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未完)의
해방(창세기 50:19-21)
요즘
한국에서는 선거 철을 앞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또 다시 지역감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해서 나라를 동서남북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공천에 탈락했다고 해서 보따리 싸들고 집을 나가서 다시 살림을 차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그만큼 했으면 그만해도 좋을 것 같은데,
전부다 자기가 아니면 대한민국이 금방 쓰러질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유대교 랍비가 살고있었는데, 한번은 장기 휴가를 얻어서 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휴가를 간다고 짐을
싸들고 산등성이를 넘어섰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왜 돌아왔느냐고 했더니 아무 말로 안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이웃 마을의 친구 랍비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니, 자네는 왜 휴가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내가 없어도 마을에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 큰일 나거든."
이
랍비는 평소에 "내가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다." 큰 소리를 쳐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휴가를 떠나서
없을 때에도 마을이 평안하고 아무 일이 안 생긴다면 큰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정치를 하겠다고 나온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한 몸 바쳐서 애국하고자 나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듣는 입장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씁쓰름합니다. 살다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인데 꼭 팔을
걷고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설치다가 결국에는 접시도 깨고 솥단지도 깨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애국을 이야기하고, 조국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뼈가 가루가 되도록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우기면서 나서는데, 할 말은 없습니다마는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은
여든 한 번째 맞이하는 삼일절 기념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애국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삼일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놓고 이제 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른 세 명의 대표 중에서 누가 먼저 서명을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데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서명하는 순서는 곧 죽는 순서입니다. 먼저 죽고 싶은 분부터 서명하십시오."
그러자 서른 세분의 민족 대표들은 서로 앞 다투어 서명을 하였습니다. 이 운동이 성공하면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장관이 되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 운동은 내가 먼저 죽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삼일정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우리 한국의 정치는 "누가 먼저 죽을 것인가?"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너는 죽더라도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다."는 사람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되고, 또 전에는
그렇게 죽일 듯이 싸우던 사람들도 환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일만세 운동에 목숨을 걸고 참여했던 우리의 선조들의
역사를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우리 나라가 결코 잘될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삼일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당시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 대표 서른 세분 중에 과반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곧 신앙적인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자유, 우리 민족에게 주신 자유를 아무도 억압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는 신앙에 기초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온 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아, 이천만 동포여! 평화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은 이제야 그 손을 들어 침략주의를
타파하고 세계 수평선상에 평화의 낙원을 축조하여 자유의 무대를 건설하도다."
당시에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삼일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누가 삼일운동을
시켰는가?" "하나님이 시켰다." "그러면 삼일운동 본부는 어디있는가?" "하늘나라에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가장 먼저 앞장 서 나아가 만세를 부르면 숨져갔습니다. 이렇게 이름 없는 애국자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성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러한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민족은 자유를 누리고는 있지만 그것은 반쪽의 자유입니다. 우리 민족이 38선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저 북녘 땅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여전히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누리는 해방은
미완(未完)의 해방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한 여성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평양에서 3월 2일에 체포되어 경찰에 구금되었다. 그런데 경관들은 채찍으로
우리 여자들을 내리치면서 옷을 다 벗기고 벌거숭이로 여러 남자들 앞에 세워놓았다. 경관들은 나에 대해서는 길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밖에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 몸을 돌려가면서 마구 때려서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내 양손은 뒤로 꽁꽁 묶여져 있었다. 그들은 내 알몸을
사정없이 때리고는 땀이 흐르면 찬물을 끼얹었고, 춥다고 말하면 담뱃불로 내 살을 지졌다. 사람으로는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욕과 조롱을 우리는 다
받았다" 이것이 자유를 얻기 위해 삼일운동에 가담했던 여성들이 받았던 고통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똑같이 자유를 찾아 최근에 북한에서 탈출했다가 붙잡혀 교화소에 갇혀있던 '이옥순'이라는 여인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교화소에서
인간 이옥순이 아니라 꼬리 없는 짐승 832번이었다. 오전 5시에 기상해서 밤 12시까지 노동했고, 화장실은 하루 세 번 밖에 갈 수 없었다.
여자로서 차마 견디기 힘든 고문을 겪었고, 영하 35도 이하의 추운 겨울에 발가벗긴 채 서있는 일명 '동태 고문'으로 동상에 걸려 열 개의
발톱이 다 빠졌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한 여성이 집에 두고 온 아이들 이름을 부르면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또한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은 박해를 피해 머나 먼 만주벌판으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맥켄지(F. A.
