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마음에드는사람4
16. 여호와를 향해 힘을 다한 사람 - 요시야
(열왕기하 23:21-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요시야는 불과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어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 왕입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는 므낫세로 55년간 유다를 통치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무죄한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21:16) 유다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유명했습니다. 므낫세가 죽고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과 신하들은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몬 역시 그 아버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대했던 신하들은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그 아버지처럼 수십 년간 이런 사람을 왕으로 섬기고 이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려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신복들이 왕을 반역하였습니다. 왕을 궁중에서 죽였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또 반역한 신복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비록 어리지만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된 요시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22:2에 기록된 종합평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그가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살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그는 선왕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아버지가 불과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요시야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왜 왕을 죽였을까요? 할아버지에게 고생한 사람들이 아버지에게도 큰 소망이 없음을 알 때 살해한 것이 분명함을 알았을 때 요시야는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백성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정직하고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배나 조상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나로 저분처럼 저렇게 살아야지하는 것과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것인데 요시야는 후자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습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신뢰받기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니 하나님께라도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향해 힘을 다한 왕이라는 칭호를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입니다.
첫째, 요시야는 여호와의 전을 깨끗이 수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히스기야가 죽은 이후 누구에 의해 청소되거나 수리된 일이 없었습니다. 60여 년이나 누가 돌보지 않았으니 지저분하고 낡을 대로 낡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요아스가 성전 수리를 위해 헌금을 모았듯이(12:4-14) 요시야도 성전 보수를 위해 은을 모았습니다. 요아스는 어머니(아합의 딸) 아달랴가 우상숭배 정책을 쓰면서 낡아진 성전의 보수를 위해 20세 이상의 장정에게서 주민세 성격의 은을 받았고 서원한 사람들이 몸값으로 드리는 은과 자원하여 드리는 은을 제사장들이 받아 성전 수리하는 데 쓰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의 성전을 보면 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나 교역자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식어진 교회는 건물도 사방 구석이 낡고 지저분한 채로 있습니다. 누구나 청소하는 사람이 없고 덜렁거리는 창문을 고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는 교회는 항상 건물이 깨끗하게 청소 정리되었고 부서지고 낡아진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성전 관리하는 모습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청소를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모습과 그저 할 수 없이 한 사람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청소하고 보수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이 흔치 않던 시대에 발견된 이 율법 책은 대단한 선물이었습니다. 수십 년, 아니 그 이상 성전의 어느 구석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이 보수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것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이 율법 책 때문에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율법 책을 읽어본 서기관 사반은 왕 앞에서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옷을 찢었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내릴 경고와 저주의 말씀인 신명기 28장이나 레위기 26장 같은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곧 이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도록 하였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여선지 훌다를 찾아갔습니다. 선지자는 왕이 읽은 재앙과 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시야는 이 재앙에서 제외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다시 율법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기로 하였고 백성들은 그 언약을 따르기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요시야는 먼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우상숭배에 쓰이던 물건들을 꺼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상을 내다 불사르고 미동(남창)의 집을 헐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전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23:4-20까지 읽어 보면 얼마나 철저히 우상의 뿌리를 뽑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제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바로 기억하지 못하고 해마다 형식적으로 지켜온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전국에 있는 우상의 제단을 헐어 버린 요시야는 온전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하였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킨 모습은 역대하 35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습관적이고 관례적인 주일 성수나 절기를 지키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 주일에 하루, 주일을 성수하게 하시고 여러 기념할 절기를 주신 것은 그 의미를 바로 헤아려 하나님과의 신앙에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없이 형식적으로 지나치는 절기는 차라리 지키지 않은 만도 못한 것입니다.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된 그날의 감격을 잊지 않고 지켜지는 유월절, 일 년의 풍성한 수확과 소출을 감사하여 드리는 수장절, 율법을 받아 언약 백성이 된 것을 잊지 않고 지키는 칠칠절이 의미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어진 절기마다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절기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의 잔해를 제거하는 종교개혁, 다시 새롭게 지켜진 유월절, 이 모든 것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한 요시야의 값진 업적이었고 하나님은 이런 요시야를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17.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친 사람 - 에스라
(에스라 7:1-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이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요, 왕의 신임을 얻는 신하였습니다. 7:1-5의 에스라 족보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6:3-15,9:11을 참조해 보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중간중간 생략되었습니다. 실제로 에스라는 아론의 27대 후손이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에스라가 제사장 반열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깊이 연구하여 익숙했기에 백성을 능히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왕에게도 신임이 두터워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에스라는 하나님과 왕과 백성들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가 결심을 하고 바벨론에서 돌아왔습니다. 바벨론의 지위나 권세를 모두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 80년 전(538 B.C.)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516 B.C.). 그러나 문제는 백성들의 신앙입니다. 아무리 공을 들여 잘 지은 성전이라 해도 그 안에서 예배하는 백성들의 신앙이 합당치 않을 때는 성전이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것은 공사를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예배하는 백성들이 그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픔을 또다시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한 것처럼 에스라는 백성들의 신앙을 재건하기 위하여 바벨론을 떠난 것입니다.
