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은혜를 받는 4대 원리 (삼하 9:1-8)

공 상희 2008. 12. 6. 11:20

은혜를 받는 4대 원리 (삼하 9:1-8) 

 

이 시간에 “은혜를 받는 4대 원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수천년 역사 이래 몇 사람 나올까 말까 한다는 중세기에 유명한 하나님의 종이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삶이 너무 위대해서 그를 프란시스라 부르지 않고 성(聖) 프란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어느날 그의 제자가 기도하다가 하늘나라를 갔습니다. 가서 보니 사람의 보좌 중에 과연 자기 스승의 보좌가 가장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내려온 제자는 프란시스에게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대답은 위선이십니다. 성자가 그러시다면 살인자와 거짓증거자들은 어찌합니까?” 그러자 프란시스는 웃으며 “자네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러네. 내가 받은 은혜를 그들이 받았다면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일세”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란시스에게서 겸손을 봅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 속에 은혜 받아 한다는 교훈, 그 말이 맞는 말입니다. 성경에 위대한 인물들이 많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아브라함도 다윗도 바울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얼마나 받았느냐가 얼마나 훌륭하고 큰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 공로 없이도 주님이 인정해 주신다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큰 은혜를 입습니다. 비참하게 몰락 당한 사울 왕가의 남은 사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잡혀가 죽어 마땅할 사람이지만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다윗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목숨 바쳐 다윗을 도왔던 요나단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은혜를 기억하고 후일에 그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러 왕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 므비보셋을 통해 은혜 받는 귀한 원리를 봅니다.

 

그럼 은혜 받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복음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7절에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목숨 바쳐 다윗을 도운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다윗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이해하면 요나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므비보셋은 우리들입니다.

므비보셋의 이름만 봐도 그렇습니다. 므비보셋은 “부끄러움의 추방자”라는 뜻입니다. 죄를 지으면 사회에서 추방됩니다.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범죄한 아담 안에서 쫓겨난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므비보셋 나이 다섯 살 때 사울과 요나단이 죽을 때 급히 안고 도망치던 유모의 실수로 떨어뜨려 두 다리 모두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야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피해 살았던 로드발은 암6;13에 허무한 곳으로 불리어졌는데 목초지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바로 죄악 세상입니다. 하나님도 시인하지 않고 만족도 없고 공허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거하면서 우리 마음과 몸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요나단을 기억하여 그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므비보셋이 한 일은 없습니다. 그냥 부른 그대로 축복의 부름을 믿고 순종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죄인 된 인생이라도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하나님의 왕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용서 받았고 죄에 대해서 죽었으며 의에 대해서 살았고 지금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병도 가난도 저주도 담당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그대로 믿고 이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놀라운 은혜 안에 불러주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2. 늘 감격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8절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했습니다. 므비보셋이 자기를 돌아본 다윗에게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한결같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며 엎드립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은 개와 같은 자라고 자기를 낮춥니다.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울왕가의 왕손이었지만 철저히 자신을 낮춥니다. 낮출 뿐 아니라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이렇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자만이 자기를 낮출 수 있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찬양과 감사가 나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해도 찬양해도 감격이 없다면 왜 없는지 돌아보세요. 죽어 마땅한 개보다 못한 자를 불러주신 그 은혜를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대인들처럼 입술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먼 것은 아닌지요.  자신의 근본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마음의 감격이 나옵니다. 이 감격으로 경외하며 매일같이 찬송하며 살아갈 때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12절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여기 젊은 아들이라고 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이 은혜를 받으려면 사울왕가의 왕손이기 때문에 다윗을 대적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왕가가 멸망했지만 아직도 사울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40년간 통치했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11지파를 가진 사울 왕국의 도전을 7년 반 동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울왕가에 똑똑한 사람이 난다는 것은 다윗에게는 무엇보다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미가라는 이름에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누가 같은가?”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마가엘 천사와 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던 마귀를 대항해 싸우는 하늘의 천군장 미가엘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미가라는 이름은 전투적인 이름이죠. 하나님이란 뜻만 없을 뿐입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의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과 같을 수 없다는 의미를 강하게 암시한 이름입니다. 이처럼 므비보셋은 아들 미가의 이름을 통해 철저히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에게 복종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사라지고 다윗만 나타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의 아들다운 모습입니다.