McKenzie)선교사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만주를 찾아오는 한국 실향민들의 말못할 비참한 모습은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엄동설한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눈 덮인 산언덕을 말없이 허물어지듯 밀려간다. 나무 많고 돌
많은 버려진 땅 만주에 생사를 걸고 이들은 발을 내딛고 있다.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갔으며 부녀자 뿐 아니라 건장한 청년들도 얼어
죽어가고 있었다. 여자들은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 허리께가 퍼렇게 드러났는데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사람은 그나마 서로의 체온으로 조금은 몸을
덥힐 수 있었다. 버선을 신지 못한 어린아이들의 발목이 새파랗게 얼어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몇백 리를 걸어간다. 뼈가
휘청거려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내 디딜 수 없을 때까지 그들은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북한을 탈출하여 같은 중국 땅, 같은 만주벌판을 떠돌아다니는 북한동포들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12월에 접어든 북방의 날씨는 차가워
속 안까지 바람이 스며들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자 두만강 둑에 살며시 올라서니 예견했던 대로 보초병들이 없었다. 나는 급히 걸음을 다그쳐
두만강에 들어섰다. 물 기슭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 두만강 물은 어찌나 차고 시린지 금시 몸이 얼어드는 것 같았지만 그런 걸 느껴볼 여유도
없었다. 첨벙 첨벙 물소리를 내며 두만강을 단숨에 무사히 건너니 배꼽 높이까지 옷이 흠뻑 젖어 몸이 다 떨려왔다. 찬이슬에 옷은 더 흠뻑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탈출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에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에
역시 북한을 탈출한 어린 남매의 증언이 있습니다. "장마당에서 꽃제비들끼리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가면 아주 먹을 것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을 데리고 열차를 타고 두만강으로 갔다. 때는 오전 11시경이었는데 나는 동생 소연이를 데리고 두만강 옆의 둑에
다가섰다. 두만강 둑 위에서는 군인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풀을 뜯는 것처럼 가장하고 둑 옆에서 햇풀을 뜯어먹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시간이 되자 둑 위에 있던 군인들이 점심 먹으러 사라진 사이에 나는 소연이를 데리고 두만강에 들어섰다. 나와 소연이는 손을 꼭
잡고 물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겨울이 갓 지나서 그런지 물은 정말 차가웠다. 어떤 곳은 소연이의 코까지 물이 차 올라 소연이는 허우적거렸다.
잘못하다간 빠져죽는다는 생각에 우리는 손을 더 꼭 잡으며 건넜다. '소연아, 힘을 내. 잘못하면 빠져죽어', '오빠야, 나 겁이 나',
'괜찮아, 죽지 않아. 오빠가 있는데 왜 죽겠니?', '오빠야, 나는 죽어도 오빠는 죽지 말아.' 나는 소연이를 정말 죽이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같은 역사가 반복되는 것입니까? 90여 년 전 그 추운 겨울에 굶주리고 헐벗은 채로 얼어 죽어가면서 만주벌판을 헤매야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오늘 북한동포들이 역시 똑같은 모습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얼어 죽어가면서 만주벌판을 헤매는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우리의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내몰았던 것처럼 오늘 북한의 여성들은 중국 돈 몇 천원에 팔려가서 성의 노리개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민족은 아직 온전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북한 동포들은 지금도 일제시대와 조금도 변함없이
고통과 굶주림 속에 던져져있습니다.
이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누군가가 고기가 들어있는 국수를 맛있게 먹다가 국수에 떠있는 기름이 세모난 것을 보고 보안대에 신고했다. 그래서 국수를
만들어 준 아주머니 집을 수색했더니 앞마당에서 30구의 시체와 뼈가 발견되었다." 최근 북한의 인구는 97년에서 98년 사이에 300백만 명이
줄어들었습니다. 일년 동안에 300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만강에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으면 그물에 북한 사람들 시체가 수도 없이
걸립니다. 두만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은 사람들이 아니면, 북한 쪽에서 굶어죽은 시체를 관이 없어 묻지 못하고 강물에 던진 것입니다.
이러고도
우리 민족이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실정인데도 우리 민족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해방,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반쪽 짜리 해방이요, 반쪽 짜리 자유입니다. 아직은 미완성의 해방입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완전한 해방,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민족이 되기 위해 다시 한번 삼일만세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온 국민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갔던 그때의 그 열정을 다시 한번 되찾아 북녘 땅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해방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밖에는 없습니다. 옛날 삼일만세운동을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해냈던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북한동포들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며 일어설 때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저들에게 참된 해방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요셉은 낯선 이국
땅에서 노예로 살았고, 또 다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온 것이 열 일곱 살 때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이 서른 살이니까 요셉은 13년 동안을 종살이를 하고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잠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니라 20대 청춘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통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아무런 잘못도 없이 13년의 세월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보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팔았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은 이 극심한 기근에서 당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날 우리도 남북이 갈라져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특별히 북한의 김일성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인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당시 북한은 가해자였고, 남한은 피해자였습니다. 우리는 북측에 의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고, 모든 재산을 다 빼앗겼으며,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여 오늘까지도 이산가족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분명히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요셉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3.1
독립 선언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 온 인도 정신이 새 문명의 서광으로 인류의 역사 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인,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
저
북녘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힘의 통치는 가고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가 오기를 원합니다. 반쪽 짜리 해방이 아닌
온전한 해방을 맞이하여 정의와 인도와 번영을 누리는 우리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완의 해방을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구원을
손길을 뻗쳐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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