첫째, 에스라는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무엇을 결심하였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고 그 율법과 규례를 먼저 솔선 수범하여 준행하기로 결심했고 이것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가르쳐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더 연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남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열심히 가르치면서도 또한 자신이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은 현상인지 모릅니다. 내가 말씀에 익숙하지 않고는 남을 가르칠 수 없으며 내가 은혜 받지 않고는 남을 지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먼저 자신이 말씀 대로 준행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이요. 생활입니다. 신앙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뒤에서 채찍을 가지고 몰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고 따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본받을 것 없이 말만 잘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언제나나를 따라오너라하셨고 바울 사도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11:1)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19,20) 하였습니다. 말씀 대로 준행하는 사람만이 백성들을 힘있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둘째, 에스라는 울면서 가르쳤습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의 상황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방백들의 보고에 따르면 많은 백성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 즉 가나안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여부스 사람, 암몬 사람, 모압 사람, 애굽 사람, 아모리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신도 섬기고 심지어 그들의 딸로 아내를 삼고 며느리를 삼아 잡혼을 하고 있었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앞장서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나라가 왜 망했습니까? 조상들이 왜 남의 나라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고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까? 바로 이 죄 때문이었는데 불과 100여 년 조금 지난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똑같은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기가 막혔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한 백성들을 바라보며 큰 책임을 통감했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고 저녁 제사드릴 때까지 넋을 잃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제사드릴 때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했습니다. ‘저 사람들의 죄’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악’이요 ‘우리 허물’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도 따라서 통곡하였습니다. 남녀노소 큰 무리가 모여 울며 회개하고 주님의 교훈을 좇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방 여인들을 모두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에스라는 금식한 뒤에 예루살렘 모든 시민들을 소집했습니다. 만약 3일 이내에 모이지 않는 사람은 재산을 몰수하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이방족속과 이방여인들을 끊어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온 백성들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에스라의 눈물의 교훈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셋째,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꾸준히 가르쳤습니다.
그 후 나타난 에스라의 두드러진 행적은 느헤미야 8,9장입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이끌고 귀환한 때가 B.C. 444년이니 에스라가 돌아온 지 13년 만 입니다. 그 동안 에스라는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결심(스7:10)으로 보아 그 후 꾸준히 가르쳐 왔고 그것이 13년 만에 대 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율법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벽 일찍부터 오정까지 읽어 주는데 모든 사람은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스라가 책을 펼 때 모든 사람은 일어서서 경의를 표했고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면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경배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면 교사들은 그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회개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기쁨이 광장에 넘쳤습니다. 은혜 받고 기뻐하며 금식하고 회개했습니다. 이방 사람들과는 절교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부흥은 그 동안 에스라가 결심한 바를 굽히지 아니하고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친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에스라와 같은 말씀의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말씀에 능통하고 솔선 수범하여 가르치는 사람 말입니다.
18. 여호와의 위로를 나타낸 사람 - 느헤미야
(느헤미야 5:14-19)
…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란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바벨론의 하나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위로를 타나낸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결과 못지않게 일의 동기나 과정도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의 업적은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한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바벨론 포로가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것처럼(B.C. 606, 597, 586) 바벨론에서의 귀환도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스룹바벨이 49,897명을 인솔하고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고(B.C. 538), 그 다음 에스라가 1,754명을 인솔하여 신앙재건(B.C. 457), 그리고 느헤미야가 42,360명을 인솔하고 돌아와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습니다(B.C. 444).
이렇게 성전 재건, 신앙 재건, 그리고 성과 재건은 지금도 우리 속에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재건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전이 재건되어야 합니다.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고전3:16). 무너진 제단이 수축되어야 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생각들이 청소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 곳이 강도의 소굴인줄 아셨을 때 진노하시고 그 곳을 나오셨습니다. 강도의 소굴에 함께 있을 수 없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가 욕심으로 가득 차 있고 혈기, 고집, 이런 것이 가득 차 있으면 이것이 도둑의 소굴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그 안에 계실 수 없습니다.
