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예배설교 종합편4
맥추절의 감사 신명기 16:13~15절
인간의 문화는 자연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문화적 특색은 종교적인 절기문화입니다.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은 이스라엘 문화의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절기의 명절들을 간과해서는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절기 안에 그들의 생활이 있었고, 그들의 종교가 있었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인 민족이 되었고,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개인이나, 어느 민족이나 막론하고,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역사의식과 역사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중 하나인 맥추절은 단순한 감사의 절기가 아닙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에 의존하여 살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스스로 땀
흘려 농사를 지은 첫 이삭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경제 자립의 날입니다.
또한 맥추절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자연은총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의 기쁨을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는 날입니다.
신약시대의 맥추절은 칠칠절이라고 부르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되는 교회의 크리스마스 같은 절기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힘이 있었고, 민족의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평탄치 못했던 환경 속에서도 2천년 동안 그들의 종교와 언어와 혈통을
지키고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회복한 힘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에 대한 의식과 신의식이 살아 있는 민족만이 역사를 창조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Ⅰ.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지켜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신 것은, 너무나도 큰 사랑입니다.
실로 사랑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부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역사를 성자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성령하나님께서 구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시기 위해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모든 것에 우선하여 구원받은 사실에 감사하고,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절기로 지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사죄도, 구원도, 진리도, 생명도, 사랑도, 성결도, 감사도 모두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감사의 전부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이외에 다른 것으로 인하여 감사했다면 그 감사의 조건이 사라질 때,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의 말씀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을 보면 비록 육신은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몸이었지만, 그의 서신은 감사로 충만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씀이 10번이나, 빌립보서에는 42번, 골로새서에는 “주 안에서 감사를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골2:20).
빌레몬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록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극한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었던 바울의 감사의 비결입니다.
육신이 비단옷에 쌓여 있어도 그 심령이 죄악에 얽매이면 근심, 걱정, 불안, 초조에 쌓일 것이요, 구원받은 영혼은 암혈과 토속을 유리해도 기쁨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 아니라, 빈곤한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부요한 가운데서도 감사가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맥추절은 부활의 첫 이삭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날입니다(요14:26).
육신은 기름지고 풍성한 양식으로, 영혼은 놀라운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한 날!
감사와 감격을 안고, 주 앞에 드리는 감사의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Ⅱ. 모든 성도가 함께 바치며 맥추절을 지켜야합니다.
본문 16절에 “모든 남자는 1년에 3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 어딘가?
구약에서는 성전의 중앙 성소요, 신약에서는 교회입니다.
이 날에 하나님께서 빈손을 보이지 말라하신 것은, 누구나 이 날은 반드시,
제물을 바쳐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감사는 입술로도, 마음으로도 감사할 수 있으나, 감사의 표현을 물질로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약2:16).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희생이 없이 입술만의 감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라”고 했습니다(신16:14).
왜 이렇게 모든 사람이 다 드려야 하는가?
그들도 각자 각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야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법칙은 정확합니다(고후9:6). 귀한 것 많이 심으시고, 귀한 것
풍성히 거두시길 바랍니다.
Ⅲ.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소망하며 드려야합니다.
본문 15절에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의 말씀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같이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고전9:24). 하나님의 소망은 유복적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만물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요,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징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맥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시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습니다(신16:10).
맥추절의 예물은 지난날에 복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장차 축복해 주실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가는 축복을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되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리라”고 했습니다(고후8:3).
하나님께서 주신 복,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바라보며, 힘대로 드리시는 맥추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세 가지 명령 요한복음 21:15~17절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이 갈릴리바다에 고기를 잡으러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시몬 베드로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그물에 일백쉰세 마리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고 부르셨습니다.
육지에는 숯불이 있고, 떡과 고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차려진 예수님의 아침상은 제자들의 부족과 결핍을 채우는 성찬이었습니다.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왜? “베드로야”라고 부르시지 않았을까?
이는 인생의 연약과 인생의 한계를 나타내는 말씀일지 모릅니다.
“바 요나 시몬아!” - 이 말씀은 일찍이 베드로가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부르신 이름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를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서ㅔ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고 베드로에게 대임을 맡기실 때 부르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날리던 용감한 장사도 아니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하던 믿음 있는
신앙인도 아니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던 충성스러운 주의 수제자도 아닙니다.
주님을 부인한 죄책감과 소망을 잃어버린 허탈감에 빠져있는 나약한 인간 베드로 일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을 때 대명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주님의 대명을 받아야할 사람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더 베드로에게 사도의 대명을 수임하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의 길! 제자의 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갈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Ⅰ.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 목양사역
성경은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했습니다(눅19:10).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이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막16:15).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세상에 있는 사람은 길 잃은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서 이 땅에 오신 목자장이십니다.
본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의 어린양을 기르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사랑은 곧 주님의 양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어린양”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제 막 교회에 출석하고, 아직 주님의 은총 속에 거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겨우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불같이 뜨겁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약한 불씨는 세찬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어린양은 어미젖을 일정하게 먹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공급해줘야 합니다.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펴 줘야합니다.
