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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배설교 종합편7

공 상희 2008. 5. 22. 15:02
 

신명기 11장 8~12절새초부터 세말까지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유수 같은 세월”이라고 합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르고, 끝없이 흘러간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낸다” 고 했고(욥7:6),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간다”고 했습니다(욥9:25).


실로 세월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북처럼 빨리, 우체부의 발처럼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2003년 한 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각오도 해보고 결단도 했는데 지금은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마루턱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는

마지막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과녁을 향하여 날아간 화살은 도중에 돌아오거나 멈추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땅위에 쏟아 버린 물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황금 같은 기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 중국시인 도연명은 “성년을 거듭 오지 아니하고 한 날은 두 번 새벽되기 어렵다 때 미쳐 힘쓸 것이니 세월은 나를 위해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쉬움으로 남는 가버린 시간들이야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태양은 매번 새롭게 떠오릅니다.

돌아오는 2004년 새해에는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한 해가 되도록 또 한번 결단하면서 새롭게 도전하는 새해 되길 바랍니다.


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이 됩시다.


본문 1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땅은 어떤 땅인가? 그 땅은 너희가 떠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않은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애굽 땅은 기름진 침적토입니다.

농사를 짓는데 거름이 필요하지 않은 땅입니다.

국토의 중앙부를 흐르는 대 나일강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풍부한 농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농사는 관계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인간이 수차를 돌려서 물을

퍼 올리는 수고가 뒤따릅니다.

즉 애굽의 부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일부 평야지대를 제외하고는 물이 부족하고, 저온 건조하여 곳곳에 불모지가 산재해 있는 땅입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일차적인 자연환경을 일컫는 말이

아니고,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새 하늘과 세 땅에서의 영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예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를 흡수하는 땅이란 말은, 도처에 골짜기와 샘이 있어 땅에 내린 빗물을 가

두어 둔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삶이 인간의 노력의 결과라면, 가나안의 삶은 하나님께서 때맞추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고 인간의 모든 수고를 대신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지고 사는 삶과,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져

주시는 삶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한해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키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들의 삶이야말로, 애굽의 땅과 같이 좋은 환경과 여건은 아니었습니다.

실로 가나안 땅과 같이 건조하고, 메마르고, 환경도 좋지 않은 불모지 같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초부터 세말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불모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감찰하신다면, 나라가 이 꼴이 되고, 세상이 이 꼴이

될 수 있느냐? 고 항변 할 수 도 있습니다.

실로 양심이 있는 보통 사람들의 고통은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시행되지 않음으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함”을 보는 것입니다(전9:11).


솔로몬은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고 통탄했습니다(전9:12).

욥은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고 했습니다(욥21:7).

하박국 선지자는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 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합1:13).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고 하셨습니다(겔33:11).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은혜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기다리심이 은혜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그렇게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들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주고, 전예 없는 불황 가운데서도 나라 경제가 성장하고,

우리들의 일터와 생업이 복 받은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대환란기에 주님의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한 축복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Ⅱ. 해가 가기 전에 모든 부채를 청산합시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주인은,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허비인가? 맡겨진 재물을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쓴 것이 허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하셨습니다(고전10:31).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고전4:2).

그러므로 청지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해야합니다.


물질을 맡기셨는가? 왜 맡기셨는가? 주인의 일을 하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건강을 맡기셨는가? 주의 일을 하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맡겨주신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무엇을 위해 사용했는가?

나의 시간과 건강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정당하게 사용했는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얼마나 남에게 은혜를 끼쳤는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

우리네의 옛 풍습도 묵은 빚을 새 해로 넘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갚지 못한 빚이 있거든 다 갚읍시다.

하나님께서 나눠주라는 맡긴 것을 내 것으로 알고, 먹고 마시고, 허랑방탕하면

주인께서는 “셈하자” “네가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것까지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묵은 빚을 갚고, 새 해를 맞이합시다.


Ⅲ. 최선의 삶을 삽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노아 홍수 때와 같은 최악의 시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창6:6).

그러나 노아는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의인의 삶,

즉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빛이 없어 어두울수록 반딧불의 빛이 더욱 밝은 것처럼, 이 세상이 죄악으로 인하여 어두워 졌으니 성도의 빛된 삶, 의로운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온전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죽은 고기는 물결에 떠내려가지만,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법입니다.


