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종합편17
아홉은 어데 있느냐 누가복음 17장 11 ~ 19절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 - 그것은 바로 신앙인임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신앙인은 그가 살아서 존재하게 된 배후에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보호하심이 있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고, 십자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처럼 감사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와 감사, 감사와 기독교는 분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열 문둥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문둥병자는, 질병의 차원을 넘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들이요 부정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족과 격리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철저히 절망적인 사람 -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사람 - 죄진 인간의 형상이
바로 문둥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큰 목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가다가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모두다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데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아홉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나는 아홉에 속한 사람인가? 그 하나에 속한 사람인가?
아름다운 감사의 헌신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Ⅰ. 감사는 누가 하는가? (감사의 주체)
감사는 가치있는 사람이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가치는 어데 있는가?
1. 사람의 참가치는 소유를 선하게 쓰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여러 측면에서 평가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한다면 가치 있는 것입니다.
잘생기고 예쁜 탈렌트가 일년에 수조원의 돈을 벌어드린 다면 그것도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황우석 교수님처럼 연구업적이 뛰어나서 절망하고 있는 불치병 환사에게 소망을
준다면 그것도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하고 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기술인, 경제인도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기술, 뛰어난 기능, 많은 물질, 높은 인기와 명예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느냐? 가 더 중요합니다.
세계를 제패한 주먹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좋은 기술을 가지고 가짜물건을 만든다든지,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유해식품이나 만들고, 많은 돈을 가지고
매점매석이나 일삼고, 부동산 투기나 한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사람의 가치는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고 내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였는가? 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모은 돈을 장학기금으로 내어 놓은 대전의 김밥 할머니나,
노량진 수산시장의 젓갈장수 할머니나,
어느 가난한 대학생에게 자기의 신장을 떼어준 이름 없는 어느 여 집사님!
자신의 시신을 대학에 실험용으로 기증한 노 교수님!
사람의 가치는 자기의 소유를 얼마나 선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2. 자기의 죄와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의 말씀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합했는가?
자기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삼하12:7~16).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노라”
- 선지자 나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선지자 충고 쯤, 묵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6:6~7).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32:3).
내 눈이 근심으로 인하여 어두워지고 죄악으로 인하여 내 뼈가 녹는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3.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람의 가치를 높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합니다. 은혜를 입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감사는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 합니다.
마태복은 20장의 포도원에 들어간 일꾼 중에 3시, 6시, 9시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들 보다 11시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이 더욱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 일은 적은데 주인이 많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하시고, 어떻게 나를 구원하시고, 어떻게 보호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있는가를 알 때,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문둥이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얼마나 비참했고,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이었고, 지금 자신이 얼마나 소망적이고, 얼마나 당당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주님 앞에 엎드리어 사례했습니다.
그가 비록 세상에서 버림받은 문둥이 였어도, 그가 비록 쓰레기 같고, 독버섯 같은 인간이었을 지라도,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리어 감사할 때 그는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Ⅱ. 감사하는 자가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감사의 결과)
본문 19절 말씀에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열 문둥이는 모두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병고침은 받았어도, 그들의 육체는 언젠가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한 문둥이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육신과 더불어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육간의 구원입니다.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 아홉은 어데 있느냐?”
찾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을 받아야 할 아홉의 영혼이 세상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감사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받은 축복의 바구니에 감사를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 존귀하신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고린도 후서 4장 16 ~ 18절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한 영국의 시인이요 목사였던
죤 뉴턴은 “세상에는 낙심하게 하는 것들이 많으나 믿음의 사전에는 낙심이란 말은 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낙심되는 것들이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여러 편의 서신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낙심은 마귀의 것이요. 이 세상의 것이요. 육체의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낙심과 좌절 대신에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꿈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가 낙심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Ⅰ. 사명이 축복입니다.
본문 4장 1절에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사도직에 관한 말씀이지만, 이는 성도가 받은 직분, 신분,
사명에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직분을 받은 자는 왜 낙심하지 말아야합니까?
직분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절의 말씀에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의 직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고전4:1).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했습니다(고전6:1).