단순히 먹이만 주는 것이 아니고 좋은 습관에 길들여져서 좋은 양이 되도록 기르는 것이 바로 어린양을 기르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믿음이 약한자는 쉽게 낙심하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넘어지는 자들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것은 이렇게 어린양, 병든 양, 목자의 도움이 필요한 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꼴을 주되 키 큰 기린이나 먹으라고 높은 나무위에 메달아 줘서는 안 됩니다.
코끼리나 먹으라고 멀리 줘서도 안 됩니다.
어린양의 꼴은 어린양이 먹기에 합당한 먹이를 양 가까이에, 물 가까이에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누가 어린양인가? 이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사람입니다.
사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은 모든 것이 낯설어서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어린양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서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가?
먼저 나온 사람! 먼저 믿은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팽개쳐진 자리에서 소외됨으로 고통 받는 영혼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께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 손길이 필요한 이웃의 영혼을 향하여 내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소외 받는 어린양에게 위로의 꼴을 공급하라는 말씀입니다.
Ⅱ.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 보호와 보존 사역
“친다”는 말은 살피고 돌본다는 말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의 안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가장은 가정의 안전을 생각하고, 사장은 회사의 안전을 생각하고, 대통령은 나라의 안전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말세에 사탄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벧전5:8).
말세가 될 수록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미혹이 얼마나 열심인지, 그릇된 이단들이 나타나면, 곧 크게 팽창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그릇된 사상들이, 잘못된 신앙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위협으로부터 성도들은 보호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깨어서 그릇된 사상을 가지고 교회에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가
있는가를 잘 살펴서 있다면, 이들을 치리하여, 성도들로부터 분리시켜야합니다.
교회가 혼란하여 성도들의 영혼이 상처를 입지 않토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의 치리권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권징과 치리가 바르게 시행될 때 교회의 거룩성과 성도의 순결은 세워갈 수 있습니다.
Ⅲ.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 양육사역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께서 교회에 주시는 교육명령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믿음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끊임없이 말씀의 꼴로 양육 받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듯이,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영의 양식인 말씀을 공급 받지 못하면, 그 신앙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일에 열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린양을 양육하여 우리를 채워야합니다.
무엇을 먹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꼴로 먹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35).
예수님만이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말씀만을 먹어야합니다.
교회의 강단에 세상의 교양, 세상철학, 세상학문이 강론된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강연회장이나. 세미나장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양에게 꼴이 되지 않고 독초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양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의 꼴을 먹이되, 기도하고, 묵상하고, 연구하여,
늘 따뜻하고 싱싱한 꼴을 풍성히 공급하는 강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실존 예레미야 17:5~11절
예레미야 선지자는 B.C 627년 요시야 왕 13년부터 B.C 586년 예루살렘의 함락때까지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긴, 시드기야(586년), 그달랴 요하난 등 이스라엘 왕정 말기의 일곱 왕을 섬긴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한 왕 요시야 왕이 애굽의 바로느고에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선왕 요시야 왕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유다사람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지붕에서 바알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드려서 하나님을 격노케하셨다”고 하였습니다(렘32:29).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교훈을 듣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렘32:33). “예루살렘 성전에 바알의 신상을 세웠다”고 했습니다(렘32:34).
“힌놈의 골짜기에 바알의 신상을 세우고 자기들의 자녀들을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했다”고했습니다(렘32:35).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고 하셨습니다(렘2:19).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울 때 국가적 민족적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예레미야서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레미야서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교훈입니다.
본문 5절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했습니다.
실낙원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난 데서부터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찌 되었는가?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에서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육체는 죄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 왔고, 자연만물(땅)이 저주를 받고, 인간은 평생토록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창3:15~19).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어떠했는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노임 받아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백성이 바위를 터뜨려 생수를 마셨습니다.
하늘의 만나를 먹었습니다.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며 살았어도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습니다(신8:4).
그들 앞에 모든 대적들이 무릎을 꿇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무혈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6절에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성전을 욕되게 한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떠했는가?
예레미야 39장 1절에 “시드기야 9년 10월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가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치더니, 시드기야 제 11년 9월에 성이 함락 되니라” - 그 때가 B.C 586년 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자, 예루살렘 성전은 불살라지고, 밤중에 도망가던 시드기야 왕은 여리고 평원에서 붙잡히어 왕의 목전에서 그 아들이 목배임을 당하고, 모든 귀인들과 왕비가 참수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칼로 뽑히고, 사슬로 묶여서 말에 다 달고 모든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는 쟁기로 갈아져서 뽕나무 밭이 되고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라! 하나님을 떠난 임금!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삶은 바로 저주입니다.
이렇게 어그러진 삶을 회복하는 길은 없는가? 있습니다.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을
부르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사44:21~22).
하나님의 이 애타는 음성을 듣는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인간은 나라도, 백성도, 민족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무능한
실존임을 깨달읍시다.
Ⅱ.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본문 7절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는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1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는 더위에도 가뭄에도 끄떡없습니다.
물가에 심긴 인생은 시련과 역경과 환란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는 철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물가에 심긴 인생은 탐스러운 열매를 풍성히 맺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이라는 물가에 깊은 뿌리를 내릴 때 만 행복할 수 있는 실존입니다.
Ⅲ. 인간은 행실과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존재입니다.
본문 10절에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심판 사상은 동해 보복법입니다.