혼탁한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가지 않고, 시대의 조류에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한 해의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가라   여호수아 1장 2~9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2:16).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임의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피조물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역사 속에 태어났으므로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세상에 태어났음으로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염을 얼마나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었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에게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수1:2).

이 진군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 아니라 오늘 2004년 한 해를 받은 우리에게도 주신 명령입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가라”

이 말씀을 2004년 한 해의 삶의 지표로 삼아서 우리에게 주신 한 해의 시간들을 선용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Ⅰ. 누가 요단을 건너는가?


본문 2절에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 ”라고 했습니다.

이 백성은 어떤 백성인가? 정월 14일 밤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고 방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막은 사람들입니다.

그 날 밤에 애굽에 내린 장자 재앙에서 구원받고 애굽을 등지고 나온 출애굽한

사람들입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고,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지난 40년 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불신앙과 불순종, 원망과 불평으로 인하여 40년 어간에 광야에서 모두 소멸되고, 가나안 행군 노중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누가 요단을 건너는가? “일어나 - ”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욘1:6).

요나처럼 배 밑창에서 잠을 자는, 자는 요단을 건널 수 없습니다.

실의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 - ” “이것은 되지 않는다”는 부정적 자기 체면을 떨치고 일어난 사람입니다.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입니다. 육신의 질병, 심령의 질병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허영의 병, 명예의 병, 탐욕의 병, 교만의 병, 안일의 병, 시기 질투의 병,

황금의 병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나태의 병에 걸리면 성경 보기를 싫어하고, 기도하기를 싫어하고, 예배드리기를

싫어하고, 땀 흘려 일하기를 싫어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기를 싫어합니다.

황금의 병에 걸리면, 감사를 못하고, 십일조도 못하고, 남을 돕지도 못하고,

전도도 못하고, 선교도 못합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역발산 삼손도 드릴라의 무릎을 베고 죽음의 잠을 잘 때 그의 능력도 잃어버리고, 그의 힘도 잃어버리고, 눈도 잃어버리고, 명예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엡2:1).

죄를 지으면 영혼이 죽습니다. 죄를 지으면 담대함을 잃어버립니다.

죽은 자는 움직일 수없습니다. 죽은 자는 능력이 없습니다.


누가 요단을 건너는가?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내 딛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을 의지하고 요단이 갈라지기를 바라고 강가에서 있는

사람은 평생을 기다려도 요단을 건널 수 없습니다.

주님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요단강에 발을 내 딛는 사람 앞에 요단강은 갈라지는 것입니다.

환경이 나아지면, 건강이 좋아지면, 시간 여유가 생기면, ......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은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 이 모습 이대로 , 병든 대로, 가난한 대로, 부족한 대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소원하면, 병들었으면 고치시고, 능력 없으면 능력주시고, 물질이 없으면 물질을 주시고, 부족하면 채우셔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사용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서 요단을 건너 가야하는 것입니다.


Ⅱ. 무엇이 요단인가?


여호수아 3장 15절에 “요단이 모백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무주공산이 아닙니다.

난관과 장애가 겹겹이 쌓여있는 곳입니다.

그들이 요단을 건너는 것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새로운 도전의 시작인 것입니다.


헐몬산의 눈 녹은 물이 요단강에 차고 넘치는 모맥 거두는 시기에 그들은 이 강을 건너야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 - 그러나 꼭 극복해야하는 모든 것이 요단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건강일수 있습니다.

너무 건강이 부족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고, 때로는 건강이 넘쳐서 세상에 몰두하느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도 합니다.

때로는 물질이라는 것이 요단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을 수 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 너무 부요해서 ...


마태복음 9장 21절의 청년은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 하실 때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하락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의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은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봐야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용서하라”고 했습니다(눅14:20).


때로는 부모나, 가정이, 재물이, 사업이 - 때로는 오락이, 취미가,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돌파하는 것이 요단을 건너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의 말씀에도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하셨습니다.

발바닥으로 밟는 다는 것은 노력과 수고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네 눈으로 보는 것을 준다” “네가 가리키는 것을 준다”가 아닙니다.

