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선물을 보내는 야곱(창세기 32:13~24)
사람은
평소에는 이상과 믿음으로 상황에 대처하다가도 다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상식과 이성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의지하다가도 눈에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을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야곱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고민이 시작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런데 화해의
메시지를 받은 에서가 4백명의 사람들을 거닐고 야곱에게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야곱에게 전해집니다. 그 소식을 접한 야곱은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맙니다. 야곱은 그 소식을 듣고 자기의 재산과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서 살아남을 작전을 세웁니다. 그는 형 에서가 무서웠기 때문에 외롭고 답답한
심정에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드디어 야곱은 기도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위기에 빠졌을 때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불안한
인생
야곱의
조부와 아버지는 하나님과 매우 가까웠지만 야곱은 기도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절망에 빠지자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을 찾는 시작입니다.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가 번성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 자신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듣고도 야곱은 염려하고 또 의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무리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하셔도 내게 믿음이 없으면 자꾸만 흔들리게 됩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야곱은
그날 밤에 기도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하룻밤을 지냅니다. 그리고 다음날 자기의 재산 중 많은 부분을 떼어서 형 에서에게 선물로 보냅니다. 야곱은
물질을 사용해서 형 에서의 마음을 녹여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야곱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입니다.
암
염소 2백마리, 수염소 20 마리, 암양 2백 마리, 수양 20 마리 등등 선물로 보내진 짐승은 성축만 5백50마리에 이르릅니다. 새끼들까지
합하면 더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짐승을 선물로 보냈다는 것은 야곱이 그만큼 많이 불안해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서로
헤어질 수 있는 관계라면 차라리 문제의 해결은 간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헤어질 수가 없고,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일 때 갈등이
생깁니다.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 놓아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야곱은
형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가축들을 보내면서도 한꺼번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소와 염소와 양과 약대 무리를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다섯 무리로
나누어서 보냅니다. 그리고 한 떼와 다른 한 떼 가 이동하는 사이에 거리를 두고 보냅니다. 이유는 에서가 다섯번에 걸쳐서 선물을 받으면 마음이
쉽게 풀릴까해서 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놓으면 만약에 에서가 공격을 해오더라도 얼마든지 도망할 수 있도록 하는 작전을 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이렇게
계산적이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화해를 청하고 용서받기를 원해서 많은 선물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나 계산을 하며 자기가
빠져나갈 곳을 마련한 것입니다.
야곱이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서 형 에서에게 접근하고 있지만 야곱의 모든 행동들을 보면 이야기는 야곱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져 성공을 하고, 돈을 벌어 높은 지위를 얻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질수록 인간의
마음은 불안한 것입니다. 두려움에 가득차 있는 삶속에는 미래에 대한 염려가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 불안해 하고 염려하는 것은
자기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삶속에 어떤 불행이나 두려운 일들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을 현재속에서 이미
불행하게 만듭니다.
야곱도
형 에서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축을 이끌고 가는 종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줍니다.
17,
18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야곱은
종들에게 ‘너는 내 형 에서를 만나거든 그를 주라고 칭하고는 야곱을 가르켜 종이라고 표현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깍듯이 예절을 갖추고 ‘우리 종
야곱이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다’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야곱이 뒤에 온다는 말을 빼놓지 말고 이야기하라고
당부합니다.
19,
20절을 보십시오.
그
둘째와 세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두번째,
세번째 무리를 이끄는 종들에게도 계속해서 똑같은 당부를 합니다. ‘형 에서를 만나거든 이것이 야곱이 보내는 예물이라고 말하고 그에게는 꼭 주
에서라고 말하고 야곱을 가르켜서는 종이라고 말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뒤에 야곱이 따라온다는 말을 잊지 말라고
이릅니다.
홀로
남은 야곱
이렇게
거듭해서 당부를 하고 있는 야곱을 보면 애처롭고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야곱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사실은 화해와 용서의 길은 멀고도 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서 분노를 품고 복수심을 갖게 되었을 때, 특별히 가족사이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갈등을 해결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화해란 멀고 먼 길이요, 용서란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해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남북은 화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멀고 먼 길입니다. 동서의 갈등도 멀고 먼 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갈등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계층간의 갈등과 빈부의 차이 등 인간 관계에서 가졌던 우리의 한은 풀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화해와 용서는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면 야곱의 심정이 좀더 잘 이해됩니다.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그렇게
주도면밀한 대처를 해놓고 나서도 야곱은 편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예물을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을 보냅니다.
여러분,
혹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위기와 갈등 앞에 있으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야곱이 밤에 일어났다는 표현을 통해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해서 아예 잠자리를 거두어버린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한밤중에 아내들과 열 한명의 아들들을
부릅니다.
하나님
떠나서 가질 수 없는 행복
그리고
아내와 아들들을 먼저 목적지를 향해 떠나 보냅니다. 야곱은 너무나 불안하고 두려우니까 자기 부인과 아이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합니다. 밤새도록
고민을 한 야곱은 이제는 물질만 가지고 되지를 않겠다고 판단하고 가족까지 이용합니다.
