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갖는 신앙 각성(마16:21-25)
오늘 말씀의 실마리는 21절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21절을 보면 "이때로부터" 이렇게 말씀 하고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라고 하는 말은 사실은 그때로부터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 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때는 어느 때냐 하면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그 때로부터가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전 환점이 된다고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는가? 21절의 말씀 끝에 가서 보니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로소 가르치시니" 주님께서 무엇인 가 가르치시려고 하다가 그 때부터 비로소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니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그때부터 가르치기를 시작했고 또 이것은 계속해서 가르쳤다고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 니다. 그러면 그 가르치심의 중심이 무엇이었을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베드로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고백을 했죠. 이를 알게 하 신 이는 네 육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다. 네가 말한 대로 내가 바로 메시아다.
즉 그리스도다. 이제 네가 내가 메시아인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메시아가 어떻게 살아야 되 는지, 어떤 존재인지를 네게 말하겠다. 제자들에게 메시아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또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부활한다. 이것이 메시아가 가는 길이다.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비로소 가르치기 시 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고 메시 아라는 신앙 고백을 했기 때문에 그 메시아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가리켜 줬을 때 베드로는 이런 반응을 하게 됩니다. 22절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일어나지 않으리이다." 메시아의 길을 얘기 들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여기서 붙들었다고 하는 얘기는 아주 옆에 바짝 붙어 서 서 어쩌면 주님의 팔짱을 끼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주님을 붙잡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쨌 든 아주 바짝 붙어 서서 정말 사랑하는 자의 모습으로 붙어 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하였습니다. 여기서 간하였다고 하는 얘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충신이 임금에게 뭔가 진실한 말을 할 때 간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여기서 간한다는 말은 '에피티만'이라는 헬라어를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책망했다는 것 입니다. 주님을 책망했습니다.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주님 이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런 일을 중지하십시오. 말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도 그리 아니하실 것이니 주님도 그리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결코 주님은 하실 수 없습니다. 내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미 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은 가장 큰 충성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가장 큰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든 지 주님을 보호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충정 어린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 랑하는 마음으로 한쪽으로는 경고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면서 그리고 자기의 단정적 의지를 가지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 륭한 베드로의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은 의외의 반응을 하게 되셨습니다. 여러분 그 다음 말 씀을 보면 알게 되지요.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 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도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 도다" 칭찬 받을만한 충정 어린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 다. 뭐라고 반응 하셨습니까? "사단아" 사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적 자다. 반대 자다. 너는 반대자가 되었다. 너는 사단의 도구가 되었다. 나의 길을 막는 자가 되었다. 그러 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따를 존재가 되지 못한다."내가 메시아의 길을 가는데 이 길로 올 수 없다. 너는 이미 본분을 떠났다. 말씀합 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이것은 스스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 어지게끔 함정으로 덧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해서 돌로 떡이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넘어지도록 쓰러지도록 함정에 빠지도록 지금 베드로는 이끌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혹하는 자가 되 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정말로 너는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 도 생각을 못하면 사람의 일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도 못하는구나.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 못하는 구나. 분별하지도 못하는 구나. 네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도 모르는 철없는 사람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말은 정말로 당혹 감과 사단의 도구가 되는 엄청난 비참의 자리요, 충격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 훌륭한 신앙의 고 백, 충성, 열정,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깨어지고 무너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고백했는 데 나는 열심을 냈는데 나는 충성을 다했는데 나는 사랑을 다했는데 이것이 다 여지없이 무 너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냥 보통사람의 실수라면 모르겠는데 정말로 열심을 다했는데 칭찬을 들었는데 신앙공백까 지도 했는데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이지경이 되었을까?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명심해야할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할 신앙의 각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우쳐 주는 말 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우쳐야 할텐데 깨우치지 못한다면 이렇게 비참하게 되고 이렇게 흉악한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베드로가 깨우쳐야할 우리 가 깨우쳐야 될 신앙의 각성은 무엇이겠습니까? 24절을 보시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한번 더 말씀을 정리해야 되겠습 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베드로가 고백했어요. "야 너 참 훌륭 하다. 맞다. 네가 고백한대로 내가 메시아다. 너희들이 나를 제대로 알았구나. 그러면 이제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나를 제대로 보았다면, 제대로 보 았다면 그 다음엔 너도 내 모습을 제대로 보거라. 상대를 제대로 보게되면 그 앞에서 내 모 습을 제대로 갖게 됩니다.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내 모습을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목욕탕에서 남자들끼리 목욕을 하고 있는데 목욕을 하다가 옆 사람에게 물이 조금 튀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튄 것을 맞은 사람이 "조심하시 오" "미안합니다" "미안하면 다요? 사람이 그렇게 교양이 없어요?" 큰 소리를 치고 나왔습 니다. 나와서 옷을 입게 됐습니다. 야단을 친 사람은 군인이었습니다. 대위였습니다. 옷을 입 고 있는데 자기가 야단을 친 사람은 옷을 보니깐 대령이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걸 알았다면 아까 조심했을 텐데. 우리가 예수님이 누군가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군가?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가 알았다면 그 다 음엔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 앞에 자식이요 아무리 자식이 훌륭해도 자식일 뿐이지요. 그것이 변하겠습니까? 이걸 잘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지 금 베드로의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분명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그러면 이제 너를 제대로 봐라. 그러면 네가 누구냐, 베드로가 누구냐, 우리가 누구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따르는 자이다. 너는 선택과 소명에 응답한 사람이다. 떠나라 하면 떠나는 것이고 가라 하면 가는 것이고 죽으라 하면 죽는 것 이다. 너는 따르는 자이다. 내가 너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 뜻에 주님을 맞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 기를 부인해야 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내 모습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 까? 착각을 하게 됐습니다. 자기가 하는 것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주님을 붙들고 있고 자기가 주님 앞에 가까이 가 있는 자기방식이 곧 주님을 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착각하게 됩니다. 내 방법이 내가 하는 것만이 교 회를 위한 것이고 내가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 할 때가 있습니 다. 잘 봐야 됩니다. 그는 또 한 가지를 착각합니다. 자신이 주님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착 각하고 있습니다. 그리 마옵소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 라 자신이 주님의 미래까지 보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 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미래를 보장하겠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볼 줄 모르는 장님이 된 큰 착각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정신을 차려라. 네가 누구인지 봐라. 따르는 자이다. 너는 "예" 하는 자 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이다. 너는 너를 부인해야 된다. 부인한다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 님을 따랐을 때 따르는 자 일뿐이지 그 다른 모습은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떻 게 되겠습니까? 더 이상 내가 아니고 내 것도 없고 그분만이 내게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황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여기에 조금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 니다.