이 한해 동안 우리들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와 난관을 극복합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롬11:29).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결코 철회함이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왜 요단을 건너가야 하는가?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창13:15).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축복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 9절에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 때문에 망설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길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형통케 되는 길입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시1:1).


이 한해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떨치고 일어나서 요단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승리의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을 만납시다  사도행전 17장 24~31절



주후 50년 경 사도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헬라문화의 중심지인 아덴에 들렀습니다.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레스토파네스 등 세계적 대 철학자를 배출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아덴에는 여기저기에 우상의 제단들이 있고, 산봉우리마다 신전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올라서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하였습니다(행17:23).

그들은 무엇이든지 무턱대고 믿는 종교심은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요 형식이었을 뿐, 신을 믿는 신앙심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덴 사람들을 향하여 참신이 누구이며, 그 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해 주겠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도, 종교적인 형식도 있고, 예배에 참예하기도하고, 또 종교행사에 열심을 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개인적인 신앙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체 주일날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면, 그 사람은 종교인은 될 수 있는 지라도 신앙인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시간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나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나의 하나님을 재발견하고, 그 분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Ⅰ. 나의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5절에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보통 1분 동안에 16회 내지 17회 호흡을 합니다.

이것을 계산해 보면 하루에 23,000번 내지는 24,000번 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 호흡 가운데 계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 하나 하나를 주장하셔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더러 병원 응급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약물에 의지하여 투병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에게서 약물 투입을 중단하다든지,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면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숨 한번도 쉴 수 없고, 자기의 생명을 하루도 연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23,000~24,000번 숨쉬는 호흡은 누가 주장하는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인 줄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나는 스스로 단 한번도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면,

내 생명이 어찌 나의 것이고, 나의 삶이 어찌 나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존재가 되었으니 내 삶이 귀하고, 내 생명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내 실존 자체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실존,

자기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존 신앙위에 서 있던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습니다(고전15:10).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롬14:8).


Ⅱ. 나의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27절에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할 때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사55:6).

하나님은 나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땅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헤롯의 궁전으로 오시지 아니하시고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계시고, 더듬으면 만질 수 있는 곳에 계십니다.


요나의 배 밑창에도 계시고, 물고기 뱃속에도 계셨습니다.

루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야곱의 곁에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잠을 깬 야곱이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창28:17).

그런데 아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신은 아주 멀리 - 인간을 떠난 영역에 존재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끔 신이 세상에 내려오면 성스러운 자리, 높은 자리에 계셔야한다고

생각하며 높은 산등성이에 제단을 쌓고 인간과 격리된 곳에 신전을 세웠습니다.

우상의 선각, 아크로 리스 신전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행여나 아데네 사람들과 같은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멀리 하늘에 신 분! 그래서 죽음 후에나 하늘에서 만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을 특별한, 유명한 주의 종들과는 함께 하셔서 그들이 기도하면 들으시고,

그들이 안수하면 병이 낫고, 그들이 축복하면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잘못할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하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창28:15).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입니다.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더듬어 붙드시는 성도님 되시기를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시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Ⅲ. 선악간에 심판 하시는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1절에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전도서 12장 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엔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8).

심는 대로 그두는 것은 땅의 법칙이요, 하늘의 법칙입니다.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둘 것인가? 야고보 사도는 “화평을 심고 의를 거두라”고

했습니다(약3:18). 바울은 “효를 심고 복과 장수함을 거두라”고 했습니다(엡6:3).

시편 126편 5절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많이 심고 많이 거둡시다. 귀한 것 심고, 귀한 것 거둡시다.

긍휼을 심고, 사랑을 거두고, 땀을 심고, 열매를 거두는 복된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

형통의 복을 받자   열왕기 상 2장 1~4절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복되고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에 자기가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형통하다 - 하면 도모하는 모든 일들이 어렵지 않게 풀려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힘들고 어려움이 없는 삶을 형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형통하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형통함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형통하다”는 히브리말의 어원은 “지혜롭게 행한다”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성경적 의미는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형통하다‘라고 합니다.

성경에 형통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은 요셉입니다.

창세기 39장 2~3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형통한 삶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형통한 삶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죽음에 임박한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주는 교훈을 중심으로 형통한 삶의 길에 대하여 생각하길 원합니다.