성전이 청소되었다면 신앙 재건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은혜 받아 회개하고 청소했다 해도 그냥 두면 얼마 안 가 또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운동을 통해서 꾸준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하지요. 이것을 에스라가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엔 예루살렘 도성, 성곽을 재건해야 합니다. 아무리 성전을 잘 지었고 그 안에서 예배하는 백성들의 신앙이 아름답다 해도 성곽이 허물어져 있으면 항상 맹수의 습격이나 외적의 침략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이 재건되어 주님이 안에 계시고 말씀의 운동을 통해 신앙이 성숙해간다 해도 비진리나 사교가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 유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곽을 든든히 쌓지 않으면 언제 침략 당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와 같은 울타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의 술관원이었습니다. 왕에게 올릴 술을 선정하고 맛보고 독이 들었는지 점검할 뿐 아니라 왕의 곁에서 항상 가까이 섬길 수 있는 상당히 영향력 있는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항상 고향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문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며칠 동안이나 슬퍼하고 울었습니다. 왕은 며칠 새 몰라보게 수척해진 느헤미야에게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결국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이라는 신분으로 42,360명의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와 무너진 성곽을 재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성곽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성곽을 52일 만에 완공시켜 놓은 것보다 더 소중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만 보시지 않습니다. 많은 헌금을 드려도 이것이 불의한 재물이라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신23:18). 교회를 아무리 급성장 시켰다 해도 잘했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곽 건축도 잘했지만 이 큰 공사를 하는 과정도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하였습니다.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위로를 나타냈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모든 사람이 함께 참여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곽을 건축하면서 45개 지역에 40여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각 지역을 나누어 책임 맡은 사람들의 이름인 것 같습니다만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제사장(1절), 금장색과 향품장사(8절), 지방관리(9절), 심지어 여자들까지(12절)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자발적으로 건축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느헤미야는 총독입니다. 강제로 백성들을 동원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발적으로 성곽 재건에 힘쓸 사람들을 모았고 그들에게 각각 맡긴 것입니다. 그는 혼자 일을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지원했기 때문에 힘든 일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알았기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직업 여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기쁨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했으며(5절) 하였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천하고 힘든 일을 하겠느냐하고 생각했겠지요. 하나님의 일에는 빈부 귀천이 없습니다. 어느 부대의 사단장은 주일마다 친히 교회 앞에서 주보를 나누어 주며 안내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각 참모는 물론이고 그 군인교회가 앉을 곳이 없이 많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만약 힘있으면 힘있다고 뒷걸음치고 힘없으면 힘없다고, 부자는 부자라고, 가난한 사람은 나 같은 가난뱅이가 하고 빠져나간다면 누가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힘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힘없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부자가 해야 할 일이 있고 가난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 앞을 증수하였습니다(28,30절).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몇 십만원, 몇 백만원의 큰돈이 필요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몇 천원, 몇 만원만 있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수많은 방해를 극복했습니다.
특히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는 끈질겼습니다. 건축을 시작하자 옆에 와서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소서(4절) 그리고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꾸준히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이번에는 방해꾼들이 몰려와 성을 허물고 사람을 해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격려하여 용기를 주었습니다. 절반은 일을 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무장시켜 파수를 하게 하였습니다. 일하는 사람들도 한 손에 병기를 잡고 한 손으로 일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파수꾼들과 함께 옷을 벗지도 않고 경계했습니다.