바울이 받은 직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받은 크고 작은 직분과 사명은 그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이 일은 세상일이 아니요. 사람의 일이 아니요. 우리가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눈으로 보면 작게 보입니다.
성도다, 집사다, 권사다, 장로다! 보잘것없어 보이고, 초라해 보여도 그러나
우리가 받은 직분과 사명은 큰 것입니다.
이 직분의 출처가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일은 크든지, 작든지, 눈앞에 큰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에 실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낙심될 것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직분을 주실 때에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힘이 부족한 자에게, 건강을 주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풍성한 물질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보족한 부분을 채우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만드셔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사명이 곧 축복입니다.
Ⅱ.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낙심치 말아야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선교입니다. 전도입니다.
구제요, 봉사요, 희생이요, 헌신이요, 구령사역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섬기는 일이요, 충성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지음 받고 부름 받았습니다.
내가 가진 건강도, 내가 기진 물질도, 내가 가진 지식도, 지혜도, 힘도, 능력도,
가정도, 자녀도, 사업도, 직장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수단으로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수단으로서의 생활, 목적으로서의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을 행할 때에만 -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만, 사는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우리의 삶이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항상 기쁨과 즐거움만 있습니까?
어느 때에는 세상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난과 핍박이 닥쳐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18)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보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 8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고후5:10).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결코 헛되지 않은 일을 하면서 - 하나님으로부터 상급 받을 일을 하면서 낙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받은 직분! 내가 받은 사명! 그것이 곧 약속된 축복의 직분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Ⅲ. 사명자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겉 사람”은 죽을 몸, 이 세대의 사람, 자연인을 말합니다.
육체는 노쇠하여지고 죽어지고, 썩어지고 없어질 유한한 존재입니다.
“후패”한 썩어서 못쓰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엔 “땅에 있는 것, 무너지고 말것, 손으로 지은 것, 짐 진것 처럼 무거운 것, 탄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절망적인 것들이요. 소망을 걸어 볼 수 없는 것들이요. 허망하고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낙심하지 않을 속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속사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새로와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지극히 큰 것, 영광스러운 것,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것, 하늘에 있는 것,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성도에게만 있는 것, 성도만이 아는 것, 모든 성도가 간절히 사모하는 것, 만족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4:6~5:7).
그래서 바울은 절망은 커녕 너무 좋아서 미칠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디모데후서 4장 6절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날 기약은 외지에서 살다가 천막을 거두고 고향으로 떠날 때를 말합니다. 먼 타국에서 일하다가 고국으로 가기위해서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릴 대를 말합니다. 사명을 다한 육신이 마치 고향을 찾는 나그네 같이, 고국을 찾아 떠나는 귀국선과 같은 것이라면, 여기에 무슨 슬픔이 있고 낙심이 있겠는가?
사명을 다한 인생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후패한 육신 안에 이렇게 새로운 새사람이 있으니 사명 받은 성도는 생명이요
소망이요 축복이요 승리인 것입니다.
성도의 영광 고린도 전서 1장 1 ~ 3절
성도에 해당되는 헬라어의 문자적 뜻은 “거룩한 무리들”이라는 뜻입니다.
거룩이란 헬라어 “하기오스” - “신에게 드리기 위해서 구별된 물건, 혹은 사람”
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성도란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한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성도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엔 성도를 “택하신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성도란 스스로의 거룩함에 의하여 그러한 신분을 획득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선택되어 부르심을 받게 된 존재들인 것입니다(엡2:7~8).
다시 말하면 성도란 창조 주 하나님께서 직접 구별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양자된 신분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셨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요1:10~12).
하나님을 영접한 자,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자녀라는 권세가 어떤 것인가? 대단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를 공유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부자이면, 부자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성공했으면 성공한 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녀가 되는 것에 이렇게 대단한 영광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영광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이 엄청난 영광을 어떻게 주었다고 했는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엡2:4).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엡2:8).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라는 호칭을 들을 때 가슴 벅찬 감격과 자랑스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성도의 영광은 무엇인가?
Ⅰ. 성도는 부르심을 받은 영광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존재라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를 부르셨는가?