Ⅰ.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대장부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내답고 씩씩한 남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장부가 되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므로 “힘쓰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대장부란 어떤 사람인가? 용기 있는 사람을 대장부라고 합니다.

대장부는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협조적이고, 긍정적이며, 용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방부의 기상은 굳세고, 늠름하고, 의연해야 합니다.

대장부는 마치 거목과 같은 사람입니다.

환경에 흔들림이 없이 굳건해야합니다.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힘과, 역경과 싸우는 의지, 신념을 관철시키는 기백,

유혹을 극복하는 정신력, 박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인내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대장부는 망망대해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다는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도,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도,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도, 가정에서 나오는 생활오수도,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아니하고 다 포용합니다.

그것들을 다 정화시키고, 다 소생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장부 중의 대장부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인생들을 다 포용하셨습니다.

죄인도, 원수도, 다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5:44).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18:22).

예수님을 향하여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지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다윗의 눈에 비췬 솔로몬은 지혜는 많아서 꾀는 있었는데, 남아의 호연지기는 보족했던 듯 합니다.

그릇은 그 크기에 따라 담는 법입니다. 형통의 복은 큰 그릇에 담는 것입니다.


Ⅱ. 말씀을 지키는 자가 형통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며,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며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고 했습니다.

“명을 지킨다”는 히브리어 “샤마르”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것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신앙의 용사였습니다.

그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보고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 갈 때 형통의 복이 임하고, 불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 환난이 닥치고 불통의 삶이였던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경시하고는 전정한 번영과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난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시고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힘을 주십니다.

성경은 생과 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벧전1:24~25).

하나님께서 이 말씀 가운데 계시므로 이 말씀은 무너질 수 없고,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자는 구원을 얻고, 이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2장 14절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계시록 22장 7절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생활의 기준이 됩니다.

이 말씀의 잣대에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을 재어보아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자신의 삶을 부단히 개선해가는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형통한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 앞에서 진실히 행할 때 형통해집니다.


본문 4절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 행하면-”라고 했습니다

“진실하게”란 말의 히브리말은 “베에메드”입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온 몸을 다스려 행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했습니다(약2:22).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약2:26).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공기를 호흡해야 하는 것처럼,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만약에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는 다면 성도는 능력 있는 성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넘어야할 산도 있고, 져야할 짐도 있고, 이겨야할 유혹도 있습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내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공급되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능히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통하여 얻은 힘은 무엇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가?

헌신의 삶을 위하여 써야합니다.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특별히 물질의 드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말3:10).

하나님께 드려지는 물질, 시간, 몸, 건강, 정성, 사랑, 희생, 봉사 - 모든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형통으로 인도하는 길이 됨을 �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버리고 갑시다   빌립보서 3장 13~14절



바울은 인생(人生)을 경주하는 경주자에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푯대를 향하여 전심전력 질주하는 경주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목표가 사업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목표가 학문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술을 위해, 어떤 사람은 과학을 위해,

어떤 사람은 의술을 위하여 평생을 바쳐 헌신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던지 확실한 목표를 세우고 일로매진 하는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 역사는 창조되고 인류 문명은 발전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푯대는 이러한 세상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푯대는 진리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요8:32).

경주자에게는 이 목표가 확실해야 승리할 수 있고, 승리하는 경주자에게만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영적 경주에 임하는 성도에게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빌3:12~13).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경주자가 버리고 가야할 것은 무엇인가 ?

최선의 경주를 하는데 짐이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 ?


Ⅰ.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는 습관입니다.


삼상 12장 23절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 ”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왜 죄인가 ?

메시야로 알았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예수님을 따르던 두 제자는 낙심 중에 엠마오로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동행을 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집에 이르러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비로소 주님을 알아 볼 때,

예수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성도의 축복과 특권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령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아니하니 눈이 가려져서 곁에 계신 주님을 깨달을 수조차 없으니 그 삶에 무슨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접촉하지 못하고,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기도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을 상실한다면 기도하지 않는 행위야 말로 죄악 중의 죄악인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호흡하지 아니하면 육체가 죽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질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호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 좋은 공기를 섭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위에는 성도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 넣어줄 신령한 공기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하늘나라의 신령한 생기. 즉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의와 화평과 기쁨과 희락이라는 신령한 공기로 성도의 영혼을 새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50편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Ⅱ. 불순종을 버려야합니다.


