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전-계시록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들 (행 17:1-15)

공 상희 2008. 10. 12. 06:38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들 (행 17:1-15)

이 시간에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일 때 그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울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장 큰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대로 하나님의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몇 가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신실한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2-3절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너희에게 전하는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이처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예수의 구주되심과 메시아이심을 전했습니다. 그냥 전해도 귀한데 성경을 강론하며 자세히 풀고 증명까지 했으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성경의 많은 말씀을 전했어도 예수를 전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당시 항간에는 바울이 말에는 졸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사실인지 모르나 사실일지라도 바울을 위대한 설교자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더라도 누구보다 예수를 잘 전했습니다. 예수를 잘 전해주었다면 그것은 가장 잘한 것입니다.

즉 예수를 알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를 만나게 하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게 하고,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가 그 인격에 나타나고, 예수와 동행하고,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고, 예수의 그 발아래 엎디어 경배하고, 예수만 자랑하고, 예수를 전하게 한다면 그보다 더 위대하고 신실한 사역은 없습니다.

2. 훌륭한 청중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4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작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그리고 11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아주 신사적이었던 것을 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할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들먹일 만큼 좋은 청중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문을 열고 잘 받아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견고한 믿음에 섰습니다.

말씀을 사모함으로 듣고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가장 귀한 모습입니다. 어떤 성도가 훌륭한 성도일까요? 말씀 잘 듣는 성도일까요? 아니면 봉사 잘하는 성도일까요? 둘 다 귀하지만 예수님께서 봉사하는 마르다보다 주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일단은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더 아름다운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3. 뛰어난 조력자의 모습을 봅니다.

야손과 그 형제입니다. 5-6절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야손은 예수 혹은 여호수아의 헬라음입니다. 이름도 훌륭하지만 이름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충성도 훌륭했습니다. 야손은 생명 걸고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하고 바울 대신 자기가 잡혀가고 바울 대신 자기가 매 맞고 바울 대신 자기가 보석금을 냈습니다. 어려운 일 생길 때 모두 자기가 대신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보배 같은 일군입니까? 이런 일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어느 전통 있는 교회를 시무하는 목회자의 고백인데 목회의 3분은 1은 원로목사에게, 3분의 1은 당회원들에게, 나머지 3분의 1은 교인들에게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생겨서 목회가 어렵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원로목사와 당회원들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그 목사의 사랑 많고 겸손한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한 번 진단해 보세요.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그래야만 목회가 가능하다면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 있는 교회라면 이미 성숙한 교인들이어야 마땅합니다. 다 큰 양들이 이제는 털도 내고 젖도 내고 새끼도 치고 앞장도 서고 돌봐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 양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일군이 많아서 일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손은 바울 일행이 아무 신경 쓰지 않게 자신이 물질을 담당하고 자신이 잡혀가고 자신이 매를 맞고 자신이 보를 냈습니다.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남기신 교회를 위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런 천사 같은 일군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4. 인내하며 박해를 견디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5절의 “괴악한 사람”은 바로 불한당 폭력배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시기하여 폭력배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7절의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한 것처럼 전도를 방해하려고 황제 배역죄로 몰고 여론을 호도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가장 교활하고 사악한 핍박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 이단이라는 종교적인 죄와 황제 배역죄라는 정치적인 죄를 뒤집어 씌은 것과 같습니다. 관리들도 황제 배역죄라는 고소가 들어오면 잘못 처리하면 자기들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과잉 충성하여 문제없는 사람을 처벌하였습니다. 이처럼 관리들까지 나서서 박해에 가담한 교활하고 악하고 조직적인 핍박이었지만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바울을 탈출시키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5.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모습입니다.

11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학문적 철학적 성향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도 부지런히 검토하고 깊이 탐구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은 학문적으로 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성경에 대한 자세가 심히 진지하였으므로 칭찬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오늘날처럼 설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 외우기를 반복하거나 사도들이 보낸 편지 등을 돌려보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은혜가 임하고 회개가 임하고 능력이 임하고 불이 임하고 기적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많지 않아도 영적생활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공산권에서 성경을 소유할 수 없어 성경을 외우는 사람들이 많은데 암송을 통한 영권권세와 풍성함이 놀랍다고 합니다. 이 성경을 통한 부흥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동안 귀로만 듣거나 눈으로만 읽던 습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성경을 발성으로 읽어보세요. 그러면 성령의 불이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명수가 심령에서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을 암송하세요. 그러면 구원의 확신과 문제 해결은 물론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군으로 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발성과 합해질 때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옛날 서당에서 글읽는 소리가 나듯 이제 가정과 교회에서도 성경 읽고 암송하는 소리가 나야 합니다.

 

6. 사회에서도 존경 받고 영향을 끼치는 모습입니다.

 

4절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 그리고 12절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랬습니다. 여기 경건한 헬라인은 헬라인으로서 유대교에 귀의하여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이방과 비교해 큰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귀부인은 상류층의 부인들인데 당시 귀부인은 사회적 지위가 대단히 존경 받는 위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더욱 변화되었으니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겠는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과학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봉사와 섬김을 통해서 사회적 영향을 많이 끼쳐야 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도 교회로 많이 나와야 합니다. 으뜸이 되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교회는 세상 정치와는 달리 섬김을 통해서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선행을 자랑할 필요는 없지만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듯 지나치게 숨길 필요 또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적절히 알아서 사용하시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서 벧전2:12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보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에 굳게 서서 바울이나 성도들이나 야손 그리고 베뢰아 성도들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칭송 받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