이사야 14장 2절은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시편 139편 13절엔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은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롬5:6).
“우리가 아직 되인 되었을 때”(롬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부르시고 구원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롬5:10).
창세전에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택하시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는가?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소스데네”라고 했습니다. 일꾼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아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믿어서 아들이 되는데, 일꾼은 아들이라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아들은 되어도 일꾼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군은 저절로 되지 않고 실력을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된 것도 영광이지만, 일꾼이 된 것은 더더욱 영광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위하여 우리를 아들로 일꾼으로 부르셨는가?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에는 "그의 은혜의 덕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리를 성도로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무한한 사랑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선전케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전도의 삶이요 선교의 삶인 것입니다.
Ⅱ. 성별 받은 영광입니다.
본문 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라고 했습니다.
“거룩하다” 히브리어 “하기오스”란 말은 “하나님의 제단에 올리는 제물,
혹은 사람”을 말합니다. 성별입니다.
성도란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구별해 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별하시는 성, 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입니다.
이는 마치 애굽에 장자 재앙이 내려서 죽임을 당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지방과 인방에 바르고, 방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죽음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죽음의 재앙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냐? 애굽 사람이냐? 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른 방안에 있었느냐?
그 방안에 있던 사람은 애굽 사람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별의 기준은 도덕도, 윤리도, 지식도 지위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거룩하다 하시고 예수 밖의 사람을 거룩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별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꼐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롬8:17).
아무공로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성별을 받은 성도야 말로 영광 중의 영광인 것입니다
Ⅲ. 성도에게는 축복의 영광이 있습니다.
본문 3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받은 영광스러운 축복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우리에게 직접주시시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우리에게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14:6).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씀 가운데는 은혜와 축복을 무한정 공급하신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가 받는 축복 중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의 복입니다.
은혜 뒤에 오는 것이 평강입니다.
은혜 받은 자가 누리는 것이 평강입니다.
은혜의 원천이 하나님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한 다면,
평강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요14:27).
평안은 하나님의 평안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이 참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 있는 자 에게는 딴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복은 이 평강의 복입니다.
역사의 주권자 예수 마태복음 1장 18 ~ 25절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단 한번 뿐인 인생이라는 시간들을
어떻게 선용하고 있는가?
사도행전의 사람들처럼 성령에 취하고 그리스도에게 미치고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명의 열정을 가지고 독수리처럼 비상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롬14: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갈2:20).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에는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가 진정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살리셨다면 - 이것이 사실이라면 - 그것이 피 묻은 진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 은혜를 저버리고 살 수 있겠는가?
성탄의 계절이 다가 왔습니다.
만백성의 경배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구주께 드리면서 그 기쁨의 의미를 상고하길 원합니다.
왜? 우리는 그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가?
Ⅰ.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역사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세계사의 중심은 구속사입니다.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가시는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5천년의 성경 역사는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기록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를 새 역사와 옛 역사로 갈라놓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인류의 역사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의 분수령입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는 B.C와 A.D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역사의 기준이 예수인가?
그것은 예수탄생 사건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라운 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탄생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예수탄생을 통하여 인간의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인간의 죄 문제가 예수 안에서 해결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 5절엔 “나는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고전5:17).
이 예수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는 새로워졌습니다.
예수가 세리장 삭개오 안에 들어가시니, 삭개오가 구원을 받고, 그 가족이 구원 받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삭개오가 받았습니다(눅19:10).
예수가 베드로에게 들어가시니 고기 잡는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바울에게 들어가시니 예수의 핍박 자가 예수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예수가 오늘 나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삶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인류역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인류의 역사가 놀랍게 변한 사실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Ⅱ. 예수만이 구세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단축형 “예슈아”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공회 앞에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을 회개케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늘 손으로 높이시고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행5:30).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행13:39).
특별히 신약적 의미의 구원은 죄에서의 자유, 사망에서의 자유, 모든 억압에서의
자유, 모든 저주에서의 자유를 뜻합니다.
진실로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이름입니다.
