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행 15:1-11)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행 15:1-11)
이 시간에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두 통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알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다툼과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랬다면 우리들도 그만큼 관심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다른 지엽적인 문제는 모르지만 구원 문제만큼은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적지 않다는 것은 아주 큰 다툼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진리 문제이기에 목숨 걸고 싸웠던 것입니다.
즉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지만, 그들은 할례는 성경에 나와 있는 성경적인 것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 백성 된 표인데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어찌 할례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것이냐고 주장한 것입니다.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그래서 큰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구원 문제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구원을 어떻게 받는지 귀중한 힌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는 것일까요?
1. 구원은 오직 예수로만 받습니다.
1절에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 주장은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들의 말대로는 결코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할례 받지 않아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도리어 오직 예수님 외에 다른 방법이 첨가되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즉 오직 예수 한 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즉 그러니까 오직 예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말고 어떤 다른 길이나 혹은 예수 이름에 다른 방법이 첨가될 수 없습니다.
안식교가 왜 문제 있습니까?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보혈도 믿는다고 하지만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여부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주고 있어요. 즉 그들은 안식일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한 것입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이런 식입니다. 자기 집단에 들어와야 구원의 수에 든다는 것은 예수 말고 다른 것을 첨가하는 행위입니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외에 선행을 첨가한다든가 마리아를 첨가하려고 합니다. 지금 가톨릭교인들 상당수는 '마리아 구주론'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도 마리아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단체에서 예수님과 마리아 공동 구주교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에 마리아가 구주라는 교리로 변경해 달라는 주장이 수천수만 건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나 교황 요한바오로 2세까지도 그런 주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교황청 신학위원회에서 이것을 부결시켰으니 망정이지 지금 가톨릭교회 정서로 보면 정통교리를 이탈해도 크게 이탈한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성경해석의 오류에서도 생기지만 신비주의에 빠져서 생깁니다. 왕권협회도 전에는 약간 거부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단체처럼 보였는데 요즘은 심화실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천국을 다녀왔고 엄청난 권세와 사명을 부여받았다면서 왕관 쓰고 왕복을 입고 황금의자에 앉아 왕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진정 성령의 사람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권세와 능력을 받은 사람도 왕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그게 사탄의 미혹인 줄 왜 깨닫지 못합니까?
딤전4:1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습니다. 통일교도 안식교도 여호와증인도 몰몬교도 모두 귀신의 가르침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부정하거나 예수 플러스 알파가 바로 이단입니다. 예수 말고는 구원이 없어야 합니다.
2. 구원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 받습니다.
7절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이 구절에서 복음의 말씀 즉 전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1:21에도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셨습니다.
전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구원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0:14-15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리고 벧전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성장도 다 말씀으로 됩니다. 벧전2:2에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말씀 없이는 거듭날 수도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젖만이 아니라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의의 말씀입니다. 즉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함에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명에 동참할 수 있는 믿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오직 복음입니다.
어느 분이 지옥이 얼마나 뜨거운 곳인가에 대하여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나무가 제일 많은 지역의 나무를 전부 쌓아 놓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석탄이 많이 나는 펜실바니아 석탄을 모두 캐어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석유가 제일 많이 나오는 오클라호마 석유를 모두 붓습니다. 그리고 불을 붙입니다. 한창 뜨겁게 탈 때 지옥 뜨거운 곳에 있던 사람을 꺼내어 그 불속에 넣으면 그 사람은 너무 추워서 얼어 죽는다고 할 정도로 지옥은 두려운 곳이라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3.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습니다.
8-9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1절에도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하였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성령이라는 말도 나오지만 믿음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혹시 믿음이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믿음은 바로 은혜를 시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엡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했습니다.
롬4:16에도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했습니다. 롬5:2에도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공로나 행위를 시사한 말이 아니라 은혜를 시사한 말입니다.
믿음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기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들은 것도 은혜이고, 예수 믿은 것도 은혜이고, 교회 나와 예배할 수 있는 것도 은혜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기에 주님을 잊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나무는 베임 당해도 그루터기는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기에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지대장으로 유명한 전영동목사의 간증입니다. 한 때 그의 믿음이 약해져 전도사를 그만 두고 거지생활하다 피를 토하고 죽어 거적때기에 덮인 적도 있었고 어선에 승선하여 동해안에서 고래 떼를 만나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모든 선원들은 용왕에게 빌었지만 자기 상태를 보니 용왕에게 빌만큼은 타락하지 않았더랍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용왕에게 비는 것을 중지시키고 자신이 전도사임을 밝히고 요나처럼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말하자 여기저기서 "전도사님 저도 집사예요. 저도 성도예요." 자기 정체를 밝히면서 붙들고 눈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가 끝났을 때 그 들판을 이룬 고래 떼들은 기적적으로 사라지는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가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신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잊을 수 없음도 주님이라 부름도 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고전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은혜의 역사가 없으면 허공만 칠뿐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원래 법관이 되기 위해서 공부하던 법학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같이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일을 당했습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기서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됩니다. 당시의 교리는 사람은 믿음과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예수 믿을 뿐 아니라 부지런히 선행해서 구원에 이르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금식하며 고행하며 선행하고 고해성사해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공부를 마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학생들에게 시편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로마의 교황청에 가면 계단성당이 있답니다. 성당의 그 계단은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가 믿음이 좋아서 아들에게 부탁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이 재판 받던 빌라도 계단을 그곳으로 옮겨 놓은 계단입니다. 당시 그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기도하면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그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루터는 큰 기대를 품고 무릎으로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랬지만 사죄의 확신도 없었고 회의만 들었습니다.
그 때 문득 가르치면서 묵상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은혜로 주신 것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속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임으로 사죄를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루터는 그 때부터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517년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문 앞에 95개조 선언문을 내걸고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얘수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 우편 예수 그리스도 안의 그 영광 가운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그 어던 방법도 아닌 오직 예수로, 오직 복음으로, 오직 은혜로만 받습니다. 그 어떤 이론도 배척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고 예수 안의 그 영광스런 복락을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천국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