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
본문: 마태복음 25: 31- 46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3절)
로마의 역사상 가장 악한 황제로는 단연코 네로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한 최대의 사치와 부를 누렸으며, 신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겁탈하기도 했고 부인과 어머니와 자신의 아들조차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한 로마의 시가지에 불을 지른 후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시를 읊기도 했으며 그 죄를 기독교인들에게 덮어씌워 무참히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반란군에게 쫓겨 31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한편 그와 동시대에 살았으나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는데, 곧 사도 바울입니다. 높은 학식을 소유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이후 권세와 부귀의 길을 저버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그 무엇도 그의 담대하고 확고한 신앙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같은 시대에 한 사람은 육신의 삶에만 관심을 가진 채 자신을 위해서 살아갔고, 또 한 사람은 오직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바라보며 의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1.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겨울에 먹을 식량을 열심히 저장을 합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여름 내내 게으름을 피우며 놀다가 추운 겨울이 되었을 때, 식량을 준비하지 못해 결국 비참한 겨울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잠언서 6장 6- 8절에 보면 개미에게는 두령도, 간역자도, 주권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미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시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도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임무에 충실한 사람은 보는 이가 없을 때에도 신실함을 간직하는 법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교회에서는 그야말로 천사와 같은 모습인데, 그 사람의 생활로 돌아가서는 악마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혹, 내 자신이 그런 이중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가올 환난을 준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미는 여름동안 먹을 것을 예비하였습니다. 추수 때까지 개미는 양식을 모으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짱이는 추위에 떨다고 눈보라 속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준비하는 사람이 환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는 것이 어렵다고 준비하는 것을 포기하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환난에의 고통입니다. 건강도 건강할 때 지키는 것입니다. 행복한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지혜롭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마태복음 7장 24-27절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건축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건축한다고 하였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지 아니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서 바람이 불어오면,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그대로 보존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입니까? 똑 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 같이 수고를 하였고, 똑 같은 시간과 정성을 드렸으나 그 기초를 바로 설정하고, 바로 설정하지 못한 결과는 이와 같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반석은 무엇이며, 모래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여기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모래는 이 세상 물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집을 튼튼히 세우는 지혜로운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25장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등에 기름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지혜로운 신부이지만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어리석은 신부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등에 기름을 준비한 신부는 진실한 신자인 동시에 교회라고 하면,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신부는 형식적인 교인인 동시에 거짓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등에 기름을 준비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즉 등에 기름을 준비한 다섯 신부는 영광스러운 잔치에 영접을 받았으나, 등에 기름을 준비치 못한 다섯 신부는 그만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신부들은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 못한 결과는 엄청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등은 신자들의 심정을 가리키고,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장차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과 부를 쌓기 위해 일하는 사람
‘목적이 이끄는…’ 시리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릭 워런 목사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부를 쌓기 위하여 일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종류 사람들 사이에는 놀랄 만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사업을 성장시키고 사고팔 때 이익을 남기는 수완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나름대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무엇이든 업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는 놀랄 만한 차이점도 있음을 릭 워런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를 쌓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해왔는가에 상관없이 그저 더 많은 부를 갖기 위하여 계속 일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이제 게임의 규칙을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즉 그들은 나름대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돈을 쓰기 위함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와 세계 복음화를 위한 도구로 그 부를 사용하려 한다.”
4.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C S 루이스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 대조적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방기하신 듯 한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삶의 초점과 목적을 맞추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들은 자유스러운 자 같으나 실상은 ‘더러움의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둠’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다 인생을 헛되게 마무리하게 됩니다. 우리는 혹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의 삶을 동경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이 세상에는 수많은 민족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기 그들이 속한 민족적 특성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인간은 오직 두 종류만 존재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곡과 쭉정이로 비유하셨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어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태워 거름으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들 중에 영에 속한 사람은 천국으로 올리우시고 육에 속한 사람은 영벌에 처하게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사람은 육의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으로 성령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산다 해도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고서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속에 온갖 탐심과 우상숭배와 정욕을 심어줍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마귀가 이끄는 대로 탐욕과 우상숭배와 정욕의 노예가 되어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육에 속한 사람은 금세와 내세에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으로 살다가 버림받을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사람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니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육에 속한 사람에서 변화를 받아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에 속한 사람으로 신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이 다시 태어나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도말하시고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이제 우리 생명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나아가 거듭나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영이 살아난 사람은 영적 호흡인 기도로써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고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여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고 나아가 능력있는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성령의 열매가 열립니다. 아무리 교회를 몇 십 년 다녔다 할지라도 생활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그 사람에게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의지하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 될 수 있으며,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란 하나님의 농사기간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영의 씨앗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여 거듭나고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냐 육의 사람으로 남아 있다가 파멸 당할 것이냐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추수가 점점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에 속한 알곡과 육에 속한 가라지를 나누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신령한 알곡들이 되어 추수 때 천국 곳간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5. 겸손한 사람과 교만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생각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장점을 먼저 생각합니다. 십계명을 대할 때에도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명하신 것을 지켰으므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라고 명하신 안식일을 지키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를 충실히 지켰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자기 뒤로 밀어내고 자기 위주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이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우선 당장 코앞의 것, 보이는 것만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를 돌아보아 체질이 진토임을 시인하는 사람입니다(시 103:14). 교만한 자는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하고 항상 불만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는 상대방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권력이 얼마만큼 휘둘러지나 얼마나 강한가를 꼭 시험하고 맙니다. 겸손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신을 녹여서 한 시대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인도자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카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그의 일기에서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이 행복할 때 애교를 떨고 다정하다가도 우리가 불운에 처하게 되면 슬그머니 몸을 숨기는 사람이 있고 또 한사람은 애교는 적으나 내가 불운에 처했을 때 우리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판단해 보십시오”
너무나 부끄러운 질문이라서 나를 솔직하게 돌아보면 잠을 못 이룰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은 곧 죄악입니다.