인간의 분쟁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부터 왔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창2:17).

그러나 하와는 이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그의 남편 아담에게도

먹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땅은 저주를 받고,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식물을 먹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여인은 잉태하는 고통을 겪어야 생산을 하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요14:15).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삼상15:22).


부모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 순종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의 사르밧의 과부가 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가루로 떡을 구워 먹고 자식과 같이 죽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네가 떡을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했습니다(왕상17:13).

그녀는 그 말에 순종하여 그대로 했더니 지면에 비가 내리는 날까지 가루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순종의 사람 노아를 볼 수 있습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7:13)

노아는 이 말에 순종하여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 배를 짓고 홍수 심판 날에 그의 여덟 식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어라”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두 배에 차고 넘치는 고기를 잡았습니다.(눅5:4).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 그 말씀에 순종한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쳤습니다(왕하5:1).


신학자 본헤퍼는 “신앙은 주님의 명령과 순종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과 축복은 즉각적인 순종을 통해서 옵니다.

거기에 “왜 ?”가 들어가면 그것이 곧 불신앙이요. 불순종인 것입니다.


Ⅲ.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관리하는데 제일먼저 생각할 것은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수를 맺고 풀지 못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크리스챤의 심령은 언제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마18:22). 일흔 씩 일곱 번의 용서는 끝없는 용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하셨습니다(마5:44).


잠언 14장 30절의 말씀에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라”고 했습니다(마5:43).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바라”고했습니다(요일 3:14~15).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살인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합시다 ! 사랑합시다 !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는 죄 을 지고서는 최선의 경주를 할 수 없고,

최선의 경주를 하지 못한다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상 받는 경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하심이 없다  요나서 3장 1~6절



새해가 되면 우리는 새로운 결단과 소망을 가지고 한 해를 출발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바람은 얼마가지 아니하여 실망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 ?

우리의 삶은 오늘의 삶도 어제와 같고, 이해의 삶도 지난해와 같이 별로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실망과 절망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가운데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롬8:28).

성도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소망의 하나님을 만나시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Ⅰ. 하나님에게 실패란 말은 없습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지워져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스올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도 자기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었습니다(욘2:10). 요나는 철저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는 믿음에서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요나를 버리시지 아니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육지에 내쳐진 요나를 찾아오셔서 “이제 너는 집으로 가라”고하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하셨습니다(욘3:2).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심판의 선포입니다(욘3:4).

요나에게 임한 두 번째 명령도 첫 번째 요나에게 임한 명령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사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게는 실패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세 번째, 우리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18:22).

이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기회를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허물과 죄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십니다.

실패한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처럼 -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만 있다면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지금 요나처럼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 있습니까?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이 믿음을 붙잡을 때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승리로 바꾸실 것입니다.


Ⅱ. 하나님께 쓸모없어 버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나는 믿음도 버리고, 사명도 버리고, 불순종하고 불신앙하여 바다에 던져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나서 1장 17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이나 돌발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롬8:29~30).

창세전에 - 미리 - 이미 -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는 “마침”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고 했습니다(욘1:3)

행운처럼 찾아오는 우연한 기회는 사탄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던져지는 바다 밑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했습니다(마17:29).

바다 밑에 동전을 물고 있는 고기를 이미 예비하시고 제일 먼저 낚시를 물게 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

불순종의 종 요나는 이미 예비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오늘 나와 여러분들도 이미 예비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쓸모없어 버림 받는 하나님의 종은 없습니다.

부족하면 채우시고, 무능하면 능력을 주시고, 약하면 강하게 하시고,

죄가 있으면 회개케 하여서 고쳐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노아도, 모세도, 다윗도, 베드로도, 바울도, 모두 쓸모없던 인생들을 온전케 하여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쓸모없어 바다에 버려진 요나를 다시 한번 붙드신 하나님께서 오늘 나와 여러분을 붙드시고, 두 번째 사명을 주시고 사용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하나님께 절망적인 환경은 없습니다.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절망적인 환경이 있겠는가? 그러나 요나가 회개하고 기도할 때, 그 환경이 변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었습니다.

하만의 악한 궤계에 의하여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로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사는 자들에게 절망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롬8:28).