즉 행한 대로 그 댓가를 지불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과 시드기야 왕이 그 악행을 인하여 심판을 받은 것 같이,
선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상급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5:29).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예외 없이 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야 할 실존입니다(히9:27).
그 날에 칭찬받고, 상급 받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하늘을 향하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복스러운 삶을 사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 안의 삶 사도행전 3:1~10절
세상에 있는 물건들은 누가 그것을 사용하느냐? 에 따라서 물건의 값이 달라집니다. 대만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서태후가 사용하던 비취병풍은 장개석 총통이 2차 대전 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천황으로부터 50만 관동군의 목숨을 지켜준
답례로서 중국의 문화재인 병풍을 돌려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병풍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경매에 붙여진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의 시 한편은 120만 달러에 경매되었습니다.
엘비스 프레스리의 동경 공연 때 입은 공연의상,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간의 연애편지도 고가의 경매품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있는 물건들은 별로 값이 잇는 것이 아니어도 그것이 누구의 것이였느냐에 따라서 값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도 같습니다.
인간은 죄와 허물과 온갖 실수로 인하여 아무 가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롬3:12).
그런데 이 쓸모없는 인생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때부터 이 인생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깁니다.
피 같은 죄, 주홍 같은 죄, 먹같이 검은 허물들이 벗어집니다.
흙 속에 묻혀있어 빛을 잃었던, 다이아몬드가, 진주가 영롱한 보석의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가치 없는 존재를 귀한 존재로 바꾸는 힘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15:10). 본문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의 삶을 통해서 은혜 안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Ⅰ. 육신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본문 10절에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구걸하던 자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일입니다.
그의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손을 잡고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난 일입니다.
그의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일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새롭게 변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으면 새로운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걷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뛰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에 내 자신이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어도 보고 뛰어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으면, 나만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10절 말씀에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11절에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라고 했습니다. 왜 놀랍니까?
너무 너무 엄청나게 변해서 놀라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새롭게 변해서 모든 백성들이 다 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앉은뱅이가 이렇게 놀랍게 변하는데 어떤 물리적인 역할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주위 여건과 환경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앉은뱅이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교회 생활에 변화가 있습니다.
본문 8절에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일어서서, 걷고,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뛰어 서서, 걸어갔다 고했습니다.
평생 엉덩이가 땅에서 떨어져 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섰습니다. 어떻게 서서, 걸을 수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용수철처럼 뛰어 오를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그 엄청난 감격과 기쁨을 성경은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앉은뱅이는 성전 문 앞까지만 왔다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지금까지 앉은뱅이는 성전 가까이에는 왔지만, 사실 성전하고 무관한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성전 밖의 인생을 성전안의 인생으로 바꿔줍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성전과 관계없던 인생을 성전과 관계있는 인생으로 바꿔줍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방관자의 인생, 구경꾼의 인생을 주관자의 인생으로 바꿔줍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세상에 있던 인생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성전 문만 밟고 예배 보는 인생이 성전 안에 들어와 예배드리는
성도로 바꿔집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습관적으로 출석하던 출석교인이, 교회 일에 열심 있는 일꾼으로 변합니다.
아내에게 이끌려서, 부모에게 이끌려서 마지못하여 교회 나와서, 맨 뒷줄에 앉아 있다가 “땡”하기 전에 뛰쳐나가던 성도가, 주일을 사모하게 됩니다.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님 앞으로 나오는 예배시간을 내 생애에 가장 소중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형식적인 주일성수! 혹시 주일날 교회에 나가지 아니하면 무슨 벌을 받지 않을까? 주일을 범하면 무슨 손해는 없을까? 무슨 우환은 없을까?
두려워서 나오던 성도가, 은혜 받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 말씀을 받고 싶고, 오늘은 무슨 은혜를 내게 주실 것인가?
소망과 기대감으로 주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은혜 받으면 교회의 일이 재미있고, 은혜 받으면 주의 일이 기쁘고, 은혜 받으면, 시간도, 몸도, 물질도, 마음도 주를 위해 드리고 싶고, 내가 교회 안에 있고,
교회가 내 안에 있는 개혁주의 신앙생활, 교회 중심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Ⅲ.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본문 9절에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놀란 것은 첫째는 앉은뱅이가 걷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육체적인 변화보다 더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가치관과 정신적 변화를 보고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앉은뱅이의 삶은 무엇을 구걸하기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본문 5절에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얻을까 했을까요? 돈입니다. 떡입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지선의 존재였고,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앉아서 보니 몇 푼의 돈이나, 한덩이 떡이 그렇게 귀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어서서 보니, 몇 잎의 동전이나, 몇 덩이 떡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은혜를 받고 앉은뱅이에서 일어선 그는, 돈 통을 챙기지 아니하고 찬양을 하면서 성전으로 갔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는 일어서서 걸어 다녀도, 그는 영적인 앉은뱅이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셋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행3:6).
지금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제 9시 기도 시간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제 9시 기도시간입니다.
은혜 받고 일어서는 축복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 받은 자의 삶 사도행전 3:1~10절
하나님의 은혜는 개혁과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힘보다. 세상의 어떤 세력보다 강하고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능력이 불신앙의 묶은 땅을 기경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철학과 지식이 인간의 가치관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세상의 어떤 것도, 이것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은
평생 앉은뱅이로서 앉은뱅이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영육간에 일대 놀라운 변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재창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변화! 은혜 받은 그 이후의 삶은 어떠해야하는가?