총독이 군사를 동원할 수 없었겠습니까? 왜 방해꾼들을 잡아 가두거나 죽일 수는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무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고 철저히 방어하면서 꾸준히 공사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셋째, 느헤미야는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훼방꾼들로 인해 공사기간이 길어지면서 경제적인 위기에 부딪혔습니다. 한 달 이상 생업에 종사하지 못했으니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부자나 권력자들은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상대로 이자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서는 원망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런 백성들의 소요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돈놀이하는 사람들을 엄히 꾸짖었습니다. 이 어려운 때 이자를 받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의 1/100를 내놓아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습니다. 총독 자신도 유다 땅의 총독으로 재임한 12년 동안 다른 총독들처럼 세금으로 치부하지도 않았고 땅을 사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생하는 백성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고생하던 백성들의 소요도 사라졌고 부자들도 기꺼이 재산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52일 만에 성곽은 낙성되었고 즐거이 봉헌식을 올렸습니다(12:27). 이 공사가 값진 것은 느헤미야가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19. 여호와의 백성을 구한 사람 - 에스더
(에스더 4:15-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스룹바벨이 B.C. 538년 제1차로 49,897명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온 뒤 한 50여 년 지난 후에 바사(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왕의 왕비가 된 여인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가 1,754명을 인솔하고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전이었습니다. 1차 귀환 때 5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돌아왔으나 아직도 바사의 수도인 수산궁과 온 나라에는 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직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 중에 모르드개와 그의 삼촌의 딸 즉 사촌동생인 에스더가 있었고 이들을 통한 민족 구원 운동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것이 에스더라는 책입니다.
1:5-7에는 이 두 사람의 인적사항이 소개되고 있는데 베냐민 자손으로서 기스의 증손이라 했습니다(기스는 사울왕의 아비라고 봅니다). 모르드개가 여고냐와 함께 사로잡혀 왔다고 했지만 그 때가 B.C. 597년이고 지금은 B.C 486년이었으니 110살이나 되었을까요?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대로 모르드개가 잡혀온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잡혀왔다고 보아야 합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죽은 후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밑에서 딸같이 양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 앉았다(2:19)고 한 것을 보아 바사 제국의 한 관리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에스더는 아하수에로왕의 왕비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총애를 받는 하만에게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 않는다 하여 모르드개와 온 유다인을 진멸하려는 계획이 왕의 허락을 받아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2월 13일이면 온 바사에 사는 유대인이 학살당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민족을 구한 사람은 군인도 아니요 백성들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 에스더였습니다. 그러나 더 분명히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기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에스더는 이 일을 위해 쓰임 받은 하나님의 그릇이요, 도구입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구인 에스더가 어떻게 민족을 구원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우리들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에스더의 책임감이 백성을 건졌습니다.
백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르드개는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 말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①유다 민족이 생존의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으며 너는 왕후라고 해서 안전하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과 ②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과 ③유다 민족을 구해야 하는 이런 때를 위해 하나님은 너에게 왕후의 지위를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왜 팔려 가야 했는지 왜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야 했는지 몰랐으나 나중에 형들이 식량을 사러 왔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줄 알았습니다.그래서 그는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7,8)고 하였습니다.
고생하며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기 위해 모세를 여러 가지로 준비시키신 하나님은 유다 민족이 당할 어려움을 미리 아시고 에스더를 왕후의 자리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결국 구원받습니다. 그 일에 누가 쓰임 받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약 에스더가 두려운 나머지 이 사건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거나, 자기는 왕비니 걱정 없다고 불 구경하듯 외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유다인들은 구원시키십니다. 그러나 그 책임감을 버린 에스더는 하나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실현됩니다. 그 계획에 쓰임 받을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그 책임이 맡겨졌을 때 위험과 고난을 무릅쓰고 감당하느냐 그 책임을 회피하느냐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수행하는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받을 수도 있고 책망과 심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 말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나에게 재물을 많이 주신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압니까? 나에게 재능을 주신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압니까? 나에게 시간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압니까? 내가 책임을 회피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손해나시기나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일은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받을 더 큰 은혜와 복을 뺏기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 에스더와 모든 사람의 기도가 백성을 건졌습니다.
민족을 위기서 건진 사람은 에스더가 아닙니다. 그의 지위나 그의 용모나 그의 지혜가 민족을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자신도 기도하지만 모든 민족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께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는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었습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얍복강 기도가 형 에서의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자신들의 기도가 왕의 마음을 움직일 줄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매사에 기도하지 않고 일을 하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한 일의 결과는 너무나 뻔합니다. 일이 잘 되지도 않지만 혹시 성공하면 자기의 재주와 능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오는 지혜는 그저 불신앙적이고 인간적인 것밖에 없습니다.
셋째, 에스더의 침착함이 백성을 건졌습니다.
기도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줄 믿고 덤벙덤벙 급히 서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에스더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때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왕에게 달려가 항의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신앙이지 궁전 뜰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불신앙이요, 비겁한 짓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조심스런 자세요 행동입니다.