베드로는 부모를 내버려둔 사람입니다. 그물을 내버려둔 사람입니다. 베를 내버려둔 사람입 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에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내버려두고 내버려두었는데 왜 버렸는가? 정말 주님을 위해서 버렸는가? 아니면 나를 위해서 버렸는가? 갈등과 혼돈이 그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버린다고 하는 것은 주님 때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 자가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형집행 도구였습니다. 사형수가 직접 지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인데 그것은 내게 있어서 영광이나 능력이나 자기 충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욕구와 욕망과 유혹을 허락하지 말고 죽음으로라도 헌신하겠다고 하는 각오하는 신앙의 모습 신앙의 실천 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 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은 그냥 적당히 따라 오라가 아니라 열심을 다해서 전심전력으로 쉼 없이 계속해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메 시아를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다시 정리해 드리면 이 말씀의 중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되라. 십자가를 지는 자가 되 라. 나를 좇는 자가 되라.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라는 모두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정말 나의 모습이 주님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해지고 어떤 모습으로 존재되어지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인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소금인형이 여기저 기 돌아다니다가 바닷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넓은 바다를 봐서 그런지 몰라도 바다를 보고 기뻤습니다.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바다가 말했습니다.
"너는 누구니?" "나, 소금인형" "넌 누구니?" "나 바다" "야 되게 좋네, 나 너랑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지?" 바다가 말했습니다 "이리 들어와" 소금은 들어갈 용기가 안 났습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소금인형은 바닷가로 뛰어 들었습니다. 바다가 소금인형에게 물었습니 다. "넌 누구니?" "난 바다야" 소금이 아니라 바다가 됐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녹아질 때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 음씨를 닮습니다. 그분의 뜻을 닮습니다. 기도를 닮습니다. 그분의 삶은 닮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피 흘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영광이 있었습 니다. 권능이 있고 기적이 있어서 영광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모습이 스데반을 부정하고 주 님을 닮은 모습이 있어 승리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영혼 을 받으시옵소서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어쩌면 이렇게 주님과 닮은 기도를 드렸을까. 주님 닮은 모습이 거기 나오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님에게 명령합니다. 자신 의 뜻을 따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미래도 보장한다고 하니 정말 주님을 넘어지게 하 는 자요 그는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정리해서 우리들이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간과할 수 없 는 신앙의 포인트가 주어지게 되는데 신앙 고백하는 자 따르는 자는 정체성이 일치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일치된 모습을 가져야 되는데 만일 그렇지 못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주님과 대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대항하는 주님과 맞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과 맞서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겠다는데 못 갑니다. 주님은 죽겠다는데 못 죽습니다. 주님은 하시겠다는 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주님 이 하시고 가셔야겠다는데 그것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항합 니다. 사람의 일로 하나님의 일과 맞섭니다. 사람의 열심히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에 맞서고 있습니다. 불순종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고백을 한 사람의 자기 모습에 대 한 자기 존재에 대한 깨우침과 각성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의 우선적 신앙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주 님은 누구 신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따르는 자인가? 명령하는 자 인가? 나는 부인하는 자인가? 내 존재를 고집하는 자 인가? 나는 십자가를 지는 자인가? 토마스 아웅파스는 이 러한 일에 대한 권면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즐겨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가 당신을 져 줄 것이요 그 십자가가 마침내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인도할 것이며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괴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면 그 십자가가 내 짐을 져줄 것이고 마침내 하나님이 원하 는 목적지까지 인도해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진다고 내가 사라진다고 내 뜻이 줄여 진 다고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 가를 지는 것이 당신이 설자리를 바로 찾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서 있어야될 바른 자리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질 각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에 부적당한 사람입니다. 자기존 재의 깨우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일에 적당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런 안타까움을 우리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는 많으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하나 님의 위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함께 고난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하 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고자 초대받고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금식하며 기도하 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기쁨과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주님을 위하여 괴로 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존재 모습입니다. 안타까운 모습 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다시 정리하십시다. 그리고 확신하십시다. 나는 주님을 따르는 자요, 나는 나를 부인하는 자다. 십자가를 지는 자다. 이를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하는 자, 여기에 대한 각성이 있을 때 새로워집니다. 은혜가 새로워집니다. 능력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신앙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존재의 새로운 깨우침 이것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깊이 각인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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