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 말을 준행하였으니(창 22:1-19)
여러
교우님들이 기도해 주신 덕분에 지난 40여일 동안의 안식년 휴가를 은혜가운데 잘 지내고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자동차를 타고 남해안
지역을 여행하였는데 도중에 우리 여전도회에서 지원하고 있는 덕동교회를 방문하고 목사님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고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1부 예배부터 시작해서 4부 예배까지 설교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이 아니라 안쉴년이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 냈습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러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나중에는 하겠다고 해도
안 시켜줄 것 같아서 열심히 하고 돌아왔습니다. 어쨌든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휴식기간을 만들어주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주에는 제 친구 목사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신학교 동기생 중에 고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와서 목사안수를 받고는 새로 개발된 평촌이라는 곳에 있는 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목회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고를 한 결과 교회는 놀랍게
부흥되어 평촌지역에서는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 교회는 해마다 봄가을로 큰 바자회를 열어서 그 수익금을 전액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만들어 공부를 시키고, 지방에서 상경해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와 있는 중국인들과 조선족들을 전도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어느 날 무거운 병에 걸렸습니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걸어 온 목회인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 중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봐 고목사, 네가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교회를
돌보느라고 수고했는데 과연 그 수고가 나를 위한 것이었나? 아니면 네가 큰 교회를 이루어서 남들 앞에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어서였나?" 가만히
돌아보니 그렇게 열심히 뛰어 온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봐 고목사, 네가 바자회 열어서 불우이웃 돕는다고 한 것 말이야, 그거 정말로 불우이웃을 위해서 한 일인가? 자네가
정말 그렇게 불우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거 네가 유명해 지려고 한 일이 아닌가?" 가만히 돌아보니 정말로 불우한
이웃들이 못 견디게 불쌍해서 한 일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회개하였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고목사, 그러면 네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무엇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느라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전부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로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래도 제가 기도는 드렸지 않습니까?" "그래 고목사, 네 말이 맞아. 네가 한 일
중에 가장 귀한 일은 목회도 아니고 바자회도 아니고, 네가 내 앞에 엎드려 기도한 일이야" 그래서 이 목사님은 문병 오는 사람들에게 "다른 것
말고 그저 기도하시오"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과연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창세기 22장의 말씀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었을 때 아들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100살이 되어서 얻은 아들, 아브라함이 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은 이삭이 젖을 떼었을 때 아브라함이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그 어머니 사라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히브리인들은 아들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습니다. 시편 127편에서도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젊은 자의 자식이라는 것은 아들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딸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 그러면 무조건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많은 사람은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 찬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든든하고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90세가 되도록 아들 없이 살아온 사라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동안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눈물과 한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90세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하셨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라는 것은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살이 타고 뼈가
타고, 완전히 타버리고 재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희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두 가지 면에서 모순됩니다.
첫째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른 아들을 주실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을 통해서 큰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약속을 깨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감정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지만 아들을 내놓으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6.25때의 일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업고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서 밥 한 숟가락을 얻었는데 막 먹으려는 순간, 등에 업힌 아들이 "엄마" 하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이에게 먹입니다. 이번에는 감자를 한 톨 얻었습니다. 막 먹으려는 순간 다시 뒤에서 "엄마"하고 부릅니다. 이번에도 감자는
아이 입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둘 다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배고파서 죽고 아들은 너무 먹어서 배탈이 나서 죽었습니다.