절망적인 환경은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실패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실패 앞에 좌절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환경이 나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하여 승리하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누가복음 18장 1~8절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처럼 적군을 물리치고, 병에서 고침받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신앙 파수를 위하여 - 바디메오처럼 빛을 위하여,

엘리야처럼 비를 위하여, 한나처럼 자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베드로처럼 지붕에서, 히스기야처럼 침대에서,

예수님처럼 산에서, 하갈처럼 광야에서, 야이로처럼 길거리에서,

다윗처럼 동굴 속에서, 죽어가는 강도처럼 십자가 위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나 세리처럼 짧게,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길게, 모세처럼 경건하게, 한나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침묵 속에,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큰소리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울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새벽에, 다윗처럼 아침에, 다니엘처럼 정오에, 실라와 바울처럼 자정에, 사무엘처럼 어린시절에, 디모데처럼 청년시절에, 백부장처럼 장년시절에,

시므온처럼 노년에, 욥처럼 질병으로 아플 때, 야곱이나 모세처럼 임종 순간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하셨습니다(막11:24).

야고보 사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약1:6).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낙심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적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때 낙심하면 안 되는가?


Ⅰ. 예수를 믿다가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 들어 넘어지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예수를 믿지 않은 것만 못하고, 중도에 예수를 포기하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낙심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예수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람 때문에 낙심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목사가 어떻고, 집사가 어떻고, 구역장이 어떻고, 회장이 어떻고,

어떤 성도가 어떻고, ....” 그래서 상처 받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확실한 신앙의 대상을 바로 정해야 합니다.

신앙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어야지, 사람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과 함께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가는 제사장의 뒤를 따라 갈 때 2000 규빗을 떨어져서 따라가라고 했습니다(수3:4).

사람가까이 따라 가게 되면 사람 때문에 실망하게 되고, 너무 멀리 떨어져서 따라 가면 법궤(하나님)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천사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의인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병원에 병든 환자들이 가는 것처럼 교회에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9:13).


교회는 회개하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악마 같은 인생들이 천사 같은 사람이 도기 위해서 모이는 곳입니다. 성화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성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는 성질 급한 사람도 있고, 혈기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 주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아직까지 구습을 버리지 못하여

술 마시는 사람도 있고, 담배 피우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천국의 환상을 가지고 나왔는데, 천국 같지 않은 지상 교회의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왜? 교회는 겉으로 보아서는 세상과 별로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이 보여도,

배추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것처럼, 허물 가운데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개를 통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 사함 받고, 죄 사함 받아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이 모양이라면,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비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홉 가지 좋은 점은 보지 못하고, 한 가지 단점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용하는 사람은 한 가지 단점은 보지 아니하고,

아홉 가지 장점을 보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보고, 사람을 따라가다가, 믿음에서 낙망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Ⅱ.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이유 없는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입니다.

내 스스로는 정직하게 살려고 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려고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힘쓰고, 애쓸수록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 닥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임하기는커녕 세상의 악한 사람도 만나지 아니하는 환난을 만나는 것입니다.

남이 잘돼서 배 아픈 것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이요 공의라면, 축복은 없을지라도 환난은 닥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욥이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라고 절규했습니다(욥21:7~9). 시편 기자도 “나는 거의 실족 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시73:2~3).


그런데 히브리 기자는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히10:35-39).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낙망치 맙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기도하다가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본문 1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너희에게 비유로 하여....”라고 했습니다.

맷돌은 천천히 돌려야 곡식이 부드럽게 갈립니다.

급하다고 빨리 돌리면 가루가 거칠어집니다.

큰 강물은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아도 빨리 흘러갑니다.

그러나 도랑물은 빨리 흐르는 것 같아도 더디 흐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많이 지체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시간은 지체하거나 머무르지 아니하고 정하신 예정 따라서 부단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되돌아온 반송소포가 많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응답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고 기도하다가

돌아갔기 때문에 “수취인 불명”이라는 응답의 소포가 많이 되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하늘 문이 닫혀 우로가 내리지 않을 때 엘리야는 얼굴을 두 무릎사이에 묻고 기도하면서 사환에게 일곱 번 까지 언덕에 올라가 바다를 살피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째 사환의 대답은 “바다에서 사람의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입니다.”라고 했습니다(왕상18:44).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눅18:8).