과연 예수는 눈먼 자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귀먹은 자를 듣게 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주었습니다. 병든 자에게 고침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부요함을 주었습니다. 실패한 자에게 형통함을 주셨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배에 차고 넘치는 만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청년아 일어나라! 나사로야 일어나라! 과연 예수는 죄와 사망이라는 무서운 영적 병을 치료하러 오셨고,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를 만난 자마다 그 영혼이 소생하고, 환경이 바뀌고, 삶이 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통과하는 인생행로에도 예외 없이 유라굴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폭풍이 몰아치고, 실패라는 폭풍이 몰아치고, 직장에 가정에 사업체에 위기가 몰아닥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가? 죄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었다고 했습니다(사59:2).
이 죄악의 구름이 걷히면, 맑은 하늘. 밝은 태양, 잔잔한 바다가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도 아니고, 열심도 아니고 오직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이름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구세주 예수를 만날 때, 인류의 역사도 우리의 영혼도, 우리의 인생도,
변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예수가 역사의 주관자이고, 인생의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창시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사오는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롬11:36).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하나님 뜻대로 주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 그의 범사가 형통했다”고 했습니다.(창39:23).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했습니다(대상18:13).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다”고 했습니다(왕하18:7).
그래서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한나가 찬양했습니다(삼상2:6~8).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역사의 부침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나라를 세우시고, 멸하심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므로
우리는 그 분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예수 이사야 41장 8 ~ 10절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전 700년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부르시어 선지자의 사명을 주시고 죄악 가운데서 멸망 받을 이스라엘 백성을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사7:14).
하나님의 이 예언의 말씀이 739년이 지나서 마리아에 의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신다. - 누구인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만이 인간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요.
그러므로 예수만이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요3:15).
그래서 요한사도는 “너희 죄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는다.”고 했습니다(요일2:12).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롬10:13).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임마누엘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영생의 하나님!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는 이 땅에서 죄악이 사라지고, 저주의 사슬이 풀어지고 택자 구원이 완성 되는 날까지 여러분 가까이에, 여러분 안에, 항상 함께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 예수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Ⅰ.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본문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느 때 두려움을 갖게 되는가? 생명에 위험이 닥칠 때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가인은 자기의 아우 아벨을 죽인 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때 자기를 만나는 자가 자기를 죽일까 봐서 두려워했습니다(창4:14).
욥은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음이 닥쳐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탄식했습니다(욥325).
욥의 고백처럼 오늘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갑자기 찾아오는 천재지변의 두려움, 재난의 두려움, 사고의 두려움 등 수많은 두려움 가운데 휩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 비상구를 만들고, 자동차에 안전벨트를 달고, 보험을 들어서 위험에서 보호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노력들은 우리에게 얼마만큼 유익을 주고 위로를 줄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 이 두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임마누엘의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호수 한가운데서 광풍을 만났습니다.
밤 4경까지 애를 썼으나 배는 오도 가도 못하고, 노도광풍 중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4경에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유령인가 하여 무서워 소리 지를 때 주님께서는 “내니 두려워 말라” - 하시고 제자들의 탄 배에 오르시니 배안이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마14:22~31).
이 세상에는 여전히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실 때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의 삶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실 때 사업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시55:22).
임마누엘 예수께서 맡아 주시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Ⅱ. 예수님께서 함께하실 때 실패하지 않습니다.
본문 10절에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은 능력의 손입니다. 능력의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 있고,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욥5:17~21).
하나님께서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하리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네가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3).
임마누엘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도, 함께 하사 두우시고, 물 가운데를 지날 때에도 함께 하사 도우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계시다면 성도야말로 실패할 수 없는 불사신의 존재 아니겠는가?
성경은 말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했습니다(잠24:16).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인생은 칠전팔기의 오뚜기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Ⅲ. 예수님께서 함께하실 때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본문 10절에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온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달라 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러나 선생님이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막9:23).
아이의 아버지는 “주여 내가 믿사오니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다.”고 했습니다(막9:26).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통로입니다.
요한사도는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요일5:4). 임마누엘 예수는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건강입니까?