간혹
가족까지 이용해서 사업과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봅니다. 야곱이 이런 지경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른 원인은 야곱이 20년
동안 깊이 사로잡혀 있었던 죄책감과 불신과 염려와 불안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런 식으로 인간적으로 방어하고 대처하면 할수록 불안은 증폭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얻고자 하면 할수록 행복은 없어 보입니다. 불안을 제거해보려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시도해보면 더 불안해집니다. 돈을 가지면 불안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아서 돈을 벌어보지만,돈을 벌면 벌수록 불안은 더욱 더 커질 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많은 물질을 가져 좋은 집에 살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0평짜리 집에 살면 ‘20평 짜리의 불안’이 있고 40평짜리집에 살면
‘40평 짜리의 불안’이 있기 마련입니다.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불안이 뒤따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행복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안해질 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자기가 불안하니까 친구들과 가족들을 항상 동행해서다녀야 안심을 합니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고독은 더 깊어집니다.
이런 존재가 인간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경험합니다. 그는 부인과 자식들까지도 모두 내어주고도 불안해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다’는 말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제물과 아이들과 부인까지 모두
떠나보냈습니다. 야곱은 밤에 아내들과 아이들과 재산을 거느리고 얍복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는 얍복강 건너편에 가족들을 두고 강을 도로
건넜습니다. 그래서 홀로 남게 됩니다.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면 외롭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아서 아무도 곁에 없습니다. 자기가 모두를 떠나 보낸 것입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곁에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을 경험합니다. 이 절망은 그를 자포자기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 자포자기와 고독의 맨 끝에 다다르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야곱의
할아버지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고 아버지가 이삭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처음으로 정직하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인생을 살아나가며 크고 작은 위기를 많이 겪습니다. 위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위기는 위기인데 자기의 힘과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위기가 있습니다. 재산을 잃었다든지, 병을 얻었다든지,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든지의 위기는 견딜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위기는 아무리 기다리고 인내해도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결정적인 위기입니다. 병이 들어도 죽을 병에 걸리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재산을 잃어 파산을 해서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
여러분,
인간은
절망할 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적당한 위기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적당히 만나게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위기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얍복강변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신론자이거나 불교나 다른 종교를 가져서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난 주에 감동적인 편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의 주인공은 일년 전에 가족 공원에 놀러갔다가 전도를 받고 열린예배에 왔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몰랐던 그는 처음에는 지루한 마음에 빨리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그
다음날부터 교회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그 다음주부터 1년동안 새벽기도에 나와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이번 주에는
제주도에 있는 DTS에 간다고 합니다.
이분은
얼마전까지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와 본 일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르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입니다. 교회도 잘
다니고, 봉사도 잘 하고, 누가 봐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직분도 가진 사람이고 그의 부모도 예수를 잘 믿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날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에 부딪힙니다. 그 순간 그가 깨닫는 것은 자기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나님이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를 잘 믿는줄 알았는데 위기와 절대 고독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하나님이 아무 능력이 없고 자신의 기도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화급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그는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의 경우는 후자에 속했습니다.
자신의
하나님을 만난 야곱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있어도 야곱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하나님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가 아이들과 아내를 보내고 나서 홀로 고독과 외로움에 직면했을 때의 감정은 단순히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 이상의 문제로서 그는 인생의 절대 고독과 두려움 앞에 부딪힌 것입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입니까? 혹시 헛 믿어온 것은
아닙니까? 교회에 왔다갔다 하면서 헌금도 하고 찬송도 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혹시 여러분 인생의 결정적인 위기 앞에 아무 능력도
없는 하나님은 아닙니까?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모습을 예수님에게서도 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하는 사건앞에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십자가를 꼭 져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예수의 인생에서 너무나 큰 문제였기 때문에 기도할 때 땀이 피가 됩니다.
여러분,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기도를 해본적이 없다면 당신은 진정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절대적인 절망과 죽음 앞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독특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새벽미명에’, ‘밤이 맞도록’, ‘한적한 곳에 나가서’ 등의 말입니다. 또 마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 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라는 말도 나옵니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는
독특한 말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홀로 시간을 보내셨다는 것은 허무주의 고독이 아니라 성령안에서의 고독입니다. 사람들을 다 떠나 보내고 나서 하나님과의 독대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이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그분의 현현 앞에서 내 존재를 다 던지는 것입니다.
기도,
천사와의 씨름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금년에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능력이시고, 피난처이시고, 견고한 바위가 되시고, 여러분의
구원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바로 이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이제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곱이
홀로 있다가 새벽까지 천사와 씨름했다는 말씀을 보십시오. 기도란 씨름입니다. 기도는 감상물이 아닙니다. 기도는 써서 읽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 하소연이나 소원이 아닙니다. 야곱이 겪은 사건에 의하면 기도란 천사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나를 회복시켜주겠다는 약속이 없으면 당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라며 야곱은 새벽까지 천사를 붙들고 씨름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만나 응답을 받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야곱은 고독과 절망과 인생의 허무와 위기에서 탈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절대고독과 위기를 견디게 하시는 그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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