이처럼 큰 은혜 받으려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만 나타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나타나면 안 됩니다. 나의 선이든 나의 악이든 다 처리 되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면서 자기 생각을 쳐서 복종시키십시오.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이 왕이 되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하나님 생각 때문에 내 의식 속에서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아파요." 가만 보니 신경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의 주제를 돌렸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던 성도가 "아니 왜 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그랬어요. 성도님 지금도 아프세요?" "엇! 안 아픈데요." 자기 몸 상태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작은 아픔도 크게 느껴집니다. 이명이 있다면 원인치료해야겠지만 귀에 소리가 나도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면 소리나는 줄 모릅니다. 염려도 하지 말고 죽음도 생각하지 말고 예수만 생각하세요. 이것이 인생길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시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 없다 한다 했습니다. 믿는다면서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지만 의식 속에 하나님을 제외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곁에 계심을 믿고 늘 경외하며 조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세요. 늘 여쭈고 대화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은혜를 끼침도 나를 감추고 예수만 나타내야 합니다. 1871년 가을, 무디가 부룩클린의 어느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갖 열심과 정열을 다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 둘 다 떠나가고 몇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마음에는 패배감과 좌절감으로 메워졌습니다. 어느날 예배가 끝난 후 한 여성도가 무디에게 나와 겸손히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세상 이야기를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 해주세요" 무디는 그후 부터 하나님 말씀만 설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설교에 능력이 생기고 교인들이 힘을 얻고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역시 비슷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나를 죽이고 예수만 나타내는 것이 은혜 받는 방법이요 은혜 끼치는 방법입니다.


4. 자기를 슬퍼 애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에게 시험이 닥칩니다. 삼하 16장을 보면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다윗을 속여 므비보셋을 모함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시바는 나귀에 온갖 먹을 싣고 가서 지친 다윗을 대접하면서 므비보셋이 왕이 되려고 모반했다고 속입니다. 그 때 다윗은 속아 넘어가 므비보셋에게 준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돌립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다윗은 노하여 므비보셋을 책망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그러자 므비보셋은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삼하19:26-27) 시바가 방해공작을 꾸몄던 것입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왕이 수도를 떠난 날부터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아니하고 옷도 빨지 않고 어떤 이유로든 왕을 따르지 못했음에 애통했습니다. 그 진심을 본 다윗은 시바의 모함인 줄 알고 시바에게 넘겨준 재산의 절반을 다시 므비보셋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시바는 바로 우리 육체입니다. 이 몸이 주님 따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누림을 방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을 깍아요. 육체의 본능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변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이 늘 유혹하고 하나님을 모반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육체라는 건 시바와 같아요. 다윗이 그랬듯이 이걸 죽일 수도 없고 잘 달래서 사용해야 합니다. 게다가 약해지고 병들기 쉽습니다. 육체를 갖고 있는 한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염도 깍지 않고 그 슬픔을 애도한 므비보셋처럼 늘 기도하며 금식하며 자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면 하나님께서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약4:9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한계만 가지고 실망하지 말고 주님께 그러하지 못함을 슬퍼하며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윗이 베푼 은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은 멸해야 할 사울의 씨 므비보셋이었으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왕궁에 와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시바와 그 아들 열다섯과 그 종 스물까지 다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역시 생각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울의 토지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역시 있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왕자처럼 왕의 식탁에서 먹도록 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뿐 아니라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자손들을 매달겠다고 달라고 했을 때도 다윗은 므비보셋을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고 영생 얻게 하시고 하늘의 왕궁에서 살게 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보배를 허락하시고 악의 세력을 이기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과 지상의 온갖 기름진 복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실상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믿음으로 이 은혜를 풍족히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받아 누리고 그 특권을 빼앗기지 맙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를 구주로 믿고 겸손하고 은혜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예수만 나타내고 애통하며 주님 가신 길을 함께 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온갖 아름다운 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