그것이 물질입니까? 그것이 지혜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어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요셉의 크리스마스 마태복음 1장 18 ~ 25절
죽음이 오히려 부럽도록 고난에 시달리고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사40:1~2).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고하셨습니다(사54:7~8).
하나님께서 사랑의 권능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이사야는,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사49:13).
이렇게 바라던 위로의 날! 이렇게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마침내 다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지시고, 우리에게 의와 자유와 평화와 영생을 주시려고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이는 온 누리를 기쁨의 노래로 채우는 축복과 감격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찬송하였던 것입니다(눅2:1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위대한 역사는 이 날에 성취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그리스도를 섬긴다.
그리스도의 축제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탄축하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그를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어야합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아기 예수를 영접한 요셉은 어떻게 구세주를 영접하였는가?
요셉의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올바른 성탄의 자세와 의미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Ⅰ. 요셉의 크리스마스는 의로운 인격으로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의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을 본 요셉은 갈등과 고민이 생겼습니다.
드디어 요셉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마1:19).
얼마나 힘든 결단을 한 것인가?
나도 모르는 임신한 약혼녀를 가만히 돌려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침착하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인가?
그리고 얼마나 마리아를 사랑한 사람인가?
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벧전4:8).
요셉의 사랑은 마리아의 허물을 덮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과 고통이 어떠했겠는가?
그러기에 성경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요셉의 이러한 인격과 성품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요셉의 가정으로
아기 예수를 보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이 기쁨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하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사람은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의 잘못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이웃의 단 한 번의 실수조차도 관용하지 못하는 나는 아닌지?
그 원인은 무엇인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함으로
이웃의 잘못과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는 아닌가?
이 축복스러운 성탄의 계절에 요셉의 인격을 배우고 요셉의 인격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Ⅱ. 요셉의 크리스마스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한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트가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인지라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가 출산 날이 가까워오므로 아마도 해산 후에 가리라고 차일피일 하다가 호적 기한이 임박해서 할 수 없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에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는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여관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여기저기 다녀 보았지만 방을 구하지 못하고 갖은 노력 끝에 겨우 구한 것이 마구간 이었던 것입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도 짜증부리지 아니하고 동의 하였기에 그들은 마구간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 결과 그 밤에 아기 예수는 마구간을 방으로 삼고, 구유를 요람 삼아서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참된 크리스마스는 최선을 다한 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거기에서 아기 예수는 탄생하셨습니다.
요셉이 구한 마구간은 그 때의 그의 형편에서는 최선을 다한 예수님에 대한 봉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 베들레헴 들에서 양떼를 치던 목동들이 천사를 통하여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듣고 마구간으로 달려가서 제일 먼저 에수님의 경배 자가
되었고,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이예수님을 경배하기 전에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고 경배 드리는 축복을 받은 것은, 그들이 평상시에 자기의 직무에 최선을 다한 성실한 생활인이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일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근로자는 일터에서, 학생은 교실에서, 선생은 강단에서, 군인은 전방 초소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사업자는 사업장에서, 성도는 기도처에서 최선을 다한 봉사의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참된 크리스마스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Ⅲ. 요셉의 크리스마스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예수님만 높이는 경배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후 헤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시기를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어린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다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아기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셉은 다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은 오직 아기 예수를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옮겨가면서 정성껏 예수님을 양육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는 요셉이 얼마나 살고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요셉은 세상에 살면서, 자기의 삶을 살았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위하여,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오직 예수님을 위한 희생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날 우리 가정의 수많은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그러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요셉과 마리아의 정성을 다한 희생의 삶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구세주 예수를
성장시켰던 것처럼, 오늘 부모님들의 희생과 봉사가, 가족의 사랑이 곧고
바른 이 시대가 요구하는 자녀를 양육시키고, 부모의 믿음과 신앙이 하나님 앞에 사랑받고, 나라와 민족 앞에 쓰임 받는 일꾼을 키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셉의 전 생애가 예수에 대한 섬김과 경배 적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그 뜻은 그리스도를 경배한다는 뜻이고,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맞이하는 성탄절을 요셉의 생애처럼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고,
섬기는 우리들의 크리스마스 생애(Christmas-life)가 되시길 바랍니다.