나는
굶어 죽어도 아이에게는 먹이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내 손으로 불에 태워 죽이라니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도저히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본문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서둘러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여보, 도대체 아들을 데리고 어디를 가는 거예요?" 물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응, 아들 죽이러 가" "아 그래요, 잘 갔다 오세요" 그랬겠습니까? 사라의 물음에 아브라함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났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라고 하실 때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감정적으로 맞지 않을 때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보이십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서로 다를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초적인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 근처에 있는 모압 땅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모압 땅에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모압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우리가 이기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은, 금을 가득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른지 알아보리라"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혹시 다른 말씀을 주실른지 모르니까 기다려 보자는 것입니다. 발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욕심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런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 뜻을
보태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내 뜻을 먼저 세워놓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내게 어떤 불이익을 가져다준다 해도 그대로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노아는 장차 다가올 홍수심판을 내다보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왕자로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고난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멀리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 이것이 축복의 첫 걸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열심을 내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봉사도 해야 하고, 전도를 하는 것도 필요하고 선교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를 때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산다면 지금은 좋아 보이나 그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하나님께서 번성케 해주십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전 세계 신학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의 주제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제를 놓고 전 세계에서 모인 신학자들이 사흘동안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온 신학자가 세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학자들이 의견을 발표하라고 성화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러시아에서 온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모여서 사흘씩이나 회의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 저절로 증명이 될텐데 왜
쓸데없이 이렇게 모여서 회의를 합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보면 그 말씀들이 하나도 틀림이 없는 진리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뜻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논리와 맞지 않고 내 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축복의 비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길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모리아산까지 가는 길이 사흘이나 걸렸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사흘 길을 걸어가는 아브라함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속에 얼마나 복잡한 생각들이 많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려 아들의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아들이 왜 나를 번제로 드리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나중에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 사라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이 많은 아내가 넘어져서 심장마비로 죽으면 어떻게
하나?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래 네 마음을 내가 다 알았다. 이제 다시 돌아가거라"
이렇게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모리아산을 항해 걸어가는 사흘, 이 사흘이 아브라함에게는 무척이나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속시원하게 빨리 결론을 내려주시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만큼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낙심하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이루는 길이 비록 험하고 멀더라도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 더 쉬운 다른
목표를 세우고 더 쉬운 방법으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다 해도, 아무리 유혹과 핍박이 많다고 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또 하나의 장애물은 같이 동행했던 두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이 종들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 한다면 이 종들은 목숨을 걸고 말렸을 것입니다. "우리 주인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치매에 걸렸구나"
하면서 아브라함을 말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종들을 떼어놓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도 이런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여러분을
오해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아내를 핍박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녀를 부모가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너는 예수를 믿으니 너한테서 제삿밥 얻어먹기는 틀렸다" 이렇게 오해하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도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어느 누가 되었든 여러분의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들, 여러분의 영적인 분위기를 깨뜨리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사람을 구원해 낼 자신이 없으면 멀리 하십시오.
"여기서 기다리라" 이렇게 하십시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수영을 잘해야 합니다. 공연히 뛰어 들었다가는 같이
빠집니다. 술집에 가서 술집 아가씨들 다 전도하겠다 이런 생각하지 마시고 자기 믿음이나 잘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과감하게 멀리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모든 시험을 다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렸습니다. 사흘동안이나 계속되는 마음의
갈등도 이겨냈습니다. 자신의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장애물도 멀리 떼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 이삭을 꽁꽁 묶고 아들을 향해 칼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상당히 다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름을
두 번 부르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는데 그것은 세 번이나 불렀는데 사무엘이 누가 불렀는지 잘
모르니까 답답해서 두 번 부르신 것이고, 보통 때에 두 번이나 이름을 부르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부르셨다는 것은 상당히 급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아이가 울음을 참고
있다가 어머니를 만난 순간 설움에 북받쳐 대성통곡을 하듯이 아브라함도 그렇게 울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서야 제 마음을 알았다고
하시는군요" 아마 이러면서 목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눈물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억울한 일도 많았고,
손해보는 일도 많았습니다. 오해도 많이 받고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그때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니 이제서야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은 안하셨지만 언제나 제 곁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백과 이런
감격의 눈물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15절부터 18절을 다시 읽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아는 지식도 아니고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아닙니다. 매일 매일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제로 사는 것입니다. 내 뜻과 다르고, 내 지식과 감정에 맞지 않아도
그래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인내하는 것이고, 말씀을 이루기 위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순종의 모리아산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복을 주리라. 너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이 축복의 모리아산에 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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