기도하고 낙심치 말고 끝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들어 주시리라”입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납시다   이사야 44장 1~5절



자신의 힘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하고, 육체적으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 먼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가까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너무 밝은 빛도 볼 수 없고, 너무 어두워도 볼 수 없습니다.

너무 큰 소리도 듣지 못하고,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커다란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시121:2).

나의 도움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무엇으로 그가 도움을 삼느냐에 따라서 그 삶의 질과 값어치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시146:5).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은 인생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Ⅰ. 갈망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본문 3절에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라고 하셨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42편 1절은 “하나님이시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여덟가지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 첫 번째 복이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5:3).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는 자는, 가난한 자의 심령 같이 겸손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가급함 같은 절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대저 내가 갈한자에게 물을 주며” - 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은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삭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이 난 사람입니다.

성품이 호탕하고, 대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동생 야곱은 몸에 털 하나 나지 않은 여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고, 어머니 치마폭에 매달려서 부엌에나 들락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야심이 있어서, 형이 배고픈 기미를 알고는 팥죽 한 그릇에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에서의 축복 기도도 가로챘습니다.

외삼촌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갖은 꾀를 부려서 얼룩얼룩한 양의 새끼를 낳게 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했습니다. 교활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에서가 훨씬 더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롬9:13).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받기 위해서 배가 고파도 내 몫의 팥죽 한 그릇을 포기했습니다.

그것을 받기 위해서 14년 동안의 머슴살이의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뚝발이가 되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떤가? 세상적인 여러 가지 장점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꼭 받아야 겠다는 갈망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습니다.

성경은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잠7:6).

축복을 축복인 줄 모르고, 귀한 것을 귀한 줄 모르고, 은혜를 은혜로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다 훌륭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목말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실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Ⅱ. 어그러진 삶을 회복시키십니다.


본문 3절에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마른 땅은 어떤 땅인가? 비가 내리지 않는 땅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풀이

자라지 못합니다. 풀이 없는 땅에서는 짐승이 살 수 없습니다.

마른 땅은 황폐한 땅, 불모지의 땅, 광야 같은 땅입니다.

흔히 인생의 삶을 광야 같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없고, 쉴 곳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곳입니다. 더 확실한 대답은 광야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수 없는 곳입니다.

만약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들이 40년 동안 발의 신이해지지 아니하고 옷이 낡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낮의 뜨거운 햇볕과 밤에 엄습해오는 추위를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성경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사49:9, 10)

하나님의 도우심은 어떤 것인가? 물 없는 땅에 물이 흐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에 비가 내리면 풀이 나고 꽃이 핍니다.

나비가 날고, 새들이 날고, 곡식은 열매를 맺고 시냇물에는 물고기가 뛰놀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복락원에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이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Ⅲ. 성령의 충만을 주십니다.


본문 3절에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신“은 ”성령“을 말합니다.

사람의 생활과 행동은 그의 생각에 의하여 결정되며, 사람의 생각은 그의 영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에스겔 37장의 말씀에, 에스겔 골짜기에 산처럼 쌓인 뼈들이 나옵니다.

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니 움직이는 산 생명체가 되는 환상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생기)”는 바람 혹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을 받은 마른 뼈는 생명체가 되고, 성령을 받지 못하면 마른 뼈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는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을 받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산자냐? 죽은 자냐? 쓸모 있는 사람이냐?

쓸모없는 사람이냐? 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여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뿔뿔이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는, 방안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그들이 거리로 나가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행3:19).

담대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시어 무능한 자에게 힘을 비겁한 자에게 용기를 주시어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 제자 운동의 산실   마태복음 10장 1~4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예수를 따르고(아콜루데오), 예수를 배우고(마데테스), 예수를 가르치는 단계(마데튜오)의 제자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최후의 명령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였습니다(마28:19).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상에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다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특별히 복음운동에 전 생애를 다 바치도록 하기위하여 제자를 부르시고 사명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70인 전도인이고 열 두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시대에 목사와 교사들을 세우고 예수 제자 운동을 수행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단에서는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문산에 고려신학교 캠퍼스를 세우고 교단 산하 모든 지 교회들이 합력 합심하여 예수제자 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왔습니다.

