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장 야이로로 본 위기극복 (막 5:21-43)
회당장 야이로로 본 위기극복 (막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 43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이 시간 “회당장 야이로로 본 위기극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다른 사람은 다 예수 믿어도 저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셨으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더 먼저 회개하고 믿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예로 세리와 창기들이 더 먼저 회개하였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은 세리나 창기보다 더 완악한 부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유대의 회당장 바리새인 야이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봐도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는 사람인데 성경을 보니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고 간구하여 죽은 딸을 살렸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화를 선언하실 만큼 외식적이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박해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완악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한 사람인 회당장 야이로가 사랑하는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는 위기 속에 예수 만나 위기를 극복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이의 상황도 그렇거니와 바리새인 야이로를 생각할 때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런 야이로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을까요?
1. 주님께로 찾아갔습니다.
22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기 위해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바리새인인 그가 주님을 찾아간 이유가 뭘까요? 사랑하는 딸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랑하는 어린 딸을 살려 내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에요.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그는 딸을 살려야겠다는 일념 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이것이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간 원동력이었습니다.
즉 그 일념 뿐이었기에 불치의 병이라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람들이 많아 주님 만나기 불가능할 거라고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자기 신분을 상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어떤 박해를 받는지 조차 치심치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가지 않았겠지요. 심사숙고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가 병을 고친다고 하니 죽어가는 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 앞에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찾은 동기를 연구하다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나왔음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은혜입니다. 진정 위기 가운데 있으면 살 길만 찾지 다른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 앞에 나오려면 다른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다, 안 계신다, 이거다, 저거다, 각자 자기 종교와 체면과 학식과 경험과 의로움과 게으름과 사업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나가지 않으려 합니다. 쥐꼬리만한 지식 가지고 교만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니 하나님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망령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정 인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망 없는 인생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 맛 저 맛을 보며 그런대로 살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도를 닦는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를 깨달을 수록 크게 깨우친 자라고 합니다. 깊은 시름 속에서 허무를 외치며 죽어가면 크게 깨달은 어마어마한 대승이 죽었다고 안타까워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 인생의 허무를 깨달았다면, 진정 인생공부를 했다면 참 생명의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는데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허무 속에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만족한 유대인들과 같습니다. 율법에서 자기를 깨닫고 예수 앞에 나아와야 함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 앞에 나갈 결정적인 이유를 일생 공부했지만 헛 공부한 것입니다. 살려면 다 내던지고 예수 앞에 나오세요.
그럼 어떻게 예수 앞에 나옵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을 때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일4:15에도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셨고,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셨습니다. 진정 인생공부했다면 회당장 야이로처럼 하나님 밖에는 살길이 없다고 나와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22절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우리는 이 구절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겸손을 봅니다. 당시 회당장은 백성들에게 덕망 높은 직책이었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회중에서 가장 탁월한 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무명의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당시 종교인들에게 박해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이목을 피해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이로는 무수한 대중 앞에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사랑하는 딸의 위급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사람의 시선이 문제입니까? 오해가 문제입니까? 체면이 문제입니까? 그런 이유는 다 사치스런 것일 뿐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어린 딸이니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위해 죽을 수는 없어도 부모는 자녀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서슴없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살려면 엎드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그래서 잠22:4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렘2:19에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삽니다. 겸손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뭐라도 되는 것처럼 거드름 피우고 교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진정 살고 싶으면 엎드려 하나님을 경외하세요. 예배하세요. 사랑하세요.
다윗은 왕이면서도 하나님을 왕이라 불렀습니다. 시5:2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그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늘 찬송했습니다. 시42:8에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랬기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어릴 때부터 성령 충만과 권능 받으려고 무척이도 헤맸습니다. 성경 속에서 그토록 헤맸지만 깨달음의 부족으로 알송달송 잘 모르겠어요. 여러 능력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서적을 탐독하였지만 이거다 하고 집어주지 못해요. 각종 집회에 다녔지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받는데 저는 왜 받지 못하는지, 그래서 날마다 엎드려 주세요. 주세요. 그러나 구하면 구할수록 능력은 더 멀리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내 욕망으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 내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했더니 은혜가 임했습니다.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고가 아닙니다. 겸손히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은혜는 위로부터 임합니다. 경외함 속에는 겸손도 들어 있고 회개도 들어 있고 말씀도 기도도 찬송도 열심도 사랑도 실천도 성화의 방편도 복락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생활 잘하면 은혜가 임합니다. 준비된 예배에 성령이 더욱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한국교회가 살려면 예배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형식과 의식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흥망성쇠가 걸린 생사의 문제입니다.