6.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성공과 실패에는 분명한 분기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과 가능성을 찾아내는 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는 갈라집니다. 특히 가능성을 찾아내는 눈은 성공하는 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가능성은 꿈을 갖는 것입니다. 꿈은 마음으로 강력하게 원해야만 현실이 됩니다. 즉,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기대하며 끈기 있게 실천해나갈 때 가능성은 현실이 됩니다. 우리는 유행이나 상황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부속품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엔진이 되어서 주체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살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7.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
이기는 사람은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지는 사람은 실수했을 때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기는 사람은 아랫사람뿐만 아니라 어린이에게도 사과하지만 지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이기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만 시간의 여유가 있고 지는 사람은 게으르지만 늘 바쁘다며 허둥댑니다. 이기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쉽니다. 그러나 지는 사람은 허겁지겁 일하고 빈둥빈둥 놀고 흐지부지 쉽니다. 이기는 사람은 져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지는 사람은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합니다.
이기는 사람은 과정을 위해 살고 지는 사람은 결과를 위해 삽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이긴 사람답게 살아갑시다.
8.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나이가 아흔이나 된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자녀 5남매가 늙으신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주위에 쭉 둘러앉아 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맏딸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 딸도 이미 환갑을 넘은 나이였습니다. 어머니는 특히 그 맏딸을 사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귀한 유언 한 마디를 남깁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 말씀을 하시고는 조용히 눈을 감아 이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 할머니는 많은 공부를 한 분도 아니었고, 철학적 유언을 할 분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일이 없이 평생 소박한 삶을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90평생을 살면서 체득한, 진주보다 더 귀한 말씀을 자녀들에게 주고 가십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더 많다'
성도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한 사람이 많을까요? 선한 사람이 많을까요?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의 길과 악인의 길을 말하면서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겠다고 하였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0장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물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 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택하라'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도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의 마지막은 생명이고 넓은 길의 마지막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아니하든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결국 두 가지 길뿐입니다. 생명의 길 아니면 사망의 길, 축복의 길이 아니면 저주의 길, 좁은 길이 아니면 넓은 길, 의인의 길이 아니면 악의 길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 노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적은 데서부터 큰 데까지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사사건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가령 오늘 저녁 예배당에 나오시면서 무슨 옷을 입고 갈까 , 여러분 자신이 선택합니다. 고등학생들이 대학교를 진학할 때 어느 학교를 택하고 어느 과목을 전공하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 자신이 정해야 합니다. 청년이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 상대를 택하는 것도 본인들이 해야 합니다. 청년기에 배우자를 바로 택해야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사회를 위해서 큰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한 번 잘못하면 크게 불행하게 되고 맙니다. 선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 뒤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선택할 때는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알고 택해야 합니다. 전에 에서 같은 사람은 배고픈 김에 시장한 것을 못 이겨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 아 버렸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전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눈에 보이는 것, 당장 유리해 보이는 것만 택했다가 나중에 큰 망신하지 않았어요? 이것은 롯 뿐만 아닙니다. 오늘도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항상 유리한 면만 택했다가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 방면에 꼭 옳은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청년 요셉은 육신을 택하느냐 하나님을 택하느냐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애매한 고생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청년 모세를 보세요.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 자리를 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인가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때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 이스라엘 민족 편을 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상주시는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양과 염소, 알곡과 죽정이, 선과 악, 빛과 어두움, 천사와 악마, 미와 추, 정직과 거짓, 부요와 빈곤,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 감사하는 사람과 원망하는 사람, 적극적인 사람과 소극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과 불신의 사람,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넓은 길로 가는 사람과 좁은 길로 가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이들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 중에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세상의 넓은 길과 의의 길인 좁은 길. 이 두 개의 길 중에 의인의 길을 선택하시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