그 결과 전국 방방곡곡에 많은 교회들을 설립하고, 많은 예수 제자들이 오대양 육대주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세계 각처에서 또 다른 예수 제자들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세계를 받은 교단! 세계를 받은 고려신학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예수 제자 운동을 지속적으로 활발히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받은 사명과 교단과 신학교에 대한 우리들의 애정을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Ⅰ. 고려신학교는 순교적 신앙을 계승하는 신학교입니다.


예수제자 운동의 산실인 고려신학교는 1946년 9월 20일 일제말엽, 일본 군국주의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가 투옥된 신앙의 지도자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손양원 목사등 옥중 신앙 동지들의 기도의 결실로,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개교되었습니다. 평양신학교의 신학과 신앙 이념을 계승한 고려신학교가 박형룡 박사, 박윤선 목사로 이어져오는 개혁주의 신학노선을 추구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교였습니다.

그 후 고려신학교는 역사의 격변기 가운데서도 계속 성장 발전해 오다가 국가의 시책에 따라서 1970년 12월 30일 고신대학의 인가와 함께 고려신학교는 폐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 제24회 총회의 “신자간의 불신법정 고소가 가하다”는 결의가 성경 고린도전서 6장 1절에서 11절 말씀에 위배되는 신학적인 변질과(교리) 신앙의 불순(교회행정)을 초래하면서 반고소 고려측 총회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76년 서울에서 폐교된 전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함으로 고려신학교의 본래 이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오늘의 고려신학교의 태동을 위한 15년의 길고 긴 시간의 산고가 시작되었습니다.

1989년 7월 17일 북한 선교의 전략적 요충지인 문산에서 고려신학교 기공 예배를 드린 후 1991년 6월 20일에 준공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명실상부한 개혁주의 신학교육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한반도의 중심에 우뚝선 고려신학교는 옛 고려파 신앙정신의 회복의 상징이고 순교적 신앙(정통신학), 순교적 생활(바른 행위)의 옛 고려신학교의 부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가 받은 사명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순교적 제물이 됨에 있습니다.


Ⅱ. 개혁주의 신학 노선을 추구하는 신학교입니다.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칼빈주의)을 성경의 최대 구현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생명은 하나님 주권사상이고 십자가 신학입니다.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교 신앙을 신봉하는 우수한 교수들을 확보하고, 전인적인 개혁주의 신학 연구 기구를 설치하고, 세계의 우수한 개혁주의 신학교와 학문적인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21세기를 주도할 영적지도자와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 배출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국의 실천 신학 부분들은 전 세계 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설교, 전도, 선교, 찬송, 기도, 연보, 봉사, 교회행정들을 전 세계에

나눠주는 기독교 교육의 중심 국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세계 선교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옮겨왔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부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고려 신학교야말로 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중심축입니다.

영적인 목회자, 예수의 제자는, 한국에, 바로 고려신학교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시길 바랍니다.

Ⅲ.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이루는 신학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계의 신학적 동향은 상당히 사색적 학문의 성향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학문은 도외시되고 소위 경건을 빙자한 저질적 영성운동으로 편중하여 저급한

신비주의 내지는 기복주의 신앙으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여파로 신학교가 일반 학교처럼 직업을 위한 전문기관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서 신앙의 순결을 보전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파수하는 길은,

바른 신앙, 바른 생활, 바른 신학이 일치하는, 신행일치의 신학교육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학교는 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강도 높은 말씀 교육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예배적 인격자”를 양성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바로 알고, 그들을 섬기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인화협동적인 인격자”를 양성하고, 자기의 존재의미와 특수한 사명를 자각하며, 자기의 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는 “문화적인 인격자” 양성을 교육 목적으로 하여 예수의 제자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고려 신학교는 전학생 장학제도, 전학생 생활관 입소, 전교수 윤번제 생활관 입소, 매일 정오 경건예배, 매주 수요일은 교수와 학생의 기도회, 매일 새벽 경건회, 매일 아침 체력단련 훈련 등, 오로지 경건과 학문 연구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신군 사관학교”입니다.


우리는 작기 때문에 협력하여 큰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여기에 머물거나, 안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과 동반 성장하여,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예수제자 운동에 앞장서는 교단과 신학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이 시대의 사명자임을 자각하시는 성도님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