열 두 살 난 사랑하는 딸이 바로 우리 심령일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예배해 보세요.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해 보세요. 그러면 죽어가던 우리 심령이 살아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 것 같지 않던 우리 심령이 살아납니다. 행복해집니다. 강해집니다. 변화됩니다. 우리 심령이 소생합니다. 그러므로 살려면 예수 앞에 엎드리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회당장 야이로의 그 간절한 마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지금 나라의 위기도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계경제가 워낙 심각해서 불가능하다고요? 그래서 안 된다고요? 아무리 봐도 성경에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은 쓰여 있지 않아요. 인간의 생각부터 버리세요. 하나님 앞에 나오세요. 대통령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우리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예배를 회복하고 회개하며 또 구국의 기도로 모여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참으로 간단하고 또 간단한 것을 왜 어렵게 풀려고만 합니까? 이걸 못 믿는다면 무엇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이렇게 풀었어요. 예수 앞에 나오면 살아납니다.
3.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23-24절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려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많이 간구함은 그의 절박한 상황을 잘 암시합니다. 특히 “어린 딸” (뒤가트리온)이라는 낱말은 딸에 대한 사랑과 강한 애정을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부모의 심정이란 자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자기를 대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린 딸이 죽어가는데 어찌 예수님 앞에 가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구원해 달라고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 아버지의 생명 바치는 간절한 심정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바로 야이로의 심정으로 구하라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간절히 기도한 사람을 종합해 보면 모두 어떤 한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나도 브닌나에게 상처 받고 아들 낳는 것이 한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딸의 귀신들린 병 때문에 한을 가졌습니다. 눅 18장에 나오는 과부 역시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가졌습니다. 엘리야 역시 이세벨의 온갖 박해 속에 여호와 신앙 회복에 대한 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목숨 바쳐 기도했습니다. 천국은 진실만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이 진실의 도수에 도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정복음화를 원하십니까? 한을 가지세요. 교회의 부흥을 원하십니까? 한을 가지세요.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원하십니까? 한을 가지세요. 지금 기독교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싶습니까? 우리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하며 형통하길 원하십니까? 진정 원하시는 한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세요. 딸을 살리려 했던 야이로의 그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세요.
4. 지체되어도 실망치 않았습니다.
25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한 여자가 있어"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가슴 터지는 순간입니다. 지금 아이는 촌각을 다투며 죽어가고 있는데 가는 길에 지체되니 말입니다. 열두 해나 혈루증으로 앓았다면 곧 죽을 병도 아닌데 분초를 다투는 일을 가로막다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참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 대들고 싸우면 일은 다 그르치게 됩니다. 주님 하시는 일이 썩 맘에 들지 않아도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서는 참아야 합니다. 모두 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고전13:4-7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했습니다. 사랑 안에는 믿음도 소망도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녀를 사랑한다면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 처음에는 일이 지체됨에 심히 괴로웠지만 기다려 보니 큰 소망의 사건이 생깁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이 믿음으로 낫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12년 간 처참하게 병든 여인이 살았다면 열두 해 동안 잘 자라 오던 우리 아이가 낫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지체된 사건을 통해서 나도 믿으면 되겠구나, 딸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못마땅해 하며 대듭니까? 그러나 우리 소원이 지체된다 해도 소망 가운데 참아야 합니다. 더 믿음을 온전케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믿음을 단련시키는 연단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5:3-4에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다른 일로 지체된다고 불평해 마세요. 나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바라던 소망을 이루기 위한 과정입니다. 요셉처럼 믿음으로 현실에 최선을 다하세요. 하나님이 언제 쓰시든 쓰실테니까 준비만 잘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앞날을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인내해야 합니다.
5. 주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35-36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회당장의 집에서 날아온 이 비보는 야이로의 마음을 강타하기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비보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참 믿음이 좋구나 할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어린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보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믿고 싶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통곡소리가 들립니다. 아이가 호흡을 멈추고 창백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딸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기대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보다 환경보다 성경을 더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더 진리 같아도 말씀보다 진리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생명 걸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목숨 걸고 믿어야 합니다. 저도 제 몸의 약함보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사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는 말씀을 더 믿습니다. 살기 위해서라도 믿고 또 믿습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는 찬송도 부릅니다. 저는 지금 50대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크게 들어쓰임을 받기 위해서라도 부릅니다. 생명 걸고 부릅니다.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길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셔서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며 우는 자들을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즉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놀랄 때 예수님은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약속을 묵상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래도 믿습니다. 그래도 믿습니다.' 하면서 믿음으로 전진하시면 믿음 대로 되는 기적이 함께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귓가에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위기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위기 극복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를 예수 앞에 가지고 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그냥 나오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딸을 살리려는 그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으로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람의 생각 다 내려놓고 주님께 나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실로 간구하고 어떤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말씀의 약속에 서십시다. 믿음을 계속하십시다. 그래서 주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구원해 주신 것처럼 온전히 위기를 극복하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