입니다.
사6:8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이 고백은 선지자 이사야의 부름 받을 때의 고백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의 소리를 들었고 그 중심을 헤아린 그는 주님의 뜻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에게는 항상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가 쓰임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소명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는 마음의 소원을 주시는 경우입니다. 유달리 어떤 일에 관심이 크다면 혹시 그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명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관심이 어떤 때는 그 일에 대한 비판 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 일에 관심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비판만 마시고 거기 들어가서 충성을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편하고 남도 편하지 그렇지 않으면 함께 괴롭습니다. 어떤 형태로 주님의 소원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혹은 아무런 소원도 없어도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내 앞에 다가오는 형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내가 여기 준비 되어 있나이다. 나에게 무엇을 시키든지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치 소가 쟁기를 잡은 자의 뜻대로 가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철저히 대기 상태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매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시간시간 하나님께서 일을 만나게 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일군은 고백도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한 것 뿐입니다.” “저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고백을 항상 드리는 참된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