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하는 복 (요 8:29)
주님과 동행하는 복 (요 8:29)
이 시간에 “주님과 동행하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고향에 오신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게 됨을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향교회를 위해서 잊지 마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결혼도 해보니 별 것 아니고 이제는 돈이나 실컷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아직 인생을 덜 경험한 소리입니다. 돈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을까요?
2002년 성탄절에 미국의 잭이란 사람은 역사상 가장 큰 로또에 당첨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금액은 세금을 제외하고도 1억 1,3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300억 원 정도 됩니다. 그 당시로는 그가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고 최고로 행복한 존재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무절제한 삶 등 불과 2년 만에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폐인이 되어 재활 센터로 보내졌습니다. 더 가슴 아픈 일은 그의 손녀가 마약에 손을 대 과다복용으로 친구와 함께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내가 그 주인공이라면 현명할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그럴지라도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대통령직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무덤에 있는 것이 낫다.” 3대 대통령인 제퍼슨도 백악관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권력의 사슬을 벗어던질 때 느꼈던 해방감은 죄수가 감옥에서 나올 때의 해방감 이상이다.”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전1:2-3을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 고백은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누려본 솔로몬 왕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으로 만족을 누려야지 세상 것으로 만족을 누리려고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님과 동거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1. 인생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요8:29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동행했더니 함께 하셔서 외롭지 않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까지도 아버지께서 온전히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16:32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외로움 고독 이것이 문제입니다. 외롭지만 않으면 인생은 살만한 존재입니다. 외롭지 않는다면 산속이라도 집을 짓고 혼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해 보면 외로움 때문에 포기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은 사람 사는 곳에 모여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 틈에서 산다고 외롭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 외롭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처럼 방황하고 방탕해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거스틴(A.D.354-430)은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신자이며 서방교회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그러나 그는 16살 때 카리타고로 유학하면서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이성의 사랑에 빠져 사생아를 낳고 문란한 생활했을 뿐 아니라 9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찾아 마니교에 심취하며 방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참된 안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왜 나는 이 더러운 생활을 깨끗이 끝내지 못할까?" 애통하며 눈물로 부르짖을 때 이웃집 뜰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노래를 부르는데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서재로 뛰어 들어가 성경을 폈습니다. 롬13:13이었습니다.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이 그의 폐부에 깊이 박혀 들어갔고 그의 삶은 변화되고 오랜 방황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응답이었고 성령의 기름부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말고 어디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 길이 그러한 것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길에 생명강수가 가슴 속에서 타져 나오고 온갖 생명의 실과로 만족한 것입니다.
2. 삶의 의미와 목표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빌3:7-9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만나 진정한 인생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미국의 요한 맥스웰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더 근원적으로 보면 우리 주님을 깊이 만났느냐의 여부인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꿈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갈 데가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달려가십니까?” 물으면 “모릅니다. 그냥 저도 달려갈 뿐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면 삶의 의미와 목표가 생깁니다. 주님이 영의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에 소원을 일으켜 주십니다. 성경 말씀대로 그리고 성령의 감동대로 따라만 가면 됩니다.
덴마아크를 변화시킨 구룬두비 목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목사고시를 볼 때 설교제목이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였습니다. 시험관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떨어뜨렸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발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섰지만 목사고시에 낙방하고 조그마한 섬에 유배당하다시피하여 신경쇠약에 걸려 잠도 자지 못하고 나중엔 헛소리까지 하는 등 폐인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그룬두비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절히 통회 자복하며 눈물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그를 뜨겁게 해주셔서 연약함을 치료 받고 담대해져서 그 때부터 그의 입에서 말씀이 쏟아지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덴마크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국민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만나 동행해야 삶의 의미와 목표가 생깁니다.
3.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마11:28-30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과 한 멍에 메고 동행하는 자에게 모든 짐 벗겨 주시고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잘 안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해해야 되는데 이해하기 싫고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하지 못하며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삶의 짐이 무거워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면 그 짐이 가벼워지고 말씀대로 살아집니다. 그래서 그 완악하던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고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짐 예수님께로만 오면 자동으로 다 벗어집니다.
4. 변화 받은 사람이 됩니다.
요8:12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면 변화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을 깊은 만난 사람일수록 더욱 크게 변화됩니다.
죄수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미국의 캐서린 로즈여사가 있었습니다. 로즈여사는 평생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농아들에게는 수화를 가르쳤고 맹인들에게는 점자를 가르쳤습니다. 1937년 어느 날, 그녀는 그만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에 교도소에 알려지게 되자 죄수들이 교도소장에게 “소장님! 저희들이 교도소 밖으로 나가 캐서린 로즈 여사에게 문상을 하고 경의를 표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 분은 우리의 은인입니다.” 그 부탁을 들은 교도소장은 그런 엄청난 부탁을 듣고 한참 망설였지만 평소에 그 캐서린 여사의 감동적인 헌신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흉악한 죄수들이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캐서린 로즈 여사를 존경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승낙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도소장은 죄수 600명에게 잠시 동안 외출을 허용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600명의 죄수들은 한 줄로 서서 그 캐서린 로즈 여사의 운구행렬을 뒤따랐는데 그 길이가 무려 800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들꽃을 하나씩 따서 한 송이씩 들고 캐서린 로즈 여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날 저녁 600명의 죄수는 단 한 사람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교도소로 돌아왔습니다. 존경하는 캐서린 로즈에게 누를 끼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위해서는 양심도 버린 죄수들이건만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주님과 동행하면 이처럼 변화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할수록 소성강처럼 더욱 충만해집니다.
그럼 어떻게 동행하는 것일까요?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암3:3)느냐고 했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하늘보좌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나를 내려놓고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온전히 동행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와 함께 동행하십시다. 세상 것에 만족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여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갖고 문제를 극복하고 온전히 변화 받은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