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부설교

넘치는 믿음 넘치는 생명 (행 13:44-52)

공 상희 2008. 8. 2. 10:46

넘치는 믿음 넘치는 생명 (행 13:44-52)

 

 

 

이 시간 “넘치는 믿음 넘치는 생명”이라는 제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세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 안에서 영생을 맛보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얼굴에 나타난 그 충만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하다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그동안 이방에 나가 전도해도 회당 중심의 전도였기에 유대인들이 많이 믿었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대거 믿는 역사가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거의 온 성이 순식간에 다 복음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그들의 믿음이 넘쳤는지 시종 우리의 마음을 감격스럽게 합니다.

더구나 52절을 보면 그들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영생을 맛보고 누렸던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꼭 40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믿음과 순종의 순수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곧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믿어 영생 얻었지만 그 영생을 얼마나 풍성하게 누리느냐 하는 것은 각자가 다릅니다. 우리는 비시디아 안디옥 성도들의 그 아름다운 영생의 믿음에서 영생을 풍성하게 맛보며 사는 지혜를 배웁니다. 현세에서 영생을 풍성하게 맛보려면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넘치는 믿음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넘쳐야 합니까?

1. 예수님을 사모함에 견딜 수 없도록 넘쳐야 합니다. 


그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보세요. 42절에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하더니 44절에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그랬습니다. 한 주간 사이에 온 성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자 거의 다 모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그 동안 얼마나 지난주에 들은 예수 때문에 기뻐하고 또 예수의 소식을 서로 이야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말씀을 들었다. 가자. 가보자.” 이처럼 그들의 말씀에 대한 넘치는 감격과 갈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함에 견딜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 차 있어야 합니다. 찰 뿐 아니라 차고 넘쳐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심령이 주님을 사모함으로 목말라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 같이 자랍니다.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덤덤하게 믿는 것과 기쁜 마음으로 믿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덤덤하게 믿으면 생명이 약동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봄이 와야 약동하는 것입니다. 영생도 믿음의 봄이 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자기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기 기뻐하는 이방인과 핍박하는 유대인의 사이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변박하고 비방했는데 변박하다는 말은 “반대하다, 훼방하다.”는 뜻입니다. 미지근함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11:23)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보세요. 자신들은 부족함이 없다고 했으나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밖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계3:20-21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미지근하니 결국 주님을 밖에 세워둔 것입니다. 집을 방문했지만 들어오라는 말도 않고 밖에 세워두면 좋습니까? 그래서는 영생의 귀한 떡을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그 말씀 받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2. 주신 은혜를 믿고 온전한 기쁨과 찬송으로 넘쳐야 합니다.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왜 기뻤습니까? 47절에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귀한 복을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자기들도 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쁘고 복된 일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절망에서 영광의 자녀로 구원해 주신 그 기쁨에 춤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모두 나를 복주는 말씀이라고 믿을 때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나에게 아멘이 되고 기쁨이 되고 찬송이 됩니다. 이 진리에 대한 믿음에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성경은 기록된 그 말씀 자체로도 귀한 것이지만 그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화합하여 받아들일 때 더욱 실재가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히4:2-3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했습니다. 그 때 저 영원한 영생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나를 복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요 현실이요, 믿는 여러분이 그 주인공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어떤 사람은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요, 또 남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주신 것과 약속은 꿈이 아니요 현실이요, 남이 아니요 자신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골2:6-7의 바울의 말씀처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감격으로 넘치는 예배에 성령께서 역사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처럼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나에게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 복음에 서서 기뻐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에 서서 감사함으로 넘쳐서 현실에서 영생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널리 널리 전도할 만큼 주님을 향한 충성이 넘쳐야 합니다.

이제 더 넘치는 모습이 49절에 나타납니다. 49절에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처럼 이방인들은 예수의 복음을 듣고 기뻐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 성 안에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에 널리 전했습니다.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 안에 다녔고 그것도 모자라 밖으로까지 나갔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나에게서 넘치고 가정에서 넘치고 마을에서 넘치고 더 밖에까지 넘치는 장면입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 바로 전도와 봉사의 기초입니다. 기쁨이 없으면 누구를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영생을 맛보며 구원의 감격을 가질 때 비로소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했던 것처럼 그 가지가 담을 넘어야 합니다. 가지는 생명입니다. 생명이 넘쳐야 합니다. 더욱 구원의 감격이 넘칠 수 있다면 무수한 일군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엄숙한 사명감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 귀한 예수를 알았으니 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은 당연합니다. 이 느낌 역시 구원의 감격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사명의 무대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사명 감당하다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믿어도 하나님을 만나지만 사명 속에서 더욱 깊이 만납니다. 더 큰 능력을 주십니다. 더 큰 사랑을 주십니다. 어찌 전폭 헌신한 사람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막10:29-30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감격으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4. 어떤 핍박도 이길 만큼 인내가 넘치고 넘쳐야 합니다.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했습니다. 이 제자는 언 뜻 보면 두 사도 같지만 주석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새로 믿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해서 사도들을 비방하고 성내의 유력한 인사들을 선동하여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그렇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고난도 핍박도 이길 만큼 넘치고 넘쳤던 것입니다.

본문의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 믿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토록 아름다운 믿음을 가졌는지 생각할수록 감격스럽습니다. 이 옥토 밭 심정이 부럽습니다. 같은 말씀의 씨라도 마음의 터에 따라 결실이 다릅니다. 어떤 씨는 30배, 어떤 씨는 60배, 어떤 씨는 100배를 맺습니다. 어떤 심령은 뿌린 씨마저 마귀가 빼앗깁니다. 본전도 남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고난이 넘치면 넘칠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넘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1:5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했습니다. 우리 믿음이 넘치지 않고 어떻게 은혜만 넘치기를 원합니까? 심는 대로 거둡니다. 넘치게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내 하세요. 그러면 넘치게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이 자기를 삼킬 만큼 넘치셨습니다. 그랬기에 십자가에까지 죽으셨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비시디아 안디옥의 성도들과 같이 예수를 사모함에 넘치고, 구원의 기쁨과 찬송함에 넘치고, 예수를 전도하고 핍박도 달게 받을 만큼 믿음이 넘치고 넘쳐서 내세는 물론 현세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의 축복을 영원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