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 사는 길이다 (요 5:1-10)
순종이 사는 길이다 (요 5:1-10)
이 시간에 “순종이 사는 길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런 사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할 때 여호와께서 불뱀을 보내어 죽게 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가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21:8) 하셨습니다. 그래서 놋뱀을 만들어 달았더니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다 살았습니다. 이 놋뱀 사건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려면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불치의 병자를 고쳐주신 장면입니다. 유명한 헨드릭슨이라는 주석가는 이 병자가 바로 혈기 마른 자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를 대로 말라 몸은 굳어지고 힘은 없고 병은 몸에 창궐하고 마음마저도 심히 병들었을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 물 속에도 뛰어들어 가지 못할 만큼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살려면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가만있어 병든 그 모습 그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여 살 것인가? 그 선택은 그 병자에게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침체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영적상태도 예전만 같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어요. 예수님의 은혜도 변함이 없어요. 성령님의 함께 하심도 역시 그래요. 이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요. 감사한 것은 성경을 보면 살아날 길이 다 나타나 있어요.
그럼 진정 영적으로 살려면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1. 미신적인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당시 베베스다 연못은 물이 솟구치고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민중의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신념을 가지고 거기에 모여들었습니다. 온천수에 목욕하여 도움을 받는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천사 이야기니 다 낫느니 이런 것은 미신입니다. 이 미신에 생명을 걸고 모여든 그들을 보세요.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교회에도 사람이 만든 미신이 있습니다. "40일작정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 물론 40일 기도하면 대단한 기도훈련입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40일이나 100일기도가 무엇을 줄 것으로 안다면 미신입니다. 혹은 "금식기도하면 영계가 열리고 교회가 부흥된다." 금식기도 역시 대단한 기도훈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님도 금식하셨고 바울도 금식했으니 우리도 금식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금식기도가 구원을 주고 권세를 주고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기도하다가 시험 든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으로 권능 받겠다고 목숨 걸려고 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구원과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복에서부터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이루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양 산과 들로 능력과 축복 찾아 헤메입니다. 40일기도도 1,000일 대장정도 금식기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더 복음에 서고 더 감사하고 더 겸손하고 더 아버지의 뜻을 알고 더 온전히 믿음에 서려는 것은 물론 기도해 주어야 할 사명 감당이지 구원이나 무엇을 받지 못해서 헤메이는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항상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복음에 서서 미신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2. 소극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2-3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병자들이 누워서 물의 동함만을 기다리는 얼마나 소극적입니까? 거기 누워 때만을 기다리며 수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하나님께 날마다 부르짖는다면 더 신속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양문 곁의 베데스다 연못은 양들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 이곳에서 씻음 받아 흠 없이 준비되는 곳입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도 하나님께 열납되려면 온전히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단의 제물이 되고 성령의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교회로 본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양들이 드려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하듯 은혜가 넘칠 때가 있는데 못가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물결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소극적이면 은혜의 물결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이런 소극적인 신자가 많습니다. 적극과 소극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을 내어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다 물리쳐 주셨습니다.
믿음의 침체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3:16-17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3절의 병자들은 바로 은혜 받지 못한 심령의 모습입니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3. 의타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여기 38년 된 병자가 얼마나 의타적인가를 봅니다.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니 남이 연못에 넣어주기만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노력하지 않고 누가 은혜 끼쳐주기를 기다린다면 그 심령은 언제까지도 그 상태 그 형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교회출석하고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습니다. 남이 나에게 은혜 끼쳐주기를 바래서 여기 저기 쫓아다니거나 기도는 않고 기도 받기만을 바란다면 받긴 받아도 그 때 뿐이고 항상 구걸신앙이 되고 맙니다. 이제는 신앙도 자립해야 합니다. 항상 품 안의 양이어서는 안 됩니다. 의타성을 버려야 그 신앙은 비로소 자라게 됩니다.
저의 첫 목회 시 여집사님 한 분 이야기입니다.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겨우 숨만 쉴 뿐 몸이 굳었을 뿐 아니라 부서질 것만 같아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죽어가면서 불신자 남편 만나 남편 뜻에 맞추다 믿음을 떠난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뻗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리만이라도 굽혀지게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며칠 기도했을까 다리가 굽혀졌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니 이제는 누워 기도하는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기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며칠 기도하자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기도합니다. 그 분의 소원은 이제 걸어서 교회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서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설 수 있었고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새벽마다 한 걸음씩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0분 걸이를 몇 시간씩 쉬면서 교회에 나와 기도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긴 시간이 한 시간으로 줄어들고 30분으로 줄어들고 나중에는 10분으로 그러다가 완치 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회계 맡아 충성하고 교역자 잘 섬기고 초등학교 교사직에도 복직이 되었습니다. 대장부도 헤어나오기 어려운 환난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승리한 좋은 케이스입니다. 이처럼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율법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8-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은 장로들의 유전에서 탈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서는 소나 나귀가 빠졌다든가 사람이 병들었다든가 그런 생명을 살리는 일은 가능합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도 있고 자리를 들고 가는 그 정도 가지고 안식일 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의 해석으로 본다면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만약 병자가 당시 계율에 얽매여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영원히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너무나도 사람들이 여러 가지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얽매여서 활발한 영적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것에 얽매이고 저것에 얽매이고 체면에 얽매이고 전통에 얽매이고 생활에 얽매이고 핍박에 얽매이고,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에 방해가 되고 영적생활을 방해하는 전통이나 체면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틀을 깨뜨리지 않고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꽃게가 껍데기를 벗듯이 자기 틀을 깨드린 것만큼 자랍니다.
5. 기복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12-13절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그는 병 고침을 받았지만 자기를 낫게 한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얼떨결에 된 일이고 또 예수님이 그 자리를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병 고침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육신의 병은 병원에서도 고칩니다. 그가 후에 에수를 만나지 못했다라면 구원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없는 기적, 예수 없는 축복, 예수 없는 능력, 예수 없는 형통,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목적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예수님을 구하지 않는 기복적 신앙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참된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구하지 않는 소원성취기도는 이방인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그 발아래 복종하며 예수님을 가장 원하고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비로소 성장하는 것입니다.
6. 자만의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병 고침 받은 사람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갔다고 핍박하든지 말든지 병 고침 받은 사실에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38년간 누웠다가 살아났으니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병 나은 것으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범죄하면 또 재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체험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 받았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만하지 말고 더욱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씻고 겸손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항상 어리고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섰다. 이루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섰어도 섰다 하는 순간 넘어집니다.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교만은 더욱 안 됩니다. 방심해서도 안 됩니다. 더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구하고 더 회개하며 긍휼을 구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영적으로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성경이 말씀한대로 하세요. 먼저 베데스다 연못인 교회에서 잘 준비하세요. 그러나 참된 만족은 예수님만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소극적이고 의타적이고 율법적이고 기복적이고 자만적인 마음을 버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겨 영육 간에 고침 받고 변화 받아 하나님께 사랑 받는 온전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