Ⅰ.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의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제 9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갈새 -”라고 했습니다.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인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그의 부모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평생 고기나 잡다가 가난을 유산처럼 지식들에게 물려 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마4:21).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가난의 현장에서, 비천의 현장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 - 사도가 되는 엄청난 변신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어 대제사장의 군졸들에 의하여 끌려가실 때 멀찍이 주님을
따라 대제사장집의 마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들과 함께 숯불을 쬐다가 하룻밤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울음소리를 듣고는 “네가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72)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 어두운 데로 달려가서
통곡하는 회개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실의를 안고 낙향하여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빈 그물을 채워 주시고 떡과 고기와 마실 물을 공급하시며 “내 양을 치라”고 다시 한번 사도권을 회복 받는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한곳에 모여 기도하는 중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고 성령충만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행1:4).
이제는 작은 계집종 앞에서 두려워떨던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앉아서 죽음의 공포에 떨던 겁쟁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는 거리로 뛰어나가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던 대 사도입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담대히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하루에 3천명, 5천명이 세례를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평범한 어부를 결코 평범하지 않은 위대한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은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7절의 말씀에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경건 생활에 진력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쯤 되는 대 사도도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을 찾는데 우리는 은혜 받은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매일 매일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경건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Ⅱ. 은혜 받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베드로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나혼자 살아가는 독불장군의 존재가 아닙니다.
나와 네가 우리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서로 서로가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심은 예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관심이 어디에 머물렀는가?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머물렀습니다.
“주목하다”란 말은 “관심을 갖는다, 집중하여 본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으로 보고,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런 관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약2:17)
은혜는 믿음을 실천하는 능력을 줍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첫 번째 단계가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 관심을 갖고, 굶주린 자에게 관심을 갖고, 고통당하는 자, 소외당한 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첫째요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의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시는 성도님되시길 바랍니다.
Ⅲ. 은혜 받은 자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합니다.
본문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대 사명의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되라”고 했습니다(행1:8).
베드로가 말하기를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은혜 받은 자는 예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예수 이름이 능력입니다.
예수 이름이 축복입니다. 예수 이름이 생명입니다. 예수 이름만이 영광입니다.
예수 이름만이 구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4:12).
예수 이름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예수 이름이 베드로의 삶을, 요한의 삶을 앉은뱅이의 삶을 바꿔 놓았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입니다.
나는 쇠하여하고, 그는 흥하여야할 이름입니다(요3:30).
세세토록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전파하는 은혜 받은 자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은혜의 현장 시편 66:8~14절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 감사 할 수 있고, 감사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습니다.
찬양은 감사의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천국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위에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양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다가운데서 육지를 통과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물 없는 죽음의 사막에서 생명을 다시 소생시킴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하심을 힘입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 안의 삶이었고, 기적 가운데서 살아온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나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셨는가?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구체적인 은혜를 생각하길 원합니다.
Ⅰ. 역경 가운데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본문 12절에 “사람들로 우리 머리위로 타고가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위로 타고 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땅에 엎드려질 때 적군의 발이 그들의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혹독한 고통과 극심한 수치를 말합니다.
12절에 “불과 물을 통행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여정 중 바다를 건너야했던 고통, 사막의 불볕더위에 시달려야했던 극란한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의 말씀에는 “그물에 들게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메추다”라는 말은 감옥, 혹은 요새를 말합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들어 옴짝달싹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때로는 감옥 같은 곳, 요새 같은 곳에 갇히어 어찌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11절에 “어려운 짐을 허리에 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받은 이유 없는 고통입니다. 물이 허리에 차도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이 허리에 얹혔다면 어찌하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인간을 무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하고 있습니까?
때로는 사업이, 때로는 건강이, 때로는 사회적인 여건이, 때로는 인간관계나,
형제와 고부간의 갈등이 … 파도가 밀려가고 또 밀려오듯이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역경은 간단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주시는가?
겸손 하라는 뜻입니다. 만약 인간이 완벽한 축복을 받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참람한 말을 할 것인가?
그래서 지혜자 아굴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잠30:8~9).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고후12:7).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하여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역경을 통하여 은혜 받을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Ⅱ. 시험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십니다.
본문 10절에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게 닥쳐오는 시험은 두 방향에서 옵니다.
하나는 마귀에게서 오는 유혹(Temptation)이고,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Test)입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 십자가를 붙들므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약4:7).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본문의 “시험하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바한”입니다. “바한”은 순도를 측정한다. - 란 뜻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시험은 은을 연단하는 것 같은 불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순도를 측정하시는 것입니다.
은광석이 도가니의 불 가운데서 녹아지고, 광석에 함유된 불순물을 태워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들의 영혼이 순전해 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약1: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로는 축복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더 큰 은혜는 혹독한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주십니다.
어느 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성경은 그곳을 “스올”이라고 했습니다.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지옥에 들어가서 요나는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 회개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가 회개할 때 그는 니느웨 해변에 토해냄을 받았습니다.
요나의 회개는 지옥의 죽음에서 그를 구원했습니다.