깜짝 놀라 반가워하는 왕이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5:3) 하지만 그 앞에 눈물 흘리면서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고 왕을 두 번씩이나 대접한 후에 침착하게 왕에게 전후 사정을 고하여 문제를 풀어 나갑니다. 이것이 기도한 에스더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결국은 유다가 승리했습니다. 왕의 마음을 바꾸어 유다를 죽이려 했던 하만과 그 일당을 12월 13일에 오히려 진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지금 주신 지위와 분복 속에서 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 찾으며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20. 여호와께서 반한 사람 - 욥
(욥기 1:6-2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예루살렘의 패역함을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14:4).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이 세 사람을 언급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의를 인정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과 성결함과 의로움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였던 것처럼 욥 역시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생활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만 반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녀의 복도, 재물의 복도 넉넉히 주시고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시듯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반하신 것은 그의 신앙이 외적인 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전천후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할 때나 부자일 때나 평안할 때나 고난받을 때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고귀한 신앙입니다.
비행기 중에 전천후 요격기가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비바람 불거나 안개가 자욱해도 언제나 이착륙을 할 수 있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전투기입니다. 그러나 전천후 여객기란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여객기는 비가 쏟아지거나 악천후에는 이착륙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투기는 다릅니다. 더구나 요격기는 다릅니다.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비온다고 전쟁을 쉬지 않습니다. 특히 악천후에 기습공격을 받기 쉽기 때문에 전천후 비행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첨단장비를 동원하여 전천후 요격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전천후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취미로 한다면 전천후 신앙이 필요 없습니다. 비오면 쉬고 추우면 그냥 집에 있으면 되니까요. 비 쏟아지는 날 테니스를 치러 가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신앙은 취미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운동은 악천후에도 계속할 필요가 없으나 전투는 악천후일수록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영적 전투(엡6:10-20)임을 안다면 어떤 조건,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이 변하지 않는 전천후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욥의 어떠한 신앙이 하나님을 반하게 하였을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욥은 풍족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마음에 들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욥을 생각할 때 고난받은 욥만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주식 복을 누리면서 열 명의 자녀를 낳아 길렀고 모두 결혼시킨 듯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60-100세는 되어야 합니다. 욥은 시련이 끝난 후 140년을 더 살면서 자녀 열을 얻었으니 그는 200세 이상의 삶을 살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은 욥이 족장시대, 즉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175세, 그의 아버지가 205세를 살았으니까요. 물론 그 외에도 욥이 족장시대 사람이라는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이 많으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간절하지 않은 것을 봅니다. 어렵게 살 때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다가도 좀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 그저 취미 삼아 교회에 다니고 이 핑계 저 핑계 신앙을 점점 멀리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신앙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생일 같은 날 온 집안 형제들이 모여 잔치를 하고 즐긴 후에는 다음날 아침 반드시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시 아들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을까. 혹시 잔치를 하던 중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곧 일상적인 생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부모된 사람들도 애들이 공부를 썩 잘하거나 착한 일을 하나했다면 마음이 흐뭇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온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였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의 이러한 생활에 대해서는 사단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욥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그가 고통 중에 과거를 회상한 욥기 31장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빠졌는가하면서 계속언제 내 마음이내가 언제 내가 언제하고 말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비난하기를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25:4)하며 욥의 숨긴 죄를 들추어내려 했으나 욥 자신도 떳떳이 정직함을 말할 수 있었고 하나님도 그의 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42:7).
둘째, 욥은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 마음에 들게 살았습니다.
욥에게는 하루아침에 ‘까닭 없는 고난’(2:3)이 닥쳐왔습니다. 소, 양, 약대, 종들이 모두 죽임 당하고 노략 당했으며 돌풍은 열 명의 자녀들을 앗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그는 고난의 의미를 묻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몸에 악창이 나서 몸을 긁고 있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하고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다시 사단에게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2:3).
믿음생활을 잘하다가도 고난이 겹치면 그만 실의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야말로 전천후 신자였습니다. 평안할 때나 고난이 겹칠 때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이렇게 흔들리지 않자 하나님은 대견스러워 하시면서 사단에게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욥이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대적했다면 하나님은 사단 앞에서 얼마나 무안하셨을까요? 또 사단은 얼마나 신나서 하나님께 대들었을까요? 이처럼 우리의 변함없는 믿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랑거리가 있게 합니다. 공부 잘하고 착한 자식을 둔 아버지는 항상 자랑거리가 있지만 말썽꾸러기 패륜자식을 둔 부모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해 드립시다. 풍족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전하고 정직히 살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 믿음과 자세가 변함이 없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게 해 드립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