영의 눈을 뜨고 새해를 바라보자 열왕기하 6장 8 ~ 17절
이 세상에는 서너 부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자연인, 육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물을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5감을 통하여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사물을 직감, 또는 지각을 통하여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성적 사람 혹은 지성적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물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영감의 사람, 신령한 사람, 믿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북 이스라엘 여호람왕 때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는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도담성을 밤중에 겹겹이 포위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를 수종드는 종자가 일어나 나가보니 아람의 말과 병거가 성을 둘러 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엘리사에 고하되 “아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사가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왕하6:16).
그리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했습니다.
육의 눈으로 본 사환은 도단성을 둘러싼 아람 군대를 보았습니다.
영의 눈으로 본 엘리사는 도단성을 둘러싼 천군 천사를 보았습니다.
오늘 2006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 영의 눈을 활짝 열고 대망의 새해를
바라 봅시다.
우리가 영의 눈을 열고 보면 무엇을 볼 수 있는가?
Ⅰ. 영의 눈을 열고 보면 비젼을 볼 수 있습니다.
장군과 병사, 사장과 사원, 군자와 소인, 영웅과 겁쟁이, 성도와 불신자,
바울과 네로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평가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보는 것의 차이입니다.
무엇을, 더 넓게, 더 깊이, 더 많이, 더 높이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위치와
그 사람의 수준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의자의 높이 따라서 보는 것이 다르다고 합니다.
흔히들 한 사람의 빈부차이는 소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오해도 없습니다.
빈부의 차이는 물질의 다과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빈부의 차이는 오직 볼 수 있는 능력의 차이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돈 부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강의 부자, 믿음의 부자, 사랑의 부자, 꿈의 부자 지식의 부자, 지혜의 부자, 건강의 부자..... 세상에는 돈보다 귀한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울밑에 핀 작은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궁궐 같은 저택에 사는 사람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근심 걱정 하나 없는 마음이 부자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비록 가진 재산은 없었지만, 단지 그가 더 높은 것은 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세계를 정복한 씨저보다 위대하고, 솔로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은 더 높이, 더 멀리, 더 깊이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인 눈을 감고, 육적인 눈을 떠서 세상을 보니,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내 저금통장의 동그라미를 세어보니 남의 것보다 적어서 가난하게 생각되고, 내 집이 남의 집보다 좁아서 내 자신이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을 열어서 다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바꿀 만큼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나는 천국을 소유할 만큼 큰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하고 무한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나를 둘러 보호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해 보여도 저들 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는 자 같으나 늘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하는 자 같으나 늘 성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자 같으나 위대한 자들입니다.
영안을 열어서 세상을 보면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안을 열고 앞을 보면 무한한 가능성의 비젼을 볼 것입니다.
Ⅱ. 영안이 열린 자는 무한한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한국에 천만 명이 넘는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진실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나님께서 내 가까이 계셔서 나를 돕고 내 삶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이 믿음 위에 굳게 선 성도는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내 삶과 신앙생활을 이원화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오면 성도가 되고, 밖에 나가면 세상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을 열고 바라보면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여화와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시4:8).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일 만큼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 백 마리의 이드로의 양을 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이 둔하여 남을 설득한다든지, 말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사
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역사상 유례없는 방법으로 출애굽을 시켰습니다.
무엇이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는가?
육신의 힘이 아닙니다. 육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7장 5절에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고 했습니다.
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었는가?
“내가” - “내 손을 펴서” -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모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수종을 든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질병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실패로 우겨쌈을 당하고 낙망과 좌절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어도 영안을 열고 보면 나를 불 말과 불 병거로 둘러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능히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Ⅲ. 영안이 열린 사람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본문 17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열왕기하 19장의 말씀에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하룻밤에 아람의 군대 18만 5천 명을 모두 죽였다고 했습니다.