인생의 삶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 고난을 주십니다.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붙잡으러 가던 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순간 눈이 멀었습니다.
3일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고난을 받고 그는 예수의 핍박자에서 예수 복음의 전도자로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었습니다.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는 흉년을 통해서,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통해서, 조카 롯과의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25년 동안이나 기다리는 인내심을 통해서, 마지막 이삭을 번제단에 바치라는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를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하셨습니다.
Ⅲ. 하나님은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본문 1절에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풍부한 곳은 어디인가? 농사가 잘되는 비옥한 땅입니다.
평안과 번영이 있는 땅입니다. 기쁨과 희망이 있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아닙니다.
새 이스라엘이 된 오늘 우리에게도 가나안 복지가 있습니다.
그 곳이 어느 곳인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누가복음 17장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나라는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인간의 마음이 바로 심령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
셨습니다(막1:15).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계속 복음과 함께 확장되어 나가다가 주님의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은혜를 주십니다.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 요일 4:16~21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말씀은 요한일서의 주제요, 요한이 전하고자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본이시요, 사랑의 주체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셨고, 또한 인간으로 그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간을 영원히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듯이 그의 무한하신 사랑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여주신 그 한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어떻게 그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하고 있는가?
Ⅰ.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알게 하셨습니다.
본문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가?
1. 자연 계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화가의 생각과 사상을 화폭에 형상화 한 것입니다.
음악은 작곡가의 사상과 생각을 소리로 나타낸 것입니다.
건축물은 설계자의 사상과 생각을 조형화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 만물과 우주는 창조주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창1:4).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창1:10), 식물을 만드시고(창1:12),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창1:18), 물고기와 새를 만드시고(창1:21)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날 인간을 만드시고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31).
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고 이렇게 만족해 하셨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와 만물은 하나님의 정성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세계는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짜기나, 지저귀는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를 노래하고 있습니다(찬40).
그래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롬1:20).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에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2.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으심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아니하시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참으심은 처절하고, 애절하기까지 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종이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사44:21~22).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하느냐”고 하였습니다(겔33:11).
하나님의 사랑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시는 데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 복음의 정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멸망 받는 인생을 위하여 가장 고귀한 분을 세상에 보내시고, 희생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 사실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요일4:10).
세계 어느 종교에도 신이 인간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만이 갖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 생명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
1.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본문 17절에 “이로서 사랑이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종말이라는 한 정점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7절의 말씀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아니하든지 누구나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심판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께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심판에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3:17~18).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 예수는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이름입니다(마1:21).
2.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본문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상의 위험 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가?
질병, 사고, 도적, 천재지변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6~27절의 바울이 당한 모든 위험은 언제라도 나에게 닥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28:20). 항상입니다.
항상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니, 예수 믿는 성도는 세상의 위험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Ⅲ.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본문 17절에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른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성도가 이웃사랑을 이루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의 삶 가운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는가?
그것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네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일3:34).
요한 사도는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요일3:23).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성도들이 이웃 사랑으로 보답할 때 사랑은 온전케 되며
하나님사랑의 열매는 풍성해 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 빚을 갚는 것은, 하나님의 지체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형제 사랑 요일 4:20~21절
누가복음 16장에는 인생을 아주 행복하게 살다간 부자의 이야기와 인생을 아주
힘들게 살다간 가난한 거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의식주 문제가 잘 해결되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은 부자의 삶은
행복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가정은 화목했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삶은 다툼이 없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많은 원인은 바로 배고픔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좋은 집을 짓고 많은 하인도 거느리고, 좋은 옷도 입고, 좋은 가구도 들여 놓았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니, 늘 마음이 여유로워서, 무슨 일이 있으면 잔치를 베풀며,
먹고 마시고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느 날 죽어서, 음부에 갔습니다.
맹열히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서 그는 혀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내가 여기에 와야 되느냐?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되느냐? 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심판주가 되시는 절대자 앞에서, 자기에 대하여 항변할 수 없는
어떤 자각이 있었음이 확실 합니다. 그 자각이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부자의 사후 처지와 나사로의 사후 처지를 대비하면서 이웃의 삶에 대하여 얼굴을 돌렸던 그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질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부를 즐기는 동안에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의 그늘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잃어버린 삶!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란, 바로 이웃을 발견하고,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인 것입니다.
중종 때의 학자 김정국은 “천금으로 밭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고 했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삶! 은혜 받은 자의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은 어떻게 가꾸어 가야하는가?
Ⅰ. 사랑은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와 주님과의 사이를 양과 목자의 사이로 비유하셨습니다.
목자의 사명은 무엇인가?
양을 먹이고, 양을 지키고, 양을 보살펴 주는 것이 목자의 사명입니다.
목자의 관심이 늘, 양에게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관심은, 늘 성도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관심 가운데서 사랑이 움트고, 관심 가운데서 사랑이 자라고, 관심 가운데서 사랑이 꽃피고, 관심 가운데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먹고 자랍니다.
이것은 짐승이나, 사람에게 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식물에게도 해당이 된다고 했습니다.
말 못하는 ‘난’도 주인이 늘 쓰다듬어 주고, 늘 대화해 주면서 길러야 난이 잘 자란다고 했습니다.
