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한 알의 밀알처럼 (요12:24-26)

공 상희 2009. 2. 26. 14:47

한 알의 밀알처럼 (요12:24-26)

(요약) 한 알의 밀알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일 뿐이다. 우리가 죽으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와 평안의 열매를 맺는다. 내가 죽으면 영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어야 할 나란 육체가 아니라 죄를 가리킨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신다. 반대로 내가 살아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심처럼 우리들도 그 본을 받도록 하자.


(설교)
요즘 추수가 막바지에 도달한 것 같은데 많이 거두셨습니까? 우리 농부들은 이 알곡을 위해서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수고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농부 되어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알곡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바쁘신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죽정이가 아닌 천국의 알곡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우리들이 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우리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수많은 생명들을 구원하시고 열매 맺게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지 않으셨던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곡식이 땅에 떨어져 껍질이 썩고 물러져 형체가 이글어져야 싹이 나서 열매를 맺을 수 있듯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 연약한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중앙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습니다. 이 선교사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들을 죽인다면 그 마을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채로 개처럼 끌려 다니며 사지가 찢기며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총알이 열 발이나 들어 있는 총이 발견되었고 이 사실을 안 원주민들은 그 때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육체로 죽는 일에도 열매가 있지만 우리가 그냥 겸손과 순종함으로 죽어만 져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여기시고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내가 죽지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죽어 노력한 사람을 앞지를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귀하게 쓰임 받음 모든 성도들은 다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세상에 가장 큰 복은 잘 죽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도 잘 죽을 때 복이 있지만 진정 죽을 내 완악함이 죽어지면 이 만큼 더 복된 사람은 없습니다.

2. 내가 죽으면 영생하게 됩니다.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셨습니다.

여기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말고 미워하라 했는데 생명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야 할 생명과 죽어야 할 생명이 그것입니다. 살아야 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죽일 필요가 없는 생명일 뿐 아니라 죽지도 않는 생명입니다. 또 육체의 생명도 우리가 돌보아야 할 죽여서는 안 될 생명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이 생명도 바칠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이 생명 죽인다고 영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죽여야 할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옛사람의 죄의 생명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육체를 학대하고 죽여도 결코 신령해지지 않지만 이 죄의 생명을 죽이면 신령해 집니다. 은혜로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의 죄악 교만 불순종 게으름 탐욕 등 온갖 죄악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4:10-11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했던 것입니다. 내가 안 죽고 어떻게 부활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계14:13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옛사람이 죽어 생명이 왕 노릇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십니다.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귀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귀히 여김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말씀과 성령으로 죽어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김익두를 쓰신 것도 그만큼 철저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짐승들도 야생의 성질이 죽어 잘 길들여지면 귀히 쓰이듯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오시면서부터 그리고 삶 속에서 이미 죽으셨습니다. 마12:19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만약 사셨다면 자기를 잡으러 온 원수들에게 열두 령 즉 열두 사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죄와 상관조차 없이 죽으셨기에 온유하셨습니다.

어느 지역에 과일가게를 하는 장사가 있었습니다. 인근 어떤 교인이 자주 찾아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과일장사는 예수 믿을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찾아와 전도하면서 과일을 사 가는데 사갈 때마다 매번 과일 중에서 가장 작고 흠집이 있고 말라져 팔기 곤란한 것만 골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일장사는 귀찮은 중에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손님이 와서 또 과일을 삽니다. 그런데 그분도 작고 흠 있고 좋지 않은 것으로 골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당신도 저 교회 교인이에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은 과일장수는 그 다음 주일부터 자기 발로 교회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죽어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함이 아닐까요? 내가 죽어 내가 손해보고 내가 바보가 되고 내가 섬기고 희생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귀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매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열매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우리 주님 본받아 한 알의 밀알 되어 온전히 죽어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