한 천사가 18만 5천명을 당할 수 있다면 사람 숫자보다 더 많은 천군 천사가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는가?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믿음의 사람 엘리사는 승리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미래에 보장된 축복이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히11:1).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우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대적도,
어떠한 난관도, 어떠한 재난도, 어떠한 사고도, 능히 물리치고 승리하는
2006년 한해가 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리하는 2006년이 됩시다 히브리서 11장 24 ~ 26절
우리가 가진 믿음은 무시로 능력이 되기도 하고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기도하고, 또한 능력의 장이요. 소망의 장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죽은 자들이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장에는 믿음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성공한 열여덟 명의 짤막한
성공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위대한 신앙인 모세를 중심으로 신앙의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2장에서 한 부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풍성한 소출을 거둠으로 새 곡간을 지어야했습니다.
그는 농사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성공하고도 궁극적으로 실패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40년의 애굽의 궁중생활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궁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동생활을 했지만 자기 양 한 마리도 없는 실패한 양몰이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양치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대 애굽을 지배하는 바로 왕 앞에 섰습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 즉 우리가 사흘길 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라고 했습니다(출5:3).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힘으로도, 권세로도 아무도 당할 수 없었던 애굽의 왕 바로는 모세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장정 60만과 모든 백성과 짐승들을 거느리고 역사상 유례없는 민족의
대 이동, 출애굽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렇게 위대한 승리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가 40년 동안 애굽의 궁궐에서 배운 고등학문 때문인가?
성경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 비결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23절도 믿음, 24절도 믿음, 27절도 믿음, 29절도 믿음, 30절도 믿음 -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승리하고,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대망의 2006년을 시작하면서 이 모세의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Ⅰ. 거부하고 버리는 결단력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라고 했습니다.
애굽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애굽의 문명은 어떠한 문명인가?
영국의 대영 박물관이나, 불란서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이집트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애굽의 문명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황금의 문명”이었습니다.
왕의 관을 모셔놨던 집이 황금집입니다. 왕의 관이 황금입니다.
미이라의 가면이 황금입니다. 왕의 마차가 황금입니다.
왕의 홀이 황금입니다. 왕의 활이 황금입니다. 왕의 화살이 황금입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것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갈대상자에 담겨져 나일강을 떠내려가는 자신을 구하여 키워준 공주의 인정까지도 거절했습니다.
만약 모세가 이토록 엄청난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릴 수 없었다면 어떻게 믿음으로 승리한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겠는가?
그가 애굽의 왕으로서 혹은 애굽의 왕자로서 한평생 호의호식하고 살다가 죽었다면 오늘 누가 그의 이름을 기억이나 하겠는가?
애굽의 나라가 있고, 애굽의 문명과 문화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시대를 살았던 왕의 흔적은 황금 미이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승리자! 위대한 신앙인 모세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대화 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결단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그리스도냐? 벨리알이냐?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빌3:8).
성도의 삶은 거절하고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세상 욕망이 다 있습니다.
주일 날 스키 타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름철에 바캉스 가고 싶습니다.
눈 한 번 찔끔 감으면 엄청난 돈이 들어옵니다. 그래도 그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부정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문을 닫으면 엄청난 매출의 손실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왜?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그것들 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손해는 누가 보상하는가?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성도는 세상 등지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입니다.
세상 줄 끊고 믿음의 줄 붙드는 사람입니다.
만약 성도가 한 손에 세상 붙들고, 한 손에 하나님 붙들고 고민하고 있다면
둘 다 놓치고 말 것입니다.
성도가 만약 세상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두 눈이 뽑힌 삼손처럼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설득할 유창한 말 재주가 없었고, 바로를 억압할 천군만마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세상 부귀영화를 던져 버린 결단력뿐이었습니다.
이 큰 믿음의 결단력이 바로를 무릎 꿇게 했습니다.
세상 것 버리면 하나님께서 신령한 것으로 채우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06년 한 해도 이 믿음, 이 결단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Ⅱ.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본문 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 라고 했습니다.
왜? 모세는 세상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 했는가?
성경은 현재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8:18).
그래서 바울은 매를 맞고, 돌로 맞으며, 파선을 당하고, 굶고, 춥고, 헐벗고, 목마르고 수고하고, 주리고, 잠을 못자도 예수를 전한다고 했습니다(고후11:24~27).