가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자녀들의 관심 속에서 부모님들의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합니다.
남편의 관심 속에서 아내가 행복하고, 아내의 관심 속에서 남편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산업화 사회, 핵가족화한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관심의 기회를 잃어 버리고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아파트 중심의 주거환경! 쾅! 하고 문을 닫으면 안방과 건너 방,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완벽하리 만큼 단절됩니다.
한 집에 세 가구가 세를 들어 살아도, 안방 주인이 가스배출기 고장으로 죽은
지 나흘이 지났는데도 알지 못했다는 이 단절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웃에 눈을 돌리면, 내 집 문 앞에서 구걸하는 나사로가 보일 것입니다(눅16:20). 이웃에 눈을 돌리면,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이 시대에도,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보일 것입니다.
눈을 조금만 멀리 돌리면 하루에 수천 명씩 기아에 죽어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기근만난 이웃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웃에게 고정합시다.
Ⅱ. 이웃 사랑은 실천입니다.
본문 20절에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의 말씀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호가 아닙니다.
몸으로 행하는 실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희생이 있어야하고, 봉사의 땀방울이 있어야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7).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실천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간 사랑에도,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희생이 있었고(요일4:9).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겉옷을 주시고, 속옷을 주시고, 피를 주시고, 물을 주시는 희생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입으로야 무슨 희생인들, 무슨 사랑인들 할 수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데, 얼마나 서툰 사람들입니까?
본문의 말씀에도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지 않고 믿는 자!” 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요20:29). 보이는 형제를,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천자가가 됩시다.
Ⅲ. 성도의 형제 사랑은 평안을 이룹니다.
1980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에게 영국 BBC 방송의 여기자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일평생,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살았는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시켜 주는 것
- 즉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살아 있는 동안
단 몇 시간이라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이웃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는 영혼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사명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성도의 이웃 사랑은, 크리스천의 생활강령입니다.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늘을 우러러 땅을 향하여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됩시다.
사랑안에 사랑! 사랑안에 기쁨! 사랑안에 행복! 사랑안에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95편 1~11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요15:9).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품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주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과 내가 주님께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주를 믿노라하니, 주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주님께 구하니, 응답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 사도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약4:3).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해야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할 때,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주 앞에 엎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바라크(ꗗꙝꔯ, 무릎꿇다)”는 축복한다는 “브라카(ꗗꙝꔱ)”와
어근이 같습니다. 즉 무릎 꿇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인색한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려는 욕망은 너무나 큽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교관이 “훈련의 땀방울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피를 흘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은 사탄 앞에, 세상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 성도가 무릎을 꿇는가?
Ⅰ.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읍시다.
본문 6절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 무릎을 꿇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솔로몬 왕은 한나라의 임금이었지만 기브온 산당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경건한 믿음을 보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부귀와 영화까지도 응답으로 주셨습니다.
사무엘하 12장 20절의 말씀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던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한 나라의 절대군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러한 예배가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가 되고, 그러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실로 큰 감동과 큰 은혜는 목사의 설교가 아니고, 예배를 준비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할 때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첫째가 예배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이사야 6장 1절에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고 사죄의 은총을 입었습니다(사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회개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성전에서 사명을 받았습니다(사6: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였습니다. 성전에서 꿇어 엎드려 기도할 때 자기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네 번째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사6:3).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첫째 되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Ⅱ. 말씀을 듣기 위하여 무릎을 꿇읍시다.
본문 7절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에 “므리바”란 말이 나옵니다. “무리바”란 싸운다, 다툰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르비딤에 도착했습니다.
그비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의 마을입니다.
그들이 르비딤에 다다르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통 가운데서도 엄청난 은혜도 맛보았습니다.
애굽과 바로를 이기고, 홍해를 건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갈길 몰라 광야에서 헤맬 때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이 없는 문제쯤은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있다면 이러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투고, 욕하고, 원망하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므리바” 다투다. “맛사” 시험하다. - 그래서 르비딤을 므리바 혹은 맛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시니 이 백성이 형편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비딤에서 그들을 다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는 동안에 출애굽한 1세들은 모두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시간은 신앙에서 넘어지는 시간입니다.
신앙에서 실패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마귀 사탄에 붙잡히게 되고, 마귀 사탄에 붙잡히는 시간은 망하는 시간이요, 죽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인생행로에 어려움이 닥치면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Ⅲ. 기도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읍시다.
수수밭에 서있는 허수아비를 누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새들도 속지 않고, 밀짚모자 위에 앉아서 조롱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는 성도를 누가 크리스천이라고 하겠습니까?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요, 성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피곤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영혼이 힘을 얻고, 영혼의 힘을 얻어야 육신이 힘을 얻습니다(요31:2).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온유해 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화평을 이룹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니 머리가 꼿꼿해 집니다.
머리 숙이지 아니하니까 교만해 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사탄은 교만을 통해서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굳은 것은 부러집니다. 굳은 뼈도, 굳은 이빨도 부러집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입술, 부드러운 혀는 부러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공급되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 마가복음 10장 17~22절
인생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영생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이 세상을 살다간 모든 인생들의 한결같은 소원이었고,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의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어 보려는 몸부림으로 종교란 것이 생기고 철학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라는 이 질문은 모든 인생들의
공통적인 물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은 이 청년을 누가는 관원이라고 했고,
마태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부자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 관원이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입장이나, 사회적인 환경에서 볼 때 가히 획기적인 행위입니다.
