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믿음으로 자라자 (벧후1:5-7)
완전한 믿음으로 자라자 (벧후1:5-7)
이 시간에 “완전한 믿음으로 자라자”라는 제목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굴까요? 그리고 최고의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믿음의 부자가 곧 가장 부러운 사람이요 최고의 부자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처럼 육신만 잘 되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더욱 완전한 믿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목표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 그런 하나님 닮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완전한 믿음으로 자라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 5-7절에 그 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1. 먼저 더욱 강한 믿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그랬습니다. 더욱 힘써서 믿음에 서자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은 확신 있는 믿음, 열심 있는 믿음, 그리고 말씀을 굳게 지키는 실천하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사자굴 앞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그치지 않았던 다니엘처럼, 금 신상에 절하지 않다가 풀무불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생명 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혹은 기적이 나타나는 믿음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메롤탈이란 사람의 간증입니다. 메롤탈이 삼촌하고 시골 마을에 긴급히 가야할 상황이 생겼는데 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는데 삼촌이 기도하고 일어서더니 맨몸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더랍니다. 뛰어가서 말리니 삼촌 말이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야 만일 내가 여기서 죽거든 복음을 전하다 죽었다고 전해 주게” 하며 성큼 성큼 강물 속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강 한 복판에서도 강물은 무릎 위를 넘지 않더랍니다. 그런데 그 믿음도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러므로 더 온전해 지려면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합니다.
믿음이 아무리 천국을 가게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지만 덕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전도 길을 막습니다. 최근 오마이뉴스의 어떤 기자가 서울 관악산의 바위에 페인트로 십자가가 표시된 것을 “관악산 바위에 그려놓은 빗나간 신앙심”이라는 제목으로 “서울시민들이 자주 찾는 관악산 암벽에 흰색 페인트로 십자가와 만(卍)자가 그려져 있어 등반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고 고발한 것을 보았습니다. 자연훼손이라면 불교를 따라갈 것이 없겠지만 기독교 십자가만 사진으로 보여준 것 유감스러웠지만 깨닫기는 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덕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우리가 우상을 반대하지만 불교 사찰에 가서 훼불사건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사회에 알려지면 전도길가지 다 막힙니다. 우리 성도들은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사회생활도 모든 면에서 덕스러워야 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해질 때 좀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더 완전한 믿음을 위해서 이제 덕에도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덕을 갖춘 믿음일지라도 지식이 없다면 아무에게나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좋다고 다 됩니까? 지식이 없으면 이단들이 끌고 가버립니다. 아무리 나는 이단에 안 넘어가리라 해도 지식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들으면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장차 에베소 교회에 이단이 나타날 것을 예견하면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9-31) 그러면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지식이 있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분별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4. 더 완전해 지려면 지식에도 절제를 더 더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지식이 많으면 교만해지기 쉽고 남을 무시하고 함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배우고 명문 학교 다니고 전문적인 지식이 풍부함은 장점인과 동시에 스스로 패망의 선봉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이성을 흰 말로 욕망과 본능을 검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성의 흰 말이 수레를 끌어야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할 때 하고 그만 둘 때 그만 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란 브레이크와 같이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자동차가아무리 좋아도 브레이크가 없으면 온전한 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안 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절제가 있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더욱 견고하고 완전한 믿음이 됩니다.
4. 절제가 있어도 거기에 인내를 더하지 않으면 역시 불완전합니다.
왜 그럴까요? 절제하고 있으면 사람이 스트레스에 빠지게 되요. 그러므로 고난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인내의 마음을 기르지 않으면 스스로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하고 싶다고 말 다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다 보니 스스로 큰 스트레스에 빠집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성자라는 어느 목사님도 노년에 치매기가 생길 때는 일생 밀렸던 스트레스가 무이식 중에 밀려나와 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에 인내를 더하지 않으면 큰 시험에 빠집니다. 즉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을 오히려 즐기고 핍박을 즐기고 무시당하고 배척당함을 기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절제 얼마나 불행스럽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할 때 행복해 집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했습니다. 이 인내에 도달한 성도라면 보통 신앙이 아닌 매우 완전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5. 그 다음 인내에 그치지 말고 경건을 또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경건은 하나님 두려워 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감사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극도에 달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런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두렵지 않았으면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두렵고 지옥이 두렵기 때문에 참고 참고 참습니다.
인내만 있고 경건이 없으면 두려운 줄 모르고 함부로 행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옳은 일을 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개혁한다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끌어내리고 저 사람 끌어내리고 때리고 부수는 개혁이라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아름다운 명분과 이름으로라도 함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모함해서는 안 됩니다. 침소봉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이기려고 술수를 써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십자가를 져도 내가 지고 죽어도 내가 죽고 잡혀가도 내가 잡혀가겠다고 고난을 각오한 인내의 대단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경건이 없으니 온갖 수라장이 됩니다. 사실 믿음 나쁜 사람들은 바라나 보고 있지 그러지 않습니다. 모두 교회에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그럽니다. 그러나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하다가 오히려 큰 죄를 짓고 실족 당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접한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저는 의로운 사람이라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정 견디지 못하면 가만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에도 손에 피를 묻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시면 결코 실족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믿음 좋아도 성도들에 대해서 형제의식이 없으면 모두가 남일 뿐입니다. 혼자만 잘 믿는 것이지 아무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여 민족과 형제를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만큼 장성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 형제우애는 믿음의 형제일 수도 있고 육신의 형제들일 수도 있습니다. 내 가족도 남도 모두 남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이 정신 갖고 산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입니까?
그리고 마지막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앞서 형제 우애가 인간관계의 사랑인 필레오의 사랑이라면 여기 더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필레오의 사랑은 한계가 있지만 아가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장할 때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완전한 믿음이 됩니다. 이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그 믿음은 비로소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써 큰 믿음을 가집시다. 그러나 믿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믿음에 덕을 거기에 지식을 또 거기에 절제를 또 거기에 인내를 또 거기에 경건을 또 거기에 형제 우애를 더하시고 거기에 사랑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완전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