모세의 생애도 고난의 생애였습니다.
미디안 광야의 40년! 양과 더불어 먹고 자는 삶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기록한 모세 5경에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겸손이고, 인격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은 쾌락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잘사는 삶이 아닙니다.
눈물이 있어도 좋습니다. 역경이 있어도 좋습니다. 핍박이 있어도 좋습니다.
수고와 희생과 땀과 눈물과 배척의 삶이 성도의 삶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마5:10).
천국이 나의 것 이라면 잠시 잠깐 받는 고난을 왜 내가 두려워하겠습니까?
Ⅲ. 상급을 바라보는 확신의 믿음입니다.
본문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봅이라”고 했습니다.
봄에 열심히 일한 농부는 가을에 풍성한 소출을 바라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을 바라봅니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은 기쁨의 합격을 바라봅니다.
광야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것도 한 두 달도 아니요 무려 4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전갈과 독충과 사막의 모진 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이겼겠습니까?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소망인가?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11:6)고 했습니다.
상주시는 하나님!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빌3:14).
오늘 우리는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죽도록 충성한 종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습니까?(계2:10)
그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정진하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상급이 현세적으로는 건강일수도 있습니다. 사업일수도 있습니다.
물질일수도 있습니다. 자녀일수도 있습니다.
종말론적으로는 영생복락 면류관입니다.
2006년에는 내 상급을 준비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시편 81장 10 ~ 16절
벌은 알에서 깨어나서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달라집니다.
꽃가루를 먹는 애벌레는 일벌이 되어서 평생일하다가 죽고, 로얄제리를 먹는 애벌레는 여왕벌이 되어서 평생 벌들을 다스리고 종족을 탄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처마 밑에 둥우리를 틀고 새기를 깐 제비는 목을 길게 늘이고 입을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줍니다.
우리 속담에도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입을 크게 열고 부르짖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곤비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 받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절실한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마7:6).
하나님은 은혜를 사모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42편 1절 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셨습니다.
“네 입을 널게 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Ⅰ. 감사의 입을 넓게 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애굽 땅은 어떤 땅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 하던 땅입니다.
무려 430년 동안이나 주권도 없고, 자유도 없고, 소유도 없고, 오직 주인인 애굽을 위하여 희생하면서 살던 땅입니다.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품삯 한 푼 받지 못하고, 평생 밭 갈고, 논 갈아도 땅 한 평이 없던 삶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이 히브리 노예들을 사용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받고, 천대 받고, 멸시 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며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된 애굽에서 구원하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공로도 아니요. 그들의 노력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죄 아래 팔려 사단의 종이 된 비참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우리의 공로도 아니요. 우리의 노력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큰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금을 바쳐 보답할까? 은을 드려 보답할까?
베드로사도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벧전1:18~19).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값 주고 우리를 구속하셨다면 이 생명의 빚진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 받은 성도는 입을 넓게 열고 감사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 6절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했습니다(시136:26).
받은 은혜 감사! 주신 은혜 감사! 감사 위에 감사가 넘치는 보은의 삶을 사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Ⅱ. 기도의 입을 넓게 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1절에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는 다는 말씀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소리를 들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53편 2절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 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왜? 응답해 주시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하십니다.
참으로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신앙인, 위대한 지도자는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엘리야, 엘리사, 베드로, 바울, 요한, 히스기야
- 이들은 누구 못지않게 혹독한 난관을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기도였습니다.
성경은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사58:9).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시50:15).
예수님의 약속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7:7).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입을 크게 열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Ⅲ. 입을 크게 열고 부르짖는 기도의 응답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의 모든 대적을 무찔러 주십니다.
본문 14절에 “그리하면 내가 저희 원수를 속히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모세의 손이 홍해를 향하여 들릴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여 홍해를 건널 때,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모세가 손을 내밀 때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되었다”고 했습니다(출14:27).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도처에 도사린 여러 가지 대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있고, 그것이 사고일 수도 있고, 그것이 천재지변일 수도 있고,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면 해결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모든 대적은 하나님만이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고 승리하는 삶이야말로 성도가 누리는 축복 중의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