언젠가 똑같은 위치에 있던 니고데모가, 그의 개인적인 손실을 두려워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에 비하면, 이 청년의 행동은 파격적인 것입니다.
더구나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군중 앞에서, 존귀한 공회원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이 영생의 문제가, 이 젊은 청년에게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청년이 영생이라는 이궁극적인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의 막대한 재물도, 그의 높은 지위도, 그의 창창한 미래도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인생 최대의 문제를 푸는 하나님의 법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Ⅰ. 하나님의 법은 행위 규범입니다.
병행귀절인 마태복음 19장 16절에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영생에 들어가려면 나를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였느니라(마19:18).
청년은 “이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의 명쾌한 대답에서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행함이 없는 이론적 신앙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무엇인가? 10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규정해해 놓은 계명이 613개 율법계명입니다.
이 613개 조향의 계명은 모두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들입니다.
행위규범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법은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심판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양심과 원인까지도 심판하십니다.
사람을 죽인 자를 살인자라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살인하지 않았어도,
남을 미워하면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마5:21).
하나님의 법은 간음을 하지 않았어도,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마5:28).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19:19).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몸을 얼마나 위하고 사랑했는데, 내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내 자식, 내 남편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했는데...., 아니 평생 용서해주고 또 용서해줬는데, 내 이웃은 한번이라도 제대로 용서해 줬는가?
예수님께서 “내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계명을 지켜서 영생을 얻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롬3:20).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26).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 알고, 바로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는 율법의 벽 앞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탄식 했습니다(롬7:24).
예수님께서는 “네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알고, 믿는다는 것을 실천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바로 알고, 바로 행하는 것이 영생에 이르는 첫 번째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법은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21절에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이 청년은 너무나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심이 특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나이에 영생의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그는 사업 수완이 좋아서 큰 재물을 모았습니다.
정치적 수완이 있고, 바리새적 종교 생활로 존귀한 공회원이 되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면서 올바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한 가지 결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청년은 그 많은 재산을 모으는 중에 오직, 돈! 오직 돈만을 위하여
살아온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물질을 지선의 존재로 여겼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돈주머니가 올라가 앉아 있는 자리에 하나님을 올려놓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 재산과 천국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의 문제가 그렇게 갈급하여 체면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던
이 청년도 물질의 우상 앞에서는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요하다고 하는 이 문제가, 어떤 성격을 갖느냐? 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요한자! 물질이 부요한자. 지식이 부요한자. 건강이 부요한자. 학벌이 부요한자. 등 세상의 어떤 것이 부요한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스스로 다 속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청년은, 물질과 천국을 천평 저울에 놓고 달아 보다가 천국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부요는 어떤 것인가?
부의 진가는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어떻게 쓰느냐에 있습니다.
인간의 인격도 얼마나 지식이 있느냐가 아니고, 그 지식을 어디다가 어떻게 사용하였느냐에 따라서 평가됩니다.
따라서 부자가 손에 든 것만큼 부자가 아니고, 선한 일에 물질을 쓴 것만큼 부자인 것입니다.
부의 가치는 얼마나 소유했느냐?
가 아니고, 얼마만큼 물질을 주인의 뜻대로 선용했느냐에 있습니다.
돈 한번 가치 있게 쓰는데, 돈 가진 보람이 있고, 재물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 그것은 결코 손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유를 우리에게 맡기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면서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 이 청년에게는 오히려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기쁨이 되는 삶을 사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창 39:19~23절
요셉의 일생은 한마디로 파란 만장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한 번째의 아들이란, 그의 위치가 그 가정에서 미미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기고 공경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채색옷을 얻어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어도 죄인들을 돌보고 위로하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보디발은 그를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임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을 드러내고, 바로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인의 삶 가운데에도 남다른 환난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인생이 끝나는 구나했는데,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요셉이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그의 인생이 이렇게 형통할 수 있었는가?
성경은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형통한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Ⅰ. 하나님께서는 꿈을 갖은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요셉은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실현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37장 11절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꿈이었기에 형들은 시기하고, 그 아비는 마음에 두었는가?
그 꿈은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요셉의 곡식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습니다(창37:7). 요셉이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창37:9).
요셉이 형제들 중에서 으뜸이 된다는 꿈입니다.
이 꿈은 요셉의 의지, 희망, 장래의 비젼을 더러 낸 꿈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크게 하신다는 계시적 성격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그 아비 야곱은 그 꿈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어떠한 혹독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믿으면서 인내하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이렇게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 꿈 때문에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나중에 그 꿈이 실현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바로에 대하여
충성을 다했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자기를 팔아넘긴 형제들과 부모를 섬기는데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된 후에도, 결코 거기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붙잡았던 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내세에 대한 꿈입니다.
요셉의 꿈은 그의 소원대로 이루어져서, 그가 죽은 후 450년 후에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그의 해골을 파서 메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출13:19).
이와 같이 성도의 꿈은 안개와 같이 사라질 이 세상에 대한 헛된 꿈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성도의 꿈은 약속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꿈이어야 합니다.
꿈은 희망입니다. 꿈은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사람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젼을 갖은 사람과 동행하여 주십니다.
Ⅱ. 하나님은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해 가는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요셉은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제애가 특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사랑한 형제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주인에게 충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보디발의 물산에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신뢰에 의리로서 보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육신의 주인에게도 충성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일생을 보면서, 누구나 던지는 질문중 하나는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느냐?” - “왜? 의인에게 고난이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깨달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곧 형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으로만 채우시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역풍이 불지 않으면, 연이 하늘로 솟아오를 수 없습니다.
찬송가 503장은 “이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풍랑에 빠지게 하시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인생항로를 바꾸기 위해서 삼일동안 그의 눈을 볼 수 없게
하시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혹독한 시험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늘의 열린문을 통하여 천국을 보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했습니다.
죤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의 영감을 받고,
요셉은 궁중감옥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았습니다.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커지고, 우리의 축복의 그릇이 커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약1:4).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그의 삶을 형통케
하십니다.
Ⅲ.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나누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요셉은 자기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자기의 노력이나 자기의 능력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신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루어 가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판 형제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두려워 마소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창45:7~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창50:20.
요셉은 자기의 전생애를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 미가서 6장 6 ~ 9절
미가는 “유다 열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고 했습니다(미1:1).
묵시(하자)란 “보다, 예언하다, 준비하다”란 뜻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보여 주시는 “계시”이고 인간의 편에서는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유다 열 왕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요담의 시대에는 산당이 존재하던 시대입니다.
백성들은 성소에서 제사하지 아니하고, 산당에서 제사 드리고, 분향했습니다.
아하스왕의 시대에는 앗수르의 우상제단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고, 왕이 이방신을 섬기고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산당과 작은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아래서 제사하고, 분향했습니다(왕하16:3~4).
히스기야 시대에는 산당을 제하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까지 음란하게 섬기던, 광야 모세의 놋뱀을 부수었습니다(왕하18:5).
미가가 선지자로 사역하던 B.C 747~687년 어간의 나라 정세는 어떠했는가?
B.C 722년 앗수르가 북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서, 남 왕국 유다를
압박하던 시대입니다.
아하스왕은 앗수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앗수르의 우상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에 쌓고, 왕과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데 몰두했던 시대입니다.
여호와 신앙은 뿌리 채 흔들리고, 모세의 율법은 극도로 해이해져서 나라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하던 시대입니다.
미가가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묵시를 보고 깨달은 것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은 국력이 약해서도 아니요, 종교 행사가 없어서도 아니요, 경제가 어려워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죄요, 악이요, 영혼이 타락할 때, 백성도, 나라도 망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지도자가 타락하면, 백성이 타락하고, 타락한 백성은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몰두하고, 부정부패가 판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2700년전 미가가 살았던 이스라엘 열 왕의 시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미6:8).
오늘 총체적 위기 가운데 처한 이 나라 이 백성에게 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Ⅰ. 정의의 실현을 구하십니다.
본문 8절에 “오직 공의를 행하매 - ”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정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올바른 표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궤도차가 궤도 위를 달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선로 위에 내 자신을 올려놓고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1965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정의를 향한 호소”라는 설교에서 정의 사회가 구현되는데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정의 사회의 기본 원칙은 “평등이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평등하고,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하고, 모두가 한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 자매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상도, 이념도, 피부색깔도, 언어도, 민족도, 종족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약한 자가 보호를 받는 여건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정의 사회가 구현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오늘날 정의와 인권을 좀 먹는 것은 “무력주의”라고 했습니다.
무력 주의란, 단순히 총, 칼등 군사적 폭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도덕적인 힘보다 어떤 힘! 재력, 권력, 다중의 힘, 군사력 등, 물리적 힘의 논리가 앞설 때, 바로 그것이 무력주의이고, 이 무력주의가 팽배해질 때, 정의는 좀먹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힘이 법이고, 힘이 정의가 되는 국제정세와, 빗나간 민족주의, 빗나간 애국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셋째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변혁운동은 비폭력운동이고 평화 운동이고,
도덕성 회복운동이고, 가치변화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흑과 백은 다르다”는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변형시켜 나가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의 개혁운동이라고 했습니다.
Ⅱ.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십니다.
여기에서 인자란 은덕을 의미합니다.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을 은덕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남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에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구태여 사람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도 할 수 있고, 고양이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아무런 조건 없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사
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조건 없는 사랑!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인자의 사랑은 조건 없이 용서해 주고, 조건 없이 사랑하고,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형성 될 때, 그 사회는 따뜻해지고, 아름다워 질 수 있습니다.
인자의 사랑은 말없는 헌신입니다. 말없는 자기희생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Ⅲ.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사람을 구하십니다.
본문 8절에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을 소생시키는데, 어떤 사람을 소생시켜 주시느냐? 겸손한 사람, 자기의 잘못을 통회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훌륭한 임금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탁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을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삼하12:13).
그는 선지자 나단의 말을 묵살했다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 앞에,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고,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6:6).
강한 자가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가진 자가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겸손한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며 사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습니다.
미가 시대의 국가적 위기도, 이 시대의 국가적 